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는 여러 가지 방면에서 굿 아이디어다.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해 줄 것이다. 하지만 환경에는 큰 비용을 초래할 수 있다. 우리는 비트코인의 1퍼센트 이하 에너지로도 채굴과 거래가 가능한 가상화폐를 찾고 있다.” 머스크가 5월 12일에 올린 트윗의 마무리 부분입니다. 머스크는 비트코인을 공격했지만 가상화폐를 통째로 부정하진 않았습니다. 갈라치기죠. 머스크는 시장의 관심을 비트코인에서 알트코인으로 이동시킨 겁니다. 알트코인은 비트코인의 대안 코인을 통칭합니다. 자산 시장은 전형적인 관심 경제입니다. 대중적 관심이 자산의 가치를 결정하는 시장인 거죠. 호재에 과열됐다 악재에 폭락하기를 반복하는 주식 시장이 대표적입니다. 내부자들한텐 새로울 것 없는 정보도 대중적 관심을 얻으면 엄청난 호재나 악재로 받아들여지죠.
비트코인이 탄소 발자국 투성이란 건 가상화폐 전문가들한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닙니다. 특히 비트코인 채굴의 75퍼센트가 이뤄지는 중국 상황이 특히 심각하죠. 지난달 《가디언》은 《네이처》를 인용해서 비트코인 채굴 때문에 중국의 탄소 배출량 감축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중국 비트코인 채굴에 쓰이는 전력의 40퍼센트가 석탄 발전에서 나올 정도입니다. 중요한 건 머스크가 처음 테슬라의 비트코인 투자를 실행했던 올해 초에도 이미 알려진 문제였다는 사실입니다. 비트코인의 탄소 발자국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란 거죠. 비트코인을 채굴하기 위해선 특정 해시값을 얻어 내기 위해 알고리즘을 풀어내야 합니다. 막강한 컴퓨팅 파워와 막대한 전력 소비가 필요합니다. 비트코인 가격이 오르면 채굴의 시장성이 좋아지고 자연히 채굴이 활성화되고 그만큼 전력 소비도 증가할 수 밖에 없겠죠. 유가가 오르면 유전 개발의 시장성이 개선되고 그만큼 탄소 배출량도 증가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서울로 날아오는 중국발 미세 먼지를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비트코인 가격이 내려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머스크가 서울의 공기 질 개선에 기여한 셈이죠.
정작 머스크의 관심은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관심 경제의 가장 큰 재화인 대중적 관심을 자신이 원하는 알트코인으로 전환시키는 데 있습니다. 비트코인과 달리 머스크 자신이 확실히 주도하고 지배할 수 있는 코인으로 말이죠. 환경은 비트코인을 공격할 명분일 뿐입니다. 일단 머스크는 도지코인을 밀고 있습니다. 머스크는 스스로를 ‘도지 아빠(Doge Father)’라고 부릅니다. 지난 2월엔 “아들을 위해 도지코인을 샀다”는 트윗을
올렸죠.
머스크의 관심이 비트코인에서 도지코인으로 분명하게 이동하기 시작한 건 4월 중순 무렵입니다. 비트코인이 사상 최고가를 경신하던 시기였죠. 비트코인 가격이 상승하자 인플레이션 헤징 수단으로 비트코인을 매입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한 저금리와 돈 풀기는 필연적으로 법정 화폐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소비자들은 돈을 거듭해서 물건이나 자산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덕분에 기업들은 사상 최대 실적으로 기록하게 됐죠. 정작 그렇게 물건을 팔아서 벌어들인 화폐의 가치는 자꾸만 떨어지고 있죠. 한마디로 인플레이션 시대엔 물건을 돈과 바꾸는 건 손해 보는 장사인 겁니다. 그런데 비트코인은 머스크와 테슬라가 보증한 가상화폐입니다. 적당한 가치 저장 수단일 수 있는 거죠.
