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3화

연금, 원자력 폐기물, 그리고 안경

재즈와 연금의 상관관계

 
고틀란드 항구에서 300미터쯤 걸었을까. 더 이상 앞으로 걸어가기 힘들 정도로 인파가 북적인다. 옆길에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풍겨 나오는 진한 에스프레소 냄새와 갓 구운 빵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항구 크루즈 선착장 길을 따라 설치된 텐트 전시장들이 보인다. 어디선가 흥겨운 재즈 음악이 들려와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잠깐 들어와 보고 가세요.”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 세 분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한다. 30명 정도가 꽉 들어찬 텐트 안에는 각종 자료, 기관 신문, 기념 배지, 볼펜, 로고가 새겨진 컵과 소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기념품은 무료라는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손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다. 팸플릿에 쓰인 문구를 보니 연금 퇴직자 협회(PRO)였다.

55세부터 회원이 될 수 있는 이 단체는 회원들을 위한 창업 및 교양 강좌를 열고, 단체 여행 등을 기획하는 이익 단체다. 평생 동안 일을 하고 낸 세금으로 받는 연금에 일반 봉급생활자보다 높은 세금이 부과되는 것을 부당하다고 보고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어깨띠를 두르고 있는 한 분이 질문을 받아 열심히 설명해 준다.

“저는 평생 교사로 일했어요. 지금 67세인데 세전 1만 9000크로나(약 230만 원)를 매달 받고 있어요. 세금을 공제하고 나면 1만 5200크로나(약 185만 원)밖에 남지 않아요. 일반 봉급자들이 봉급 공제 수당 등을 받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연금생활자들은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고 있는 셈이죠. 우리 연금으로 일반 봉급생활자의 공제분을 보태 주고 있는 셈이에요. 노인 빈곤율이 높아지고 있는 원인 중의 하나입니다.”

옆에 서 계신 분이 거든다.

“저는 30대 때부터 간호사로 근무했어요. 20대에는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대학에 다녔고요. 20대에 대학에 다니면서 빌린 교육 융자금으로 생활비, 기숙사 비용, 교재 구입비 등을 충당했어요. 저금리였기 때문에 거의 원금만 상환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부담이 컸어요. 중간에 아파서 일을 하지 못하는 기간에는 실업 기금을 받았고, 아플 때는 질병 수당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연금을 받아 생활하고 있으니 스웨덴의 거의 모든 복지 혜택을 받아 본 셈이에요. 하지만 제가 일할 때 봉급의 30퍼센트 이상을 국가에 세금으로 지불했으니까 지금 다시 돌려받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스웨덴에서는 고령자들이 나이가 들수록 활동량과 씀씀이가 줄어든다는 통계를 바탕으로 연금 책정도 나이와 연동해서 축소하는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그러나 고령 연금생활자들은 이 같은 제도 운용 방식이 노인의 생활을 갈수록 어려워지게 만든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그래도 지금 삶에 만족하고 계신가요?”

경청하던 일행 중 한 사람이 질문을 했다. “소박하지만 만족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1년에 한 번씩 여행도 하고, 헬스클럽에서 운동도 하고, 그림도 배운다고 한다. 모두 안정적으로 지급되는 연금이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연금에 부과되는 과중한 세금을 비판하면서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있는 단체지만, 정부가 잘하고 있는 것, 좋은 정책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칭찬한다. 우리였다면 연금 제도의 장점을 이야기하려는 회원의 발언 기회를 빼앗아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스웨덴의 연금 퇴직자 연합은 연금 제도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선되어야 할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익 단체이기는 하지만 우리만 잘살기 위해 활동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태어나서 생을 마칠 때까지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을 위해서도 지원을 해주고 있습니다. 장애인, 소수자의 행복을 위해 공동 활동도 전개하고 있어요.”

질문이 계속해서 쏟아진다. 참석자들은 30여 명의 연금 퇴직자 협회 관계자들을 에워싸고 이야기를 듣는다. 즉석에서 작은 토론회가 열리고 치열한 논쟁도, 따뜻한 대화도 자연스럽게 오간다.

한쪽 구석에는 커피와 음료,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쿠키와 빵이 놓여 있다. 관심을 보이니 관계자가 다가와 직접 커피 한 잔을 따라 주면서 말을 건다.

“빵과 쿠키는 오늘 새벽 제가 구웠어요. 맛있게 드세요.”

