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케이블은 어디 갔을까

2024년 3월 26일, explained

버려진 기계는 가난한 마을에 모인다.

2023년 2월, 아프리카 가나의 한 마을에서 전선을 태우고 있다. 사진; Muntaka Chasant for Fondation Carmignac
NOW THIS

전자폐기물이 쌓이고 있다. 위험한 수준이다. 인류가 만들어낸 일 년 치 전자폐기물을 트럭에 실어 지구 적도상에 일렬로 세우면 지구를 한 바퀴 돌고도 남는다. UN과 국제전기통신연합(ITU)가 지난 20일 공개한 〈2024년 국제 전자폐기물(E-Waste) 감시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전 세계 전자폐기물 발생량은 사상 최대인 6천2백만 톤에 달했다.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이 7.8kg씩 전자제품을 버린 셈이다.

WHY NOW

우리는 기술에 열광한다. 새로운 전자 제품의 출시는 일종의 ‘축제’가 되는 지경이다. 물건은 빠르게 헌것이 되고, 새것을 가져야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문화가 과연 지속 가능한 것일까? 경쟁적인 소비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은 과연 누구일까? 세계는 불공평하다. 기술 경쟁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이 불공평의 작동 원리를 들여다보면, 지금 신제품 보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이 보인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1986년, 쓰레기 무단투기 사건이 발생했다. 스케일이 남달랐다. 미국에서 발생한 폐기물을 아이티에 버렸다. 다 못 버린 쓰레기는 대서양과 인도양에 마저 버렸다. 규모는 1만 4천 톤에 달한다. 일을 벌인 것은 소각장 운영사 ‘Joseph Paolina and Sons’로, 필라델피아에서 발생한 폐기물을 뉴저지로 보내 매립해 온 회사다. 그런데 1984년부터 뉴저지주가 폐기물 반입을 금지하기 시작했다. 갈 곳이 없어진 쓰레기를 해외에 매립하려 했지만, 카리브 제도, 바하마, 도미니카 공화국 등 16개국에서 쓰레기 반입을 거부당하자 이런 사달을 냈다.

바젤 협약

황당한 사건이다. 당시에도 충격을 안겼다. 환경 단체, 그린피스가 실태를 알렸고, 이를 계기로 1992년, ‘바젤 협약’이 체결된다. 정식 명칭은 ‘유해 폐기물의 국가 간 이동 및 처리에 관한 국제 협약’이다. 살충제와 같은 유독 화학성분, 수은과 같은 중금속 등 위험 폐기물의 생성을 최소화하고 가능한 한 발생 국가에서 처리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특히, 이런 폐기물이 저개발 국가로 흘러드는 것을 막기 위해 유해 폐기물을 적절히 관리할 수 없는 국가로는 폐기물 수출 자체를 금지한다. 우리나라도 1994년 가입했다.

섭리대로, 가난을 향해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돈은 돈이 있는 곳으로 찾아든다. 그렇다면 더럽고 위험한 것은 어디로 향하나. 가난한 곳으로 모인다. 국제 사회의 약속만으로 이 섭리를 거스르기에는 역부족이다. 여전히 가나, 중국, 인도,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등의 가난한 마을에는 폐기물이 모여든다. 21세기 들어 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전자폐기물이다. 플러그나 배터리가 있는 제품들을 일컫는다. 주민들은 모여든 폐기물에서 금속을 캐낸다. 불에 태워 구리나 금과 같은 금속을 분리하거나, 산성 용액에 담가 값을 받을 수 있는 금속류를 추출하기도 한다. 때로는 맨손으로 제품을 뜯고 해체하며 돈이 될 금속을 골라낸다.

