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민주주의

3월 22일 - 데일리 북저널리즘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물리적 경계가 사라지면서 2세기 전 타운십이 재현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바로 대만에서 말이다.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국민의 힘은 타운십(township)에서 비롯된다. 자유를 시민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그 자유를 어떻게 누리고 활용할 수 있는지 가르쳐 준다.”

프랑스의 정치학자이자 역사가 알렉시스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은 1832년 당시 신생 국가였던 미국을 9개월간 둘러보고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지금까지 널리 읽히는 정치학, 사회학의 고전인데요, 두툼한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타운(town)의 독립성이 미국 민주주의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타운은 수천 명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입니다. 타운이 모여 카운티(county)가 되고, 카운티가 모여 주(state)를 이룹니다. 토크빌은 우리로 치면 마을 회의에 해당하는 미국의 타운미팅을 관찰하고 ‘신의 작품’이라 평했습니다.[1] 카운티 의회나 주 의회를 이끄는 엘리트들과 달리, 평범한 주민들이 공공의 일을 직접 결정하는 모습에 감명한 것입니다.

본래 민주주의란 타운십처럼 국민이 권력을 가지고 그 권력을 스스로 행사하는 제도와 사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인구와 영토가 늘면서 모든 국민이 한자리에 모여 직접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기 어려워지자, 선거를 통해 대리자를 선출하고 권력을 위임하는 대의 민주제를 채택하게 됩니다.
g0v summit 2020. 무대 가운데에서 발언하고 있는 사람이 오드리 탕 대만 디지털 장관이다. ©g0v.tw
그런데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물리적 경계가 사라지면서 2세기 전 타운십이 재현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바로 대만에서 말입니다. 3월 말 발행 예정인 북저널리즘의 책 《대만의 디지털 민주주의와 오드리 탕》을 집필한 전병근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터넷 이전에 고안된 대의제 민주주의는 수많은 사람의 의견을 직접 묻고 들을 수 없다는 현실적 한계에 따른 타협책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언제든지 모든 사람의 의견을 물어보는 것이 가능해졌다. 사실상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매일 같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의사를 표현하고 교환하고 퍼뜨린다. 광장에 모이지 않고도 인터넷을 통해 의견을 확인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드리 탕은 이런 변화를 두고 대표(representativeness)가 재현(representation)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민간 영역이 일하는 방식은 10년 전과 비교해 크게 달라졌습니다. 구글 문서와 슬랙, 노션 같은 협업 도구를 사용해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팀원들과 공유하고, 정보 격차 없이 토론하고, 의사 결정 과정을 공개합니다. 그런데 정치 영역은 여전히 타자기와 캐비닛 시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세계경제포럼(WEF)은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의 약화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는 19세기 제도에 20세기 사고방식을 가지고 21세기 시민들과 소통하려 하고 있다.”[2]
오드리 탕 대만 디지털 장관 ©Pixabay
북미나 유럽도 아닌 ‘대만’의 디지털 민주주의라니 생소하게 들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대만은 국가 지도자인 총통을 직접 선거로 선출한 지 30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 신생국인 셈인데요, 오히려 그 덕분에 디지털 민주주의에서 앞서가고 있습니다. 지켜야 할 전통이나 관행이 적으니 그만큼 파격에 가까운 시도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대만의 디지털 민주주의를 소개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오드리 탕(Audrey Tang) 디지털 장관입니다. 그는 2016년 35세의 나이로 장관에 임명됐습니다. 대만 역사상 최연소이자 첫 트랜스젠더 장관입니다. 코로나19 유행 초기에 마스크 재고 현황을 보여 주는 앱을 만들어 ‘T 방역’을 주도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3]

오드리 탕은 시빅 해커(civic hacker·공공의 문제를 해결하는 해커) 출신입니다. 공직에 입문하기 전에는 ‘거브 제로(g0v)’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정부의 공공 정보는 모두에게 공개되어 있지만, 공개를 위한 공개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렵사리 원하는 정보를 찾아내도 로우 데이터 수준이라 정보에 담긴 의미를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죠.

2012년 오드리 탕을 비롯한 시빅 해커들은 ‘그림자 정부’ 사이트를 만들어 정부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방대한 정보를 재분류하고 검색 편의를 높였습니다. 정부 공식 사이트의 도메인은 government의 약자인 gov로 표시하는데요, 알파벳 o 대신 숫자 0을 넣어 g0v를 입력하면 그림자 정부 사이트로 연결되게 했습니다.

대만 정부의 예산 정보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PDF 파일로 공개됩니다. 국가 예산을 감시하는 시민 단체나 행정학자에게는 유용할지 몰라도 일반 시민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림자 정부 사이트에서는 예산 정보를 시각화해 제공하고 부처 간 비교, 추세 등 다양한 측면을 표시합니다. 자연스럽게 시민들이 정부의 예산 계획을 모니터링하게 됩니다. 같은 데이터지만 보여 주는 방식에 따라 활용도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죠.