배경 음악으로 잔잔한 재즈가 들려온다. 아침 햇살이 스며드는 텐트 세미나장은 카페 같기도, 춤을 출 수 있는 클럽 같기도 한 묘한 분위기다. 커피를 마시며 재즈 음악과 함께 들려오는 스웨덴 연금 문제에 대한 토론. 낯설지만 신선하다. 나의 삶이 중요하듯, 남의 삶도 중요하다는 것. 커피를 마시고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친구를 사귀는 것이 연금 문제에 대한 논의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 우연히 들어간 작은 텐트에서의 경험은 일상과 정치가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알메달렌의 원자력 폐기물 운반선


알메달렌에는 정당 관계자들과 시민들의 목소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기업들도 전시장을 열고 회사의 기술이나 상품을 홍보한다. 나는 굳이 알메달렌까지 와서 기업 홍보 전시장을 찾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원자력 폐기물 운반선을 전시하는 기업 SKB가 전시장을 열었다는 얘기에 귀가 번쩍 뜨였다. 지인을 통해 연락하니 나와 동행한 한국인 방문객을 위한 시간을 예약해 주었다.

원자력 폐기물 운반선이 정박한 항구를 찾았다. 우리를 맞은 사장과 직원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핵 운반 시설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어 전시장에 설치된 그림 패널을 보면서 원자력 폐기물이 어떻게 운반되고 저장되는지 설명해 주었다.

스웨덴에는 14기의 원자력 발전소가 있다. 원자력 폐기물은 계속해서 쌓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스웨덴 정부는 어떻게 하면 방사성 물질의 유출 없이 원자력 폐기물을 보관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원자력 폐기물 전문 기업 SKB와 폐기물 보관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운송 방법이 문제였다.

원자력 폐기물을 지상에서 자동차로 옮기다 충돌 사고가 나면 방사능 물질이 노출되어 도로 인근의 주민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피해를 줄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해상 운반이다. 냉각수 확보를 위해 바닷가에 지어지는 원자력 발전소의 특성을 활용해 바다를 따라 폐기물 저장 시설까지 운반하는 방식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이 스웨덴 정부의 판단이다. 1988년부터 원자력 폐기물 해상 운반 기술을 개발해 온 SKB가 폐기물 운반을 맡게 되었다.

폐기물 저장 시설은 암반이 튼튼하고 지하수가 없으며, 주민 거주 지역과 1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지역의 지하 2000~4만 미터 지점에 구멍을 뚫어 폐기물 유출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건설된다.

원자력 폐기물 저장 시설이 건설된 지역에서 주민 반대가 없었는지 궁금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혐오 시설, 오염 시설이 들어오면 주민들과 환경 운동가들이 반대 시위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스웨덴의 해결책은 이렇다. 폐기물 담당 부처 대표, 폐기물 운반선을 설계한 SKB 핵심 엔지니어, 후보 지역 기초의원, 시민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공청회를 열었다. 정부는 국내외 원자력 전문가들에게 조사를 의뢰해 신빙성 있는 안전 진단 결과를 내놨다. 고용 창출, 지역 발전 효과에 대해 분석하고, 정부 예산으로 특별 지역 발전 기금도 출연했다.

사장은 “원자력 폐기물을 육상이 아닌 해상 경로로 운반해서 곧바로 지하 깊숙이 보관하기 때문에 주민들의 생활에 지장을 주거나 미관을 해치지 않는다고 집중적으로 홍보했다”고 덧붙였다.

주민들이 가장 걱정하는 안전 문제에 대해 투명하게 공개하고, 도시 미관을 전혀 해치지 않는 지하 매장 방식으로 피해를 최소화했다. 게다가 도시 발전 기금이라는 큰 규모의 자금이 지원된다고 하니 최종 후보지 두 곳의 주민들이 반대는커녕 어떻게 하면 유치할 수 있겠는지 문의하더라는 것이다. 지역 협의체와 시장은 정부를 상대로 로비까지 벌였다고 한다.

안정성과 접근성, 지질 특성 등을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전문가의 과학적 조사를 바탕으로 경제성 등을 공정하게 심사한 결과, 외스트함마르(Östhammar)시가 최종 낙점됐다. 정부의 결정 이후, 선택된 지역과 탈락한 지역의 주민들 중 어느 한쪽도 반대하거나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미 채택된 지역의 주민들은 주민 투표에서 절대적 찬성을 얻은 상태였고, 탈락한 지역 주민들은 객관적 자료에 근거한 판단이었기 때문에 정부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설명을 듣던 중 일행 한 분이 질문을 던졌다. 해상에서 운반선이 침몰하면 바다 생태계와 연안 주민들의 안전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나 역시 배가 난파하기라도 하면 방사성 물질이 유출될 위험이 우려됐다. 바다가 완전히 오염되는 사태는 더 큰 피해를 초래할 수도 있다.

