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이거나 정치인이거나

4월 23일 - 데일리 북저널리즘

정치적 행동에 나서는 CEO들이 늘고 있다. CEO 행동주의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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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는 자본주의


앞으로 미국 조지아주에서는 투표를 하러 줄을 선 유권자에게 물을 줄 수 없습니다. 우편으로 부재자 투표를 할 때도 신분증 사본을 제출해야 하고, 부재자 투표 신청 기간도 줄어듭니다. 공화당이 장악한 조지아주 의회가 지난달 25일 통과시킨 투표법 때문입니다. 다른 주들에서도 공화당 주도로 비슷한 입법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우편 투표 사기 행위로 선거에서 졌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미국 남부 조지아주는 전통적으로 공화당 강세 지역이지만, 지난 대선에서는 28년 만에 민주당이 이겼습니다. 이런 까닭에 민주당은 이 법의 의도를 의심하는데요, 민주당 지지도가 높은 흑인의 투표를 어렵게 만드는 ‘투표권 제한법’이라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도 조지아주의 투표법을 “21세기의 짐 크로(Jim Crow)법”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짐 크로법은 1965년에 폐지된 인종 분리법입니다. 새 투표법이 투표권을 제한할 우려는 있지만, 민주당이 입법을 저지할 방법은 딱히 없습니다. 미국 50개 주에서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한 주는 18개에 불과합니다. 민주당 소속 주지사도 23명으로 공화당보다 적습니다.

민주주의 위기의 순간에 나타난 것은 CEO들이었습니다. 지난 14일 애플, 구글, GM, 골드만삭스, 스타벅스 등 100여 개 미국 기업은 《뉴욕타임스》에 광고를 내고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들은 “투표권을 제한하는 모든 차별적인 법안에 반대한다”고 밝혔습니다. 버크셔 해서웨이의 워런 버핏 회장도 개인 자격으로 성명에 참여했습니다.
 

CEO 행동주의


트럼프 대통령 재임 시절부터 미국에서는 정치,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CEO들이 늘어나고 있는데요, 이런 흐름을 ‘CEO 행동주의(CEO activism)’라고 합니다. 물론 과거에도 워싱턴의 일에 관여하는 CEO들이 있었습니다. 자사에 유리한 법안이나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이익 단체를 결성하고, 로비스트를 고용하고, 정치인을 후원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CEO 행동주의에서 말하는 CEO의 정치 참여는 과거와는 양상이 다릅니다. 이제 CEO들은 비즈니스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문제에도 의견을 피력합니다. 트럼프가 파리 기후 변화 협약에서 탈퇴했을 때, 무슬림 국가 출신자의 미국 방문을 금지했을 때, 많은 CEO들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밝히며 정부를 비판했습니다.

1976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밀턴 프리드먼은 주주 가치 극대화를 경영의 중심에 두는 ‘주주 자본주의’를 주창했습니다. 자유 시장 경제에서는 주주 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이 소비자에게 더 나은 제품, 노동자에게 더 나은 여건을 제공해 결국 사회를 이롭게 한다는 주장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 기업들은 이 원칙을 충실히 지켰습니다.

그런데 2019년 8월, 한국의 전경련에 해당하는 미국 기업들의 이익 단체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Business Roundtable)이 기업의 목적을 재정의하는 선언서를 발표합니다. 오늘날 기업의 목적은 주주의 이익뿐만 아니라 고객과 직원, 공급업체, 지역 사회 등 모든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배려하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이 선언에 181명의 대기업 CEO가 이름을 올립니다. 이때부터 CEO 행동주의가 본격화합니다.
 

고귀하거나 위험하거나


조지아주 투표법을 비판하는 CEO들의 속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의 발언은 일견 용기 있어 보입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여론을 움직여 입법자들이 따라오게 만들고, 사회 변화를 앞당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CEO들이 여론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여론에 밀려 움직이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조지아주 법안에 기업들이 신속하게 입장을 표명하는 이유가 “불매 운동의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SNS 시대에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비겁함의 표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조지아주 투표법에 반대 입장을 표명한 기업들을 살펴보면 스타벅스나 코카콜라 같은 소비재 회사들이 두드러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CEO들의 정치 참여가 과연 바람직한 행동일까요. 최근 《이코노미스트》는 CEO들의 정치적 발언이 갖고 있는 목표는 선할지 몰라도, 결국 비즈니스의 역할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위험은 과소평가되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무엇보다 ‘개념 기업’의 도덕적 행위가 위선일 수 있습니다. 지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노스페이스는 텍사스 석유 회사에서 재킷 400벌을 주문받았지만, 옷을 팔지 않았습니다. 기후 위기를 일으키는 회사와 엮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콜로라도의 한 석유 회사가 조롱의 의미로 ‘특별한 고객 상’을 노스페이스에 수여했습니다. 노스페이스가 팔지 않겠다던 재킷이 석유 제품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미국 시민은 CEO에게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에 기업을 개입시키는 것은 선출되지 않은 사람에게 권한을 부여해 정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코노미스트》는 어떤 경우에도 기업이 정부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기본권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사장실이 아니라 정치 절차와 법원을 통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고객, 직원, 주주가 요구하니까


CEO들의 얘기도 들어 봐야 합니다. 상당수 CEO들은 정치적 발언을 좋아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고객과 직원, 주주가 요구하기 때문에 사회적 문제 해결에 나서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 또한 사실과 다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 고객은 지지의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한 제품보다 CEO의 발언에 항의하기 위해 사용을 중단한 제품을 기억할 가능성이 더 큽니다. 월마트는 2019년에 한 매장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한 이후, 일부 총기 탄약의 판매를 금지했습니다. 후속 연구에 따르면 총기 자유를 지지하는 공화당 강세 지역의 월마트 매장은 민주당 강세 지역의 매장보다 고객 수가 더 큰 폭으로 감소했습니다.

직원에게 미치는 영향도 그리 결정적이지 않습니다. 많은 회사들이 진보 성향을 드러내면, 스마트한 밀레니얼 직원을 채용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수 성향의 컨설팅 회사인 링컨 네트워크(Lincoln Network)의 연구에 따르면 정치적 어젠다를 장려하는 기업이 오히려 억압적인 내부 단일 문화를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주주 문제가 있습니다. CEO는 정치적 발언을 하기 전에 주주들과 상의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하버드대 로스쿨의 루시안 벱척(Lucian Bebchuk) 교수는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의 이해관계자 선언 서명자 중에서 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었던 48명 중 한 명만이 사전에 이사회와 협의했다고 밝혔습니다. 모든 이해관계자를 고려하겠다던 CEO들이 회사의 주인인 주주조차 고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데일리 북저널리즘에서는 미국의 CEO 행동주의를 살펴봤습니다. 국내 언론과 SNS에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어 오늘은 반대되는 입장을 중심으로 소개해 드렸는데요, 여러분은 CEO의 정치적 발언과 정치 참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댓글로 함께 논의해 보면 좋겠습니다.

* 오늘 데일리 북저널리즘은 이코노미스트 콘텐츠 〈CEO 행동주의〉를 바탕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새 시대의 리더를 소개합니다〉도 함께 읽으시면 더욱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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