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의 지식재산권

5월 12일 - 데일리 북저널리즘

코로나19 백신의 지식재산권 면제를 놓고 세계 각국의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5일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지식재산권 면제를 지지한다고 밝혔습니다. 제약사의 지재권 행사를 유예하거나 정지해 세계 각국이 복제약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도 “코로나19 같은 특별한 상황은 특별한 조치를 요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백신이 남아도는 미국과 달리 세계 각국은 백신 부족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하루 40만 명씩 확진자가 속출하는 인도를 비롯해 60여 개발도상국은 코로나19 백신의 지재권을 폐지하자는 제안서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조만간 제출할 예정입니다. 때마침 나온 미국의 지지 선언으로 이들의 움직임이 탄력을 받을 전망입니다.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연설 중인 조 바이든 대통령 ©Chris Kleponis / CNP / Bloomberg via Getty Images

미국의 복잡한 속내


그동안 미국은 백신 지재권 면제를 놓고 머뭇거렸습니다. “고려하고 있지만 결정된 것은 없다”는 입장이었는데요, 지지로 돌아선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선, 국제 사회의 강력한 요구가 미국을 움직인 요인으로 꼽힙니다. 개도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 100개 이상의 국가와 300여 국제단체, 전직 국가 정상과 노벨상 수상자 등 170여 명은 지난달 15일 바이든 대통령에게 지재권 포기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지재권의 완전한 보호와 독점은 세계의 백신 접종 노력에 부정적 영향만 미치고 미국에도 자멸적”이라는 내용이었는데요, 미국이 ‘백신 패권주의’라는 비판에 직면하자 지재권 포기를 택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내린 결정이지만 미국 정부도 속이 편치만은 않습니다. 자국 내 반대가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막대한 자본과 시간, 노력을 들여 기술을 개발한 제약사들의 반발이 특히 심한데요, 화이자는 “지재권 면제가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화이자 백신에는 전 세계 19개국으로부터 공급되는 280가지 다양한 재료와 성분이 필요한데 원재료가 부족해질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지재권이 면제되면 세계 각국 제약사들이 원재료 확보에 몰리게 되고, 백신 제조 경험이 없어 품질을 보장할 수 없는 만큼 안전과 보안에 문제가 생긴다는 주장입니다.
미국 제약사 모더나의 코로나19 백신 ©Photo by Paul Hennessy/SOPA Images/LightRocket via Getty Images

지재권은 혁신의 원동력 vs. 세계 공공재


그러나 백신 안전성 확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 결국 이익이 걸린 문제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제약사들은 특허를 보호받는 20년 동안 약품 가격을 2~3배씩 올려 받기도 하는데요, 코로나19 백신 지재권이 면제되면 수백억 달러의 이익을 놓치게 됩니다. 제약업계는 지재권 보호가 의약품을 개발하는 원동력이었는데, 이런 혁신 의지가 꺾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특허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어떤 제약사가 실패 위험을 무릅쓰고 신약 개발에 뛰어들겠냐는 주장입니다.

한편 제약사들의 백신 개발에 정부 예산이 투입됐기 때문에 백신을 공공재로 볼 수 있다는 반론도 있습니다. mRNA 백신 기술은 미국에서 핵심 미래 산업 기술로 분류되어 수십 년간 세금 지원 등을 통해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모더나는 백신 개발 비용으로 1조 700억 원의 정부 예산을 지원받았습니다. 미국 국립보건원이 만든 mRNA 핵심 특허도 사용할 수 있었고요. 화이자의 백신 역시 공동 개발사인 바이오엔테크가 전체 개발 비용 가운데 15퍼센트를 독일 정부로부터 받았고, 개발에 성공하면 2조 2000억 원어치의 백신을 사겠다는 미국 정부의 보증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지난 4월 화상으로 열린 백신 정상 회담에서 발언 중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Photo by Maja Hitij/Getty Images

EU “미국부터 백신 수출 규제 풀어야”


미국의 선언에 유럽 연합(EU)의 분위기는 험악합니다. 특히 mRNA 기술 종주국인 독일의 반대가 거셉니다. 현재 mRNA 기술로 코로나19 백신을 생산하고 있거나(화이자-바이오엔테크, 모더나), 생산이 임박한 회사(큐어백)는 전 세계에 3곳인데요, 그중 2곳(바이오엔테크, 큐어백)이 독일 회사입니다. 그래서인지 독일 정부는 백신 부족의 원인을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mRNA 백신은 특허가 있다고 어디서나 쉽게 생산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지재권 면제보다는 생산력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EU 회원국들의 입장도 비슷합니다. EU는 미국이 백신과 원료 수출 규제부터 풀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국방물자생산법을 발동해 백신 제조에 필수적인 재료의 수출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미국 내 생산에 우선 공급하기 위해서인데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백신의 공유, 수출, 제조 능력 증대 투자가 시급하다”며 미국을 압박했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미국이 백신과 재료의 수출을 막아 백신이 돌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인도주의와 정치적 노림수 사이


미국의 지재권 면제 선언이 정치적 노림수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WTO 협상이 오래 걸리거나 무산될 수도 있다며 “바이든 행정부에 외교적 승리를 가져다주는 가장 위험성 낮은 방법”이라고 지적합니다. 지재권이 면제되려면 WTO에 가입한 164개국이 모두 찬성하고 제약사의 동의도 필요해 사실상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지재권이 풀려도 문제는 남습니다. 개도국이 백신 제조에 필요한 설비와 기술, 노하우를 모두 갖추려면 최소 몇 년이 걸릴 수 있습니다. 결국 백신 특허 포기는 실질적인 손해가 크지 않으면서도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리더십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는 분석입니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코로나19 백신 접종률은 평균 0.95퍼센트입니다. 미국과 영국이 각각 45퍼센트와 51퍼센트인 것과 비교해 턱없이 낮은 수준입니다. 선진국들이 백신 지재권을 둘러싸고 힘겨루기를 벌이는 사이, 개도국들에서는 코로나19가 재확산하고 변이 바이러스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혁신의 동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세계적인 보건 위기를 조기에 극복할 수 있는 묘수는 없을까요? 오늘 주제를 읽고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댓글로 의견 남겨 주세요.

* 오늘 데일리 북저널리즘은 《백신은 세계를 구할 것인가》, 《코로나 이후의 세계》, 《누가 먼저 백신을 맞아야 할까》와 함께 읽어 보시면 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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