오드리 탕과 시빅 해커들은 민주주의를 사회적 기술로 간주한다고 전병근 저자는 말합니다. 한번 만든 다음 그대로 사용하는 정부 사이트와 달리 그림자 정부 사이트는 시민의 참여로 날마다 개선됩니다. 이게 바로 시빅 해커들이 말하는 참여 민주주의입니다.
vTaiwan에서 진행된 자전거와 킥보드 규제에 관한 토론 ©vTaiwan
시빅 해커들의 작업에 강한 인상을 받은 대만 정부는 2016년 디지털 장관직을 신설하고 오드리 탕을 영입합니다. 그때부터 오드리 탕은 대만이라는 국가 플랫폼에 민주주의를 코딩하기 시작합니다.

취임 직후 오드리 탕은 국민과 소통하는 채널인 PDIS(Public Digital Innovation Space)를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개설합니다. PDIS 웹사이트에 자신의 업무 일정과 회의록을 공개하고, 국민이 정책을 건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정부에 청원을 올리고 답변을 받을 수 있는 플랫폼 Join도 만들었죠.[4]

공공 정책을 토론하는 플랫폼인 vTaiwan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토론 방식은 이렇습니다. 먼저, 공공의 문제에 대해 크라우드소싱 방식으로 객관적 사실을 수집합니다. 그런 다음 토론 참가자들이 다른 사람의 제안에 찬반 투표를 합니다. 특이하게도 댓글 기능은 없습니다. 정보 구조를 변경해 비방이나 모욕 대신 합의점을 찾도록 유도한 것입니다.[5]

이 과정을 거쳐 가장 많은 사람의 지지를 얻은 안건은 정부 정책으로 발전됩니다. 대만 정부는 이 솔루션을 이용해 우버와 택시 협회의 갈등도 해결했는데요, 전병근 저자에 따르면 vTaiwan의 목표는 ‘만장일치’가 아니라 ‘대략적인 합의(rough consensus)’입니다. 이 개념 역시 시빅 해커 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모두가 100퍼센트 만족하지는 못하더라도 대다수가 기꺼이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의 합의”를 뜻합니다.

“이런 접근이 비현실적인 만장일치를 무한정 기다리는 것보다 모두에게 훨씬 이득이며 건설적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또한 모든 정책은 완전무결이 아니라 잠정적인 최선일 뿐이며 실행해 가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문제점이 발견될 수 있고 다시 고쳐 가면 된다는 생각과도 통한다.”

앱을 수시로 업데이트하듯 정책도 업데이트가 필요한 기술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인데요, 그야말로 ‘디지털’ 민주주의답습니다.
2019년 12월 대만 타이난에서 열린 g0v 해커톤(hackathon). 해커톤은 해킹과 마라톤의 합성어다. 한정된 시간 내에 기획자, 개발자, 디자이너 등이 팀을 이뤄 앱과 같은 새로운 서비스를 내놓는 행사를 말한다. ©g0v.tw
오늘 소개해 드린 《대만의 디지털 민주주의와 오드리 탕》에는 오드리 탕의 사상과 철학, 대만의 디지털 민주주의 사례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당장에라도 국내 정치, 사회 문제 해결에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저자는 디지털 기술의 설계 목적을 먼저 따져 봐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퓨리서치센터가 디지털 시대의 민주주의를 전망하기 위해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기술 전문가들의 49퍼센트는 디지털 기술의 파괴적 혁신이 2030년까지 민주주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답했다. 이유는 무엇보다 지금의 디지털 기술이 기업들에 의해 영리 추구와 이를 위한 규모 확장을 최우선으로 설계되고 그 방향으로 줄곧 운영되어 왔기 때문이다. 시카고 일리노이대학의 지지 파파차리시(Zizi Papacharissi) 커뮤니케이션·정치학 교수는 ‘우리가 만든 기술은 민주주의를 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설계되었다’라면서 ‘대부분 기술은 강한 자본주의 모델을 지원하는 메커니즘을 통해 설계되고 실행되고 구동되었기 때문에 현대 사회와 양립하기 위해서는 업데이트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의 오퍼레이팅 시스템입니다. 지금 이 시스템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복지, 테크, 환경, 다양성 등 다양한 소프트웨어들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나요? 업데이트가 필요하진 않을지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3월 22일 데일리 북저널리즘을 마칩니다. 오늘 주제를 읽고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댓글로 의견 보내 주세요.
 
[1]
백완기,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생애와 사상〉, 《행정논총》, 2015.
[2]
세계경제포럼, 《2015년 글로벌 아젠다 전망》,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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