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제색도와 반도체, 백신이 만나면

5월 3일 - 데일리 북저널리즘

삼성가의 유산 사회 환원과 반도체 전쟁, 백신 수급 문제가 하나로 합해지며 새로운 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조선 후기의 화가 겸재 정선이 1751년에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국보 제216호다. 현재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하고 있지만, 곧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될 예정이다. ©문화재청

#1. 인왕제색도


삼성 일가가 지난달 28일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유산 처리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이 회장이 남긴 재산은 26조 원으로 추정됩니다. 유가족은 1조 원을 의료계에 기부하고, 2~3조 원 상당의 미술품은 국가에 기증하고, 상속세로 12조 원을 내겠다고 밝혔습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상속세라 5년 동안 6차례에 걸쳐 납부할 예정입니다.

이번 발표에서 특히 화제를 모은 것은 ‘이건희 컬렉션’이었습니다. 삼성 측은 이 회장이 평생 수집한 미술품 2만 3000여 점을 국가에 기증하기로 했는데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비롯해 김홍도,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의 작품이 국민 품에 안깁니다. 세계적 거장인 모네, 고갱, 피카소, 르누아르, 샤갈, 달리, 미로의 작품도 기증됩니다.

국내외 경제계와 미술계의 관심이 집중된 발표가 나오는 순간, 삼성 그룹의 총수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구치소에 있었습니다. 이 부회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씨에게 회삿돈으로 뇌물을 건넨 혐의로 지난 1월 징역 2년 6개월을 확정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입니다. 최근 급성 충수염으로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구치소로 복귀했습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월 24일 백악관에서 반도체를 들고 연설하고 있다. 이날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 공급망 재검토를 지시하는 행정 명령에 서명했다. ©Doug Mills/Pool/Getty Images

#2. 반도체


미국 백악관은 지난달 12일 ‘반도체 화상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반도체 공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글로벌 기업 19곳을 불러 모았습니다. 세계 파운드리 1위 업체인 대만 TSMC, 메모리 반도체 1위 업체인 삼성전자 등이 참석했습니다. 이날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 웨이퍼를 손에 들고 “반도체는 인프라”라고 규정했습니다.

미국과 중국은 반도체 패권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미국은 거의 모든 전자 기기에 쓰이는 반도체의 부족을 안보 위기로 인식하고, 미국 내 반도체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글로벌 반도체 회사에 미국 공장 증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편 중국은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퍼센트까지 올리겠다며 관련 산업 육성에 나서고 있습니다.

이날 백악관 회의에서 삼성도 공장 증설을 서둘러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현재 삼성은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파운드리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데요, 이곳에 170억 달러(19조 원)를 투자해 추가로 공장을 짓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투자 계획은 5월 21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한미 정상 회담에 맞춰 발표될 전망입니다.
이스라엘 여성이 코로나19 백신 2차 접종을 받고 있다. ©Amir Levy/Getty Images

#3. 백신


백악관은 지난달 26일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6000만 회분을 다른 나라에 제공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인구 3억 3000만 명인 미국은 올해에만 12억 1000만 회분의 백신을 확보했고, 추가로 13억 회분의 계약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남는 백신은 외교적으로 활용할 방침입니다. 발표 이틀 뒤 백악관은 인도에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2000만 회분을 공급하기로 했습니다.

전 세계가 백신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미국의 남는 백신은 ‘쿼드(Quad)’ 참가국에 먼저 돌아갈 것으로 보입니다. 쿼드는 미국, 일본, 호주, 인도로 이뤄진 4개국 안보 협의체인데요, 중국 견제 성격을 띱니다. 미국과 일본은 지난달 16일 정상 회담을 마친 직후 “쿼드 백신 파트너십을 통해 백신 생산과 조달에 긴밀히 협력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한편 미국의 쿼드 참여 요청에 난색을 보인 우리 정부는 미국과 ‘백신 스와프(swap)’ 체결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남는 백신을 빌려 쓴 뒤, 우리가 구매한 백신이 들어오면 백신을 갚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는 21일 우리 제안에 거부 의사를 밝히며 쿼드 참여국과는 백신 협력을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안보 협력 없이는 백신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월 18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 농단 사건 파기 환송심 선고 공판에 출석했다. ©Chung Sung-Jun/Getty Images

인왕제색도와 반도체, 백신이 만나면


지금까지 소개해 드린 인왕제색도와 반도체, 백신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가 합해지며 이재용 부회장 특별 사면론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지난달 27일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경제 5단체는 이 부회장 사면 건의서를 청와대에 전달했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주지 협의회도 사면 건의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정치권에서도 야권을 중심으로 사면론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면은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의 권한입니다. 사면은 일반 사면과 특별 사면으로 나뉘는데요, 일반 사면은 범죄의 종류를 정해 해당 범죄로 선고를 받은 모든 사람에게 형의 효력을 없애 주는 것입니다. 특별 사면은 특정인에 대한 형의 집행을 면제하는 것입니다. 일반 사면과 달리 특별 사면은 국회 동의 없이 시행할 수 있습니다.

이 부회장 특별 사면에 대해 청와대는 “현재로서는 검토 계획이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동안 청와대가 밝힌 사면의 조건은 국민 공감대와 국민 통합입니다. 이 부회장 사면을 건의하는 측은 삼성가의 유산 사회 환원으로 우호적인 국민 여론이 생기고 있고, 한국이 세계 반도체 전쟁에서 살아남는 동시에 미국과 ‘백신-반도체 빅딜’을 성사시키려면 이 부회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2011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평창이 2018년 동계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되자 참석자들이 기뻐하고 있다. 2009년 이명박 전 대통령은 동계 올림픽 유치를 위해 당시 IOC 위원이었던 이건희 회장을 사면했다. ©Jasper Juinen/Getty Images

대통령의 권한이자 대통령이 믿는 가치


대통령의 사면은 불완전한 법과 부적절한 판결을 교정하여 국민을 보호하고, 시대적 요구를 반영해 사회를 통합하는 것이 주된 목적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사면권 행사의 대상과 기준이 뚜렷하지 않아 사법 체계를 무력화하거나, 객관성과 공정성 없는 사면이 이뤄져 왔다는 비판이 제기됩니다.[1]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은 1862년 백인을 공격한 인디언 265명을 사면했고, 지미 카터 대통령은 1977년 베트남 전쟁 참전을 거부한 모든 청년을 사면했습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자신에게 고액을 후원한 억만장자를 사면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라크에서 민간인 수십 명을 살해한 경비 용역 회사 직원과 전당 대회에서 자신을 위해 연설한 마약 사범을 사면했습니다.

사면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자 대통령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지 드러나는 통치 행위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믿는 가치는 무엇일까요. 이건희 회장은 1997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2009년 삼성 비자금 사건으로 두 차례 사면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아들의 사면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댓글로 의견 보내 주세요.
 
[1]
이석민, 《사면권의 한계에 대한 헌법적 검토》, 헌법재판소,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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