약자 중의 약자

쓰레기가 모이는 곳의 공기와 물은 자연히 오염된다. 작업자들은 유해 중금속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가난이 있는 곳에 환경 재난이 찾아드는 원리다. 목숨을 걸고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폐광 속으로 향하는 아프리카의 광부들처럼, 세계 각지의 가난한 마을에서 주민들이 전자 폐기물 속으로 들어간다. 특히 아이들이 더 위험하다. WHO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비공식 폐기물 분야 종사자 수는 최고 5천6백만 명에 달한다. 상세한 수치는 집계되지 않았지만, 이 중 어린이 작업자의 비율은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어린이는 작은 손으로 복잡한 전자기기를 분해할 수 있어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때 아이들은 수은, PCB, 납을 비롯한 다양한 유독성 위험 물질에 노출된다.

기술이 해결할 수 있을까

30년도 넘게 지속해 온 국제 사회의 ‘협약’으로는 전자폐기물이 저개발 국가로 흘러드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는 ‘기술’에서 답을 찾는다. 테슬라의 CTO를 지낸 J.B. 스트라우벨(J.B. Straubel)이 창업한 스타트업, 레드우드 머티리얼즈(Redwood Materials)는 전기차 배터리 금속의 95퍼센트를 재활용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는 전자폐기물 속에서 금만 뽑아내는 섬유형 흡착제를 개발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맥주 찌꺼기를 전자폐기물 재활용에 이용하는 연구도 진행됐다.

도시 광산

그럴듯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한 기술들이 속속 등장하는 까닭은 전자폐기물이 최근 ‘도시 광산’이라는 이름으로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삶과 더 이상 떼어두고 생각하기 힘든 각종 전자 기기에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희귀 금속류가, 이미 버려진 전자폐기물에 잠들어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은 전체 무게의 40퍼센트가 금속이다. 금, 은, 구리 등 우리에게 익숙한 금속은 물론이고 팔라듐, 코발트, 탄탈륨 등 아프리카 일부 국가에서만 주로 생산되는 희귀 금속이 포함되어 있다. 잘만 재활용하면 돈이 된다는 얘기다. 그래서 대기업도 도시 광산 개발에 나서고 있다. SK에코플랜트는 지난 2023년, 전자폐기물 처리 전문업체 테스(TES)를 인수하면서 관련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재활용이라는 변명

그런데 과연 기술이든 자본이든, 재활용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UN과 ITU가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아직 인간은 재활용으로 폐기물을 따라잡기에는 성실하지 못하거나 능력이 부족하다. 2022년 기준, 전자폐기물의 수거 및 재활용률은 약 22퍼센트에 그쳤다. 보고서는 2030년에는 수거 및 재활용 비용이 20퍼센트까지 떨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우리가 폐기물을 너무 많이, 빨리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결국, 재활용은 완벽한 답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보고서의 주요 저자 중 한 명인 키스 발데(Kees Baldé) 박사는 인류가 “너무 많이 소비하고 너무 빨리 버린다”고 지적한다. 또, 필수적인 희토류 가운데 1퍼센트도 재활용으로 얻지 못하고 있다며 재활용 산업이 지속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했다.

IT MATTERS

결국 덜 만들고 덜 소비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재활용 이전에 재활용해야 할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유럽환경국(EEB)은 유럽에서 모든 스마트폰을 1년씩만 더 쓰면 매년 210만 톤의 탄소를 덜 배출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그렇다면 소비자에게는 버리지 말 의무가 아니라 ‘고쳐 쓸 권리’가 중요해진다. ‘수리권’이다.

이를 보장하려면 제품 설계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접착제는 적게 쓰고, 분해하기 쉬운 구조로 만들어야 한다. 미국에서는 50개 주 가운데 46개 주에서 수리권 관련 법안이 발의되어 있다. 유럽의회는 2023년 11월 수리권 보장 법안에 합의했다. 그래서 미국과 유럽에선 아이폰을 소비자가 직접 수리해 사용할 수 있다. 한국에선 아직 제대로 된 논의도 시작되지 않았다. 2020년 기준, 한국인은 세계 평균의 2배에 달하는 15.8kg의 전자폐기물을 매년 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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