죽을 권리가 인정받기까지

2024년 2월 15일, explained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인 나라, 네덜란드의 죽을 권리는 어떤 논의를 거쳐 왔을까?

2016년 네덜란드 TV에서 방영한 안락사 다큐멘터리. 해니 고드리안은 언어 능력이 서서히 없어지는 희귀병인 의미 치매를 앓았다. 해니는 안락사를 결정했다. 의사는 그녀의 정맥에 독성 약물을 주입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 네덜란드 시청자 150만 명이 이 모습을 지켜봤다. 사진: NTR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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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스 판아흐트 네덜란드 전 총리가 지난 5일 자택에서 부인과 동반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93세였다. 판아흐트 전 총리가 설립한 시민 단체 ‘권리 포럼’은 “두 사람은 건강 악화로 고통스러워했고, 상대를 남겨 두고 떠날 수 없었다”라고 밝혔다. 판아흐트 전 총리는 2019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WHY NOW

2002년 네덜란드는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했다. 네덜란드에선 ①의료진이 환자에게 독성 약물을 투입해 죽게 하는 안락사가 합법이다. ②의료진이 건넨 약물을 환자가 실행해 죽음을 맞는 의사 조력 자살이 합법이다. ③인공호흡기 같은 생명 유지 장치를 제거해 죽음에 이르는 연명 의료 중단이 합법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③번만 합법이다. 죽을 권리에 대한 네덜란드의 사회적 논의는 어떤 과정을 거쳐 왔을까.

포스트마 사건

1973년 네덜란드 의사 포스트마의 어머니는 뇌출혈 후유증을 앓았다. 신체 일부가 마비됐고, 귀가 들리지 않았고, 언어 장애가 생겼다. 어머니는 요양원에서 지냈는데, 넘어질 위험이 있어 의자에 묶인 채로 생활해야 했다. 어머니는 의사인 딸에게 삶을 끝낼 수 있게 도와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포스트마는 의자에 매어 연명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다. 포스트마는 어머니에게 치사량의 모르핀을 투여해 살해했다.

징역 1주일

포스트마는 살인죄로 기소됐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법원은 고작 징역 1주일에 집행 유예 1년을 내렸다. 재판부는 환자가 불치병을 앓았고, 고통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했고, 이미 임종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는 이유를 들었다. 또한 피해자의 반복적이고 진지한 요구에 따라 안락사가 이뤄졌다고 판단했다. 안락사를 허용하는 조건이 최초로 제시된 판결이었다. 이 조건들은 현재 네덜란드의 안락사법이 규정하는 안락사의 조건과 비교할 때 크게 다르지 않다.

숀하임 사건

1984년 네덜란드 대법원에서 안락사와 관련한 첫 판결이 나왔다. 의사 숀하임은 95세 여성 환자의 주치의였다. 숀하임은 이 환자를 6년 넘게 지켜봐 왔다. 환자는 골반 골절로 반년 넘게 병상에 누워 있었다. 진통제를 다량 복용했다. 숨을 거두기 일주일 전에는 의식을 잃기도 했다. 의식을 찾고 나서도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환자는 숀하임에게 고통을 끝내 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다. 숀하임은 환자의 가족은 물론이고 다른 의사와 상의한 끝에 환자에게 약물을 주사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

두 의무가 충돌할 때

대법원은 숀하임이 의사 협회의 윤리 강령을 책임감 있게 지켰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고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다. 동시에 마땅한 치료법이 없다면 환자가 불필요한 고통을 겪도록 해서도 안 된다. 두 의무가 충돌할 때는 환자의 병세가 개선될 여지가 없고 고통마저 줄일 수 없는 상황에서, 환자 본인이 숙고하여 결정하고, 분명하고 지속적으로 안락사를 요구해, 의사가 안락사를 실행했다면, 의사를 처벌할 수 없다고 대법원은 판단했다.

실태 조사

이때까지만 해도 네덜란드에서 안락사는 합법은 아니었지만, 대법원 판례에 따라 민간에서 관행적으로 이뤄졌다. 1995년 네덜란드 의회는 안락사 실태를 조사했는데, 그해 3600건의 안락사와 의사 조력 자살이 이뤄진 사실을 확인했다. 국민감정이 이러니 큰 저항 없이 법이 만들어졌다. 1999년 법무부와 보건부가 안락사 허용 법안을 제정하고, 2000년 하원을 통과하고, 2001년 상원을 통과해, 2002년 4월 법이 시행됐다. 세계 최초였다. 이 법의 정식 명칭은 ‘요청에 의한 생명 단절과 조력 자살의 심사 절차 및 형법과 장례법 개정 법률’이다.

안락사법

네덜란드에서 안락사를 실행하는 의사는 안락사법에 규정된 기준을 준수하면 형사 처벌에서 면제된다. 먼저 환자가 안락사를 자발적으로 요청해야 한다. 환자는 호전될 가능성이 전혀 없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어야 한다. 환자는 안락사 결정을 숙고해서 내려야 한다. 환자가 현재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안락사 말고는 없어야 한다. 환자가 안락사 결정을 내리면 주치의는 다른 의사들과도 상의해야 한다. 한편 네덜란드에서 안락사는 합법이지만, 환자의 권리는 아니다. 환자가 요청한다고 해서 의사가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

확장

네덜란드는 안락사법 제정 이후에도 법 적용 대상을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안락사 직전에는 환자가 최종 동의를 해야 하는데, 2020년에는 중증 치매 환자의 경우에 최종 동의 없이도 안락사를 시행할 수 있도록 했다. 안락사를 허용하는 연령도 늘렸다. 현행법은 12세부터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지만, 네덜란드 정부는 불치병을 앓는 1~11세 아동에게도 안락사를 시행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 개정은 의료계가 먼저 요구했다. 불치병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도 아동은 12세 미만이라는 이유만으로 고통을 감내해야 해 안락사의 사각지대에 놓였다는 이유였다.

IT MATTERS

네덜란드의 현행법이 옳다고만 할 수 없다. 윤리적, 철학적, 종교적 반론도 많다. 안락사를 선택하는 사람을 사회에서 쓸모없어 제거해 버릴 대상으로 여기게 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주목할 부분은 네덜란드는 죽음을 덮어 놓지 않고 깊고 넓게 논의해 왔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1~2년 내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다. 달리 말해 죽음이 가장 가까운 사회가 된다. 우리는 날마다 저출생 문제를 이야기하지만, 죽음은 입에 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인공호흡기를 떼는 연명 의료 중단이 합법화된 게 2018년이다. 그해 네덜란드에서는 7000명이 넘는 사람이 안락사를 선택했다. 마침 지난 1월 28일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는 의사 조력 자살을 허용해도 되는지에 대해 심판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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