답변은 이렇다. 운반선은 침몰하더라도 폐기물이 유출되지 않도록 제작된다. 해저에 폐기물을 저장하는 저장고와 동일한 기준으로 배를 제작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충돌 사고를 막기 위해 특수 항법 장치를 설치하고 비상 상황 대응 시뮬레이션도 만들어 두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원자력 발전소 안전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이미 우리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은 원자력 발전소를 완전히 없애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전문가와 주민이 투명하게 정보를 교환하면서 지속적으로 안전을 점검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정치하는 아이들

 
한 사람이 경호원의 호위를 받으며 오래된 성당 앞을 바삐 지나간다. 경호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부 고위직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자세히 보니 프레데릭 라인펠트(Fredrik Reinfeldt) 총리[1]였다. 그런데 내 앞을 스치며 지나가던 총리 일행이 마이크를 들이대며 길을 막아선 세 명의 어린이들 앞에 갑자기 멈춰 섰다.

“총리님은 어릴 때 꿈이 무엇이었나요?”

총리가 세 명의 어린이 기자단을 향해 웃으며 대답한다.

“저는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학교 연극반에 들어가 열심히 연기 공부를 하면서 학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연극 공연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연극 경험이 정치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총리의 모습을 발견한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어린이 기자단과의 즉석 기자 회견을 관람하기 시작했다. 어린이들은 질문을 이어 갔다.

“그런데 왜 정치를 하시게 되었나요?”

총리는 지역 정치인이었던 부모님을 따라 지방 의회 회의에 참석했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서 “정치인들의 진지한 토론 모습이 좋아서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때에는 학생회장에 출마하고 정당 청년회에 가입하면서 정치를 배웠고, 대학에서는 보수당 전국 학생회를 이끌었다고 덧붙였다.

다른 어린이 기자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눈이 나쁜데도 경제적인 이유로 안경을 쓰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어린이들이 생활 속에서 접한 문제점을 정치와, 정책과 연결해서 생각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어른 흉내를 내는 것도 아니고, 어른들이 기대하는 순진한 모습만 보이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고민하고 발견한 질문을 던진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에 눈 검사와 안경 구입을 지원하는 제도가 있어요. 하지만 더 정확히는 경제적 지원에 대한 판단은 도 단위의 병원에서 합니다. 어린이들의 눈 건강과 안경 지원에 대해 지역 정치인들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 기자는 “정당 대표로서 같은 당 도의원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겠느냐”며 날카로운 질문을 이어 갔다. 어린이 기자의 질문은 어린이가 어른에게 도움을 구하는 차원의 질문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당 차원의 대책을 묻는 질문이었다.

“제도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다른 정당들과도 협의해 경제적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어린이들에게 혜택을 주는 제도를 지속적으로 만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인터뷰를 마치는 어린이 기자에게 다가가 어느 단체에서 나왔는지 물었다. ‘5월의 꽃(Majblomman)’ 어린이 기자단 소속이라는 이들은 매년 어린이의 이익과 관계되는 질문을 선정해서 알메달렌 주간에 참가하는 정당 대표들에게 묻는다고 답했다. 일주일간 열리는
행사에서 모든 정당 대표를 찾아가 같은 질문을 한다.

어린이 기자단은 지나가다 만난 총리에게 불쑥 마이크를 들이댄 것이 아니었다. 미리 정당과 조율해서 인터뷰 시간을 정해 두고 정식으로 인터뷰를 신청한 것이었다.

어린이 기자단과 헤어져 광장으로 향하는 길, 골목마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자전거를 타거나 손수레를 밀고 다니며 다양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파하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보인다.

총리 스스로가 그랬던 것처럼, 어린 시절부터 사회 이슈에 눈을 뜨고 문제의식을 체화한 이 학생들 가운데 미래의 정치인, 총리감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 호수 주변을 걸었다. 눈을 감고 쏟아지는 햇빛을 즐기는 젊은 연인들, 산책로를 따라 바닷가를 향하는 노부부, 오후 7시에 열리는 정당 대표 연설을 보기 위해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청년들이 보인다.
어린이 기자단이 정치인을 인터뷰하고 있다.
[1]
프레데릭 라인펠트는 2006년부터 2014년까지 총리를 역임한 스웨덴의 정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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