그런데 비트코인한텐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한정판이라는 것과 단위 코인당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점입니다. 이래선 교환의 매개로서 화폐의 기능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비트코인은 달러 인플레이션의 헤징 수단이 되는 그 순간부터 사실상 주류 화폐 체계에 편입된 셈입니다. 애당초 비트코인은 중앙은행 화폐 체계의 대안으로 설계됐습니다. 연준이 무한 발권하는 달러 체계의 허상을 비판하려는 것이었죠. 그런데 이젠 비트코인도 달러나 별다를 바 없어진 겁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도 지난 4월 27일 “G20에선 비트코인 등을 가상화폐 대신 가상자산으로 정의했다”고
밝혔죠. 비트코인이 화폐는 아니라고 선을 그으려고 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거꾸로 생각해 볼 수도 있는 발언이었죠. 이젠 우리나라의 경제 수장도 비트코인이 시장 가치를 지닌 자산은 맞다고 인정한 거죠. 비트코인은 높은 가격 탓에 디지털 금이 돼버린 겁니다. 부자들은 이제까진 금고에 현금 다발과 함께 금괴를 넣어 뒀다면, 앞으론 디지털 지갑에 현금과 비트코인도 넣어 두는 그런 세상이 돼버린 거죠.
도지코인은 비트코인이 지닌 그런 한계를 일찍부터 비판하면서 등장한 가상화폐입니다. 그렇다고 진지한 화폐는 결단코 아닙니다. 2013년 6월에 IBM 출신 개발자 빌리 마커스와
잭슨 팔머가 3시간 만에 뚝딱 만든 장난이었죠. 시바견의 밈을 로고로 사용했고 무엇보다 비트코인과 정반대로 채굴량을 무한대로 설정했습니다. 바로 이 점이 머스크의 관심을 끌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시바견이라는 로고부터가 MZ스럽게 쿨합니다. 브랜딩이 쉽단 말이죠. 가상화폐 시장은 관심 경제인 자산 시장 중에서도 가장 브랜딩이 중요합니다. 가상화폐는 가장 가치가 높다는 비트코인조차도 아직 내재 가치는 불안정합니다. 동네 슈퍼에 가서 가상화폐를 내밀면 바로 라면 한 박스를 살 수 있는 세상은 아직 아니란 거죠.
화폐는 신용이 기반입니다. 우리는 은행에 가면 디지털상으로 표시된 내 재산을 곧바로 현금화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실제론 어느 은행도 우리 모두가 지닌 자산을 곧바로 현금화시켜 줄 수 없죠. 법이 정한 최소한의 지급 준비금만 보유할 뿐입니다. 중앙은행이 인쇄한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화폐로 김밥과 라면을 살 수 있는 것도, 디지털로 표시된 은행의 재산이 안전하다고 믿는 것도 모두 신용이 지켜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러에 쓰여진 ‘In God We Trust’는 오독되고 있는 셈이죠. 우리는 신을 믿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신의 이름으로 트러스트, 즉 신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스크는 누구보다 가상화폐에서 브랜딩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브랜딩이 신용이니까요. 도지코인은 브랜딩이 쉬운 가상화폐입니다. 유망한 알트코인은 많지만 도지코인만큼 직관적인 알트코인은 많지 않습니다.
무한대의 채굴량은 정작 도지코인 개발자인 잭슨 팔머조차 비판적이었던 부분입니다. 채굴량이 무한대여서 가상 자산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얘기였죠. 그런데 그건 법정 화폐인 달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공급량을 조절할 수 있는 여지가 생깁니다. 달러처럼 말이죠. 한정된 채굴량이 비트코인을 달러보단 금의 대안으로 만들었다면, 반대로 무한 채굴량은 도지코인을 달러의 대안으로 만들 수도 있단 말입니다.
게다가 개발자들인 빌리 마커스와 잭슨 팔머는 2015년에 도지코인을 떠났습니다. 창업자들이 떠나고 자신의 자본과 명성이 절실한 스타트업은 머스크가 가장 애호하는 기업입니다. 테슬라도 유사한 경우였습니다. 좀 더 멀리 나가 보자면 머스크는 도지코인으로 가상화폐의 연준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연준 역시 한국은행과 달리 정부 기관이 아닙니다. 화폐 발행 권한을 지닌 민간 은행이죠. 어쨌든 꽉 막힌 비트코인과 달리 도지코인은 머스크한텐 혁신의 여지가 많은 가상화폐인 겁니다. 도지코인은 아무도 모르던 잡코인에서 시총 4위를 오가는 주코인으로 부상했습니다. 적어도 머스크는 시장의 관심을 비트코인에서 도지코인을 비롯한 알트코인으로 전환시키는 데는 성공한 모양새입니다.
머스크에게 비트코인은 혁신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