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리그가 남긴 질문
 

4월 27일 - 데일리 북저널리즘

슈퍼 리그는 48시간 만에 좌초했지만, 축구 산업과 문화에 중요한 질문을 남겼다.

스탬포드 브릿지(Stamford Bridge)의 첼시 경기장에 팬들이 걸어 놓은 슈퍼 리그 반대 문구 ©David Cliff/Anadolu Agency via Getty Images
지난주, 약 48시간 동안 유럽을 넘어 전 세계 축구 산업을 뒤흔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EPL)와 라리가, 세리에A의 빅 클럽 12개[1]가 주도한 슈퍼 리그 출범 발표입니다. 이 계획은 구단의 지역 팬들이 시위를 벌이면서 반대하고, 영국 정부까지 나서 제재 의사를 표하면서 발표 48시간 만에 중단됐습니다. 발표 하루 만에 EPL 6개 팀이 탈퇴를 발표했고,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제외한 다른 팀들도 탈퇴 의사를 밝혀 사실상 무산됐습니다.

단순한 해프닝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사건은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산업, 더 나아가서는 로컬 콘텐츠를 글로벌 시장에 유통하는 기업들에게 꽤 큰 의미가 있습니다. 슈퍼 리그를 주도한 레알 마드리드의 플로렌티노 페레즈(Florentino Pérez) 회장은 ‘축구를 구하려면’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더 이상 축구에 열광하지 않는 젊은 세대를 끌어들이려면 변화해야 한다는 겁니다. 슈퍼 리그 사건을 통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미래와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하는 로컬 비즈니스의 딜레마를 살펴봅니다.
 

반란의 시작

4월 19일, 잉글랜드, 스페인, 이탈리아의 12개 축구 클럽이 유럽 슈퍼 리그 창설을 발표했습니다.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시티, 유벤투스 등 각국 리그에서 최상위에 있는 ‘빅 클럽’들이 새로운 리그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겁니다. 현재 유럽 최상위 축구 클럽들은 자국 리그에 참가하는 동시에 유럽축구연맹(UEFA)이 주관하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경쟁하고 챔피언스 리그의 승자는 유럽 챔피언 자리에 오르는데요, 여기에 참가하는 대신 자신들만의 리그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유럽에서 최고의 실력과 선수들, 많은 팬을 보유한 클럽끼리 리그를 만들고, 빅 클럽 간의 게임을 더 자주 열어 흥행을 꾀하는 전략입니다.

슈퍼 리그를 주도한 건 레알 마드리드의 페레즈 회장과 유벤투스의 안드레아 아넬리(Andrea Agnelli) 회장입니다. 각각 슈퍼 리그의 회장과 부회장을 맡기로 했죠. 슈퍼 리그의 아이디어 자체는 이미 2009년부터 페레즈 회장이 제안한 것이었습니다. 핵심은 인기가 높은 강팀들을 더 자주 만나게 해서 높은 수익을 내자는 겁니다.

챔피언스 리그의 경우 경기 방식상 빅 클럽끼리의 경기가 자주 벌어지지 않습니다. 1955년에 창설된 챔피언스 리그 역사상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와 독일의 바이에른 뮌헨이 맞붙은 건 11번밖에 되지 않습니다. 매년 챔피언스 리그 진출 팀이 달라지는 데다 조별 리그, 토너먼트 등에서 만나야만 이런 빅 매치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반면 인기가 높은 팀으로 별도 리그를 구성하고, 이들에게 출전권을 보장하면 꾸준히 빅 매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중계권료 수입도 높아지고요. 슈퍼 리그의 중계권은 연간 40억 유로(5조 3760억 원)로 예상됐습니다. 24억 유로였던 2018-2019 시즌 챔피언스 리그 중계권의 두 배에 가까운 금액입니다.

슈퍼 리그에는 미국의 투자 은행 JP모건이 60억 달러(6조 6720억 원)에 달하는 돈을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중계권을 넷플릭스 등 OTT에 판매한다는 구상도 나왔고요. 인기는 높지만, 상대적으로 수익성은 낮았던 유럽 스포츠에 수익성 높은 미국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하는 전략으로 풀이됩니다. 지난해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50개 스포츠 팀 중 43개는 미국 팀이었습니다. 반면 유럽 팀들은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1992~2014년 사이 유럽 1~3부 리그에서 파산한 팀은 영국 45개, 프랑스 40개, 독일 30개에 달합니다. 이런 상황에 미국식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하기로 하니, 슈퍼 리그 발표 다음 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주가는 10퍼센트, 유벤투스 주가는 19퍼센트 상승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만들고, 부자가 뺏는다

슈퍼 리그에 반대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첼시 팬들 ©Mike Hewitt/Getty Images
하지만 이 아이디어는 발표하자마자 거센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챔피언스 리그를 주관하는 UEFA는 물론 국제축구연맹(FIFA), 각국 리그가 즉각 반대를 표했고, 슈퍼 리그에 참가하는 팀과 소속 선수들의 자국 리그나 국가 대항전 참가를 금지시키겠다고 했죠. 더 큰 문제는 지역 팬들의 반발이었습니다. 빅 클럽이 슈퍼 리그에 참가하게 되면 자국 리그에선 퇴출될 가능성이 높은데, 그러면 매주 주말 경기를 보던 현지 팬들은 볼 수 있는 경기 자체도 줄어들고, 티켓을 구하기도 힘들어지겠죠. 사실상 글로벌 시장을 겨냥하는 리그인 만큼 지역 연고의 팬들은 소외되는 셈입니다.

