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쟁의 40년 역사

4월 21일 - 데일리 북저널리즘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40년 전 중동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가 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한다. 사진은 2014년 아프간 칸다하르 인근 사막에서 훈련 중인 미군 모습 ©Scott Olson /Getty Images

20년 만의 철군


“나는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을 지휘한 네 번째 미국 대통령으로, 이 책임을 다섯 번째 대통령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4일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의 완전 철군을 발표했습니다. 올해 9월 11일까지 단계적으로 철수한다는 계획입니다. 9·11 테러 발생 후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선언한 지 꼭 20년 만입니다.

미국 역사상 최장 전쟁인 아프간 전쟁은 어떻게 시작됐을까요? 많은 사람이 전쟁 발발 원인으로 2001년에 일어난 9·11 테러를 꼽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아프가니스탄과 미국, 두 나라만의 이해관계 충돌로 맥락을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 데일리 북저널리즘에서는 아프간 전쟁의 시작과 끝, 중동 분쟁의 뿌리와 역사적 맥락을 살펴봅니다.
 

시아파 맹주 이란과 수니파 맹주 사우디


아프간 전쟁사를 다루기 전에 중동과 아랍의 정의, 종파를 먼저 이해하시면 중동 갈등의 뼈대가 보입니다. 중동과 아랍은 다릅니다. 중동은 영토에 기초해 이집트부터 아라비아반도, 이란까지를 지칭하는 말이고, 아랍은 아랍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을 뜻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대표적인 아랍 국가입니다. 이란은 중동 국가지만, 페르시아어를 쓰고 있어 아랍 국가에는 속하지 않습니다.

중동의 대표적인 종교는 이슬람교입니다. 이슬람교는 크게 두 종파로 나뉘는데요, 수니파와 시아파입니다. 둘은 뿌리가 같지만, 1000년 넘게 적대 관계를 이어 왔습니다. 수니파의 맹주 국가는 사우디, 시아파의 맹주 국가는 이란입니다. 종파도 언어도 민족도 다른 두 나라는 중동 지역의 패권을 두고 맞서고 있습니다.
이슬람 혁명 당시 테헤란 칼리지 브릿지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 ©wikipedia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


두 나라는 통치 시스템도 다릅니다. 이란은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사우디와 같은 왕정 국가였지만, 빈부 격차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파업과 반(反)국왕 시위를 펼쳐 당시 국왕이던 팔라비를 쫓아냈습니다. 이후 시아파의 종교 지도자 호메이니가 1979년 정권을 잡고 이슬람 공화국을 세우는데요, 이를 이슬람 혁명이라고 합니다.

당시 호메이니는 자신이 그저 시아파와 이란의 지도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를 믿는 전체 무슬림의 지도자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사우디 등 왕정을 유지하던 수니파 중동 국가들은 이슬람 혁명이 자국에 옮겨붙을 것을 우려해 이란을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1980~1988년 이란 이라크 전쟁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나라가 이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라크입니다. 이슬람 혁명이 일어난 1979년, 이라크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담 후세인은 이듬해 호메이니가 이끈 혁명을 무너뜨리고 유전을 장악하기 위해 이란 침공을 감행합니다. 바로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이어진 이란-이라크 전쟁입니다.

당시 이란을 경계하던 사우디 등 걸프만 연안국들은 재정적으로 이라크를 지원했습니다. 이때 미국도 이라크를 지원했는데요, 이슬람 혁명 이전의 이란 왕조가 친미 정권이었기 때문입니다. 호메이니가 대규모 민병대를 조직해 반격에 나서면서 이라크의 낙승 예상은 빗나갑니다. 결국 이란-이라크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끝납니다.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걸프전


이라크를 지원했던 걸프만 연안국들은 전쟁이 끝난 뒤 이라크의 전후 복구를 돕지 않았습니다. 재원 마련에 어려움을 겪던 이라크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1990년 또 다시 외부로 눈을 돌립니다. 이번 타깃은 쿠웨이트였습니다. 쿠웨이트가 자국 영해에서 원유를 채굴해 수익을 독식하고, 이것이 이라크 경제를 위협한다는 게 명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쿠웨이트는 친미 왕정 국가였습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미국은 이라크에 철수를 요구했고, 이라크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에 미국은 1991년 1월 다국적군을 앞세워 이라크를 폭격합니다. 이렇게 걸프 전쟁이 시작됩니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한 달여 만에 전쟁에서 대패한 이라크는 ‘중동의 강호’ 타이틀을 잃고 후진국으로 전락합니다.
 