슈퍼 리그에 반대하는 팬들은 각 클럽 경기장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항의했는데요, 이런 문구가 등장했습니다. ‘슈퍼 탐욕(Super Greed)’, ‘가난한 사람들이 만들고, 부자가 뺏는다(Created by the poor, stolen by the rich)’ 노동 계급의 스포츠로 시작한 축구를 글로벌 자본이 들어와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다는 겁니다. 현지 팬들에게 축구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일상의 일부고, 문화이기 때문에 이런 반발이 나온 거죠.

슈퍼 리그의 운영 방식이 ‘스포츠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슈퍼 리그의 운영 방식은 기존 유럽 리그의 승강제와 다른 형태입니다. 유럽 리그는 대부분 순위가 높은 팀은 상위 리그에 진출하고, 낮은 팀은 하위 리그로 강등되는 구조입니다. 아무리 역사가 깊고 인기가 높은 팀이라도, 한 시즌을 잘못 보내면 하부 리그로 내려갈 수 있는 거죠. 반면 슈퍼 리그는 15개 팀은 성적에 상관없이 계속 리그에 참가하고, 나머지 5개 팀만 성적에 따라 올라오는 방식입니다. 즉, 인기가 높은 고정 팀들은 성적과 상관없이 매년 최고의 클럽과 경쟁할 수 있습니다. 미국 스포츠의 리그 운영 방식에 가까운데요. 미국 자본을 도입해, 유럽보다는 미국 방식에 가까운 리그를 구상한 겁니다.

맨체스터 시티의 감독 펩 과르디올라(Pep Guardiola)는 이런 방식에 대해 “져도 상관없는 건 스포츠가 아니다”라고 비판했습니다. 어떤 게 스포츠 정신이냐에 관한 생각도 문화에 따라 다른 셈입니다. 유럽의 스포츠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버풀 등 지역에 기반을 둔 ‘클럽’ 중심이고, 미국의 스포츠는 기업이 만든 팀들로 구성된 리그 중심입니다. 클럽이 훨씬 역사가 깊고, 지역적이고, 팬들도 열성적입니다. 이런 문화 차이는 지역 스포츠를 글로벌 산업으로 만들기 위해 넘어야 하는 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타버스 시대의 축구

슈퍼 리그 프로젝트를 주도한 레알 마드리드의 플로렌티노 페레즈 회장 ©David S. Bustamante/Soccrates/Getty Images
페레즈 회장은 슈퍼 리그를 출범하면서 이것이 ‘축구를 구하는’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를 보면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갑니다. “사람들은 점점 축구에 흥미를 잃어 가고 있다. 16~24세 팬들은 축구에 관심이 없다. 젊은 층의 40퍼센트가 축구에 관심이 없는데, 질 낮은 경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직접 참여하고, 짧은 시간에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온라인 게임이 있는 상황에서 기존 방식의 축구로는 이들을 팬으로 끌어들이기 어렵다는 겁니다.

슈퍼 리그의 부회장이자 유벤투스의 회장 아넬리도 축구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 젊은 층을 이야기합니다. 디지털 플랫폼에서 콜 오브 듀티, 피파 게임, 포트나이트에 몰입하는 10~20대를 겨냥하기 위해 슈퍼 리그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이대로 젊은 층이 축구에 유입되지 않고 시간이 지난다면, 축구 산업 전체가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는 우려입니다. 가상 세계에서 관계를 맺고, 경쟁과 흥미로운 활동에 참여하는 세대를 끌어들이기 위해선 더 재미있고, 더 주목받는 경기가 필요하다는 논리입니다. 그 해법으로 빅 클럽들이 매번 맞붙는 슈퍼 리그를 제안한 거고요.

실제로 코로나 이후 유럽의 일부 빅 클럽들은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미 전 세계에 팬이 생겼고 중계권을 판매한 만큼 경기력에 대한 기대치는 높아졌고, 고액 연봉의 스타 선수들을 영입해 왔는데, 관객을 받지 못하게 됐으니 적자를 볼 수밖에 없었죠. 슈퍼 리그는 실질적으로 이런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안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페레즈 회장은 슈퍼 리그 무산 이후 인터뷰에서 “슈퍼 리그를 못 하면, 레알 마드리드가 킬리안 음바페나 엘링 홀란드 같은 선수들을 데려오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결국 출범은 무산됐지만, 슈퍼 리그는 축구 산업은 물론 큰 틀의 문화와 비즈니스에 화두를 던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축구라는 스포츠 자체의 지속 가능성입니다. 시대에 맞게 방식이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문제 제기입니다. 두 번째는 로컬 콘텐츠를 세계 시장에 유통할 때 마주하는 딜레마입니다. 독특함 때문에 전 세계 사람들이 사랑하는 콘텐츠가 됐지만, 현지 팬과 글로벌 팬 사이에 입장 차이가 생기고, 팬을 기반으로 하는 비즈니스 특성상 이를 마냥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죠. 앞으로 두 가지 화두를 어떻게 풀 수 있을지, 계속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슈퍼 리그의 두 번째 화두와 관련해서는 북저널리즘 콘텐츠 《갈등하는 케이, 팝》도 읽어 보시면 좋습니다. 전혀 다른 주제지만, 로컬 콘텐츠가 글로벌화되면서 생기는 문제와 해결 방식을 면밀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틀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오늘 데일리 북저널리즘을 읽으면서 하신 생각도 댓글로 남겨 주세요.
 
[1]
AC 밀란, 아스널 FC,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첼시 FC, FC 바르셀로나, FC 밀라노, 유벤투스 FC, 리버풀 FC, 맨체스터 시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레알 마드리드, 톳트넘 홋스퍼가 19일 참여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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