사우디, 미군, 알카에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당시, 이라크군은 사우디 국경 근처까지 진격했습니다. 이때 위기감을 느낀 사우디는 걸프전 이후 이라크에 위협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5000여 명의 미군 주둔을 허용합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정당하게 중동에서 힘을 과시할 명분을 얻었고, 사우디로서는 이라크와 또 다른 적 이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확실한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우디의 미군 주둔 결정은 중동의 정치 불안을 키우게 됩니다. 신성한 이슬람 성지에 이교도 군대가 주둔하는 데 비판과 분노의 목소리가 거세진 겁니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그 유명한 오사마 빈라덴입니다. 사우디 출신 빈라덴이 만든 무장 세력 알카에다는 미군 주둔을 계기로 극단적인 반미 조직으로 바뀝니다.
항공기 추돌로 화염에 휩싸인 세계무역센터 빌딩 ©wikimedia

2001년 9월, 그날


2001년 9월 11일, 알카에다는 결국 미국에 항공기 충돌 테러를 자행합니다. 지금도 많은 분들이 항공기와 충돌해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붕괴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실 텐데요, 미국과 세계 안보의 심장이라고 여겨졌던 미국 국방부(펜타곤) 청사까지 연달아 공격당합니다.

대규모 테러에 전 세계가 충격에 빠진 사이, 부시 전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테러의 배후로 알카에다와 이들의 수장 오사마 빈라덴을 지목합니다. 부시 행정부는 이들에게 근거지를 제공하고 있던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에게 테러리스트 신병 인도를 요청합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시작


탈레반은 알카에다 지도부가 테러를 일으켰다는 증거를 내놓기 전까지 이들을 넘겨줄 수 없다며 거부합니다. 탈레반의 지도자 무하마드 오마르와 빈라덴은 자기 아들과 딸을 결혼시킬 만큼 공고한 연대 의식, 동지 의식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계속된 요청에도 탈레반은 알카에다와 빈라덴을 내놓지 않습니다.

결국 부시 전 대통령은 2001년 10월 7일, TV 생중계 연설을 합니다. “미군이 내 명령에 따라 알카에다 훈련 캠프와 아프간 탈레반 정권의 군사 시설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바로 아프간 전쟁입니다. 미국은 수도 카불을 비롯한 아프간 주요 도시를 대규모 공습했고, 단 하루 만에 아프간의 방공망과 통신망을 소멸시켰습니다. 그리고 개전 한 달여 만인 11월 13일, 수도를 완전히 함락합니다.
 

끝나지 않는 전쟁


미국의 분노는 탈레반 정권을 빠르게 붕괴시켰지만, 이때 정작 가장 중요한 목표인 오사마 빈라덴을 잡는 데는 실패합니다. 그런데도 미국은 테러리스트 활동의 천국인 아프가니스탄 역할의 종지부를 찍었다고 선언합니다. 이미 주요 도시 및 교통망을 미군이 장악했고, 이즈음의 미국은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근거를 내세워 이라크와 전쟁(제2차 걸프전)을 치를 준비를 하는 데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살아남은 일부 탈레반 세력은 산악 지대로 은신하면서 전열을 가다듬었습니다. 전쟁의 불씨가 꺼지지 않은 겁니다. 이후 탈레반의 끈질긴 공격과 미국의 대응은 계속됩니다. 2011년 오바마 전 대통령이 미군 특수 부대를 투입해 파키스탄에 숨어 있던 빈라덴을 사살한 이후에도, 미국은 탈레반과 협상, 교전, 협상 중단, 추가 파병을 도돌이표처럼 반복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미국에서는 아프간 전쟁을 ‘끝나지 않는 전쟁(Endless War)’이라고 부릅니다.
2011년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바이든 당시 부통령이 빈라덴 사살 작전 실황을 지켜보고 있다. ©wikipedia

미군이 떠난 뒤 


바이든 대통령의 이번 철군 발표로, 20년간 지속된 전쟁은 드디어 그 끝을 향하고 있습니다. 현재 아프간에 머무는 2500명 규모의 미국 지상군과 7000명에 가까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병력이 철수할 예정입니다. CNN, 《워싱턴포스트》등 외신은 이번 철수 결정을 두고 대규모 병력과 막대한 국방비를 투입하고도, 미국이 결국 빈손으로 돌아오게 됐다고 지적합니다. 실제로 지난 20년 동안 아프간 전쟁에 들어간 미국 예산은 2조 2610억 달러(2524조 4000억 원)에 달합니다.

아프간에서 발을 뺀 미국은 이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남중국해 등지에서 군사 활동을 강화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미군이 떠난 아프간에는 평화가 찾아올까요?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탈레반과 정부군의 내전이 다시 벌어질 수 있고, 혼란을 틈타 알카에다 같은 무장 조직이 다시 기승을 부릴 우려도 있습니다. 컬럼비아대학교 스티븐 비들 교수는 미군 철수 후 ‘인도주의적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습니다.

오늘 데일리 북저널리즘에서는 40여 년 전 이슬람 혁명에서부터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전을 거쳐 9·11 테러, 아프간 전쟁에 이르기까지의 맥락을 살펴봤습니다. 오늘 주제를 읽고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댓글로 의견 보내 주세요.

* 복잡하고 어려운 중동 정세를 더 쉽게 이해하고 싶다면 북저널리즘 콘텐츠 《중동 라이벌리즘》을 읽어 보시길 추천합니다. 여러 가지 중동 이슈, 특히 복잡한 갈등 관계를 국가 간 경쟁 관계를 바탕으로 설명해 맥락과 배경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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