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한미 정상 회담의 하이라이트는 정상 회담과 이어진 공동 기자 회견만이 아니었습니다. 정상 회담 직전에 치러진 한국전 참전 용사 명예 훈장 수여식이야말로 이번 회담이 얼마나 잘 짜여진 각본 있는 드라마인지를 보여 주는 이벤트였습니다. 5월 21일 오후에 열린 한미 정상 회담 직전에 바이든 대통령은 명예 훈장 수여식을
열었습니다. 심지어 수여식 장소도 한미 정상의 공동 기자 회견이 예정된 백악관 이스트룸이었죠. 수상자는 올해 94세인 랠프 퍼켓 주니어 예비역 대령이었습니다. 퍼켓 대령은 1950년 11월 청천강 북쪽 205 고지 점령 작전을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한미 연합군이 맞서 싸운 상대는 북한군이 아니었습니다. 중공군이었죠. 바이든 대통령은 퍼켓 예비역 대령에게 훈장을 수여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미 양국 군은 3배나 많은 중공군에 맞섰다.”
베이징은 한미 정상 회담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미중 갈등은 앞으로 30년 이상 지속될 국제 외교의 상수입니다. 트럼프 정권에서 시작된 미중 무역 갈등은 단지 시작일 뿐이죠. 1990년대부터 30년 동안 지속된 G1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바이든 대통령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죠. 이번 한미 정상 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건 미국의 이런 세계사적 인식 때문입니다.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려면 한국의 협력이 절실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중국은 우리 정부가 학수고대하는 문재인 정부 임기 내 시진핑 방한을 자꾸 미루기만
하고 있죠. 이쯤되면 희망 고문 수준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 틈을 노린 셈입니다.
그런데 퍼켓 예비역 대령에 대한 미군 최고 훈장 수여식에는 문재인 대통령도
참석했습니다. 미군 최고 훈장 수여식에 다른 나라 정상이 동참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심지어 바이든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을 무대 단상에 불러올렸습니다. 언뜻 애드립 같아 보이지만 아닙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외교적 이벤트를 연출해 낸 거죠. 바이든 대통령은 퍼켓 대령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진 촬영을 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었죠. 정치는 사진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진 장면을 연출하느냐가 역사의 흐름을 바꾸죠. 바이든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을 자국 군인 앞에 무릎을 꿇렸습니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약간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서 퍼킷 대령의 무릎 위에 손을 얹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었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있는 자세인데 대신 고령의 예비역 대령에겐 예우를 갖추고 있죠. 어쩌면 이 사진 한 장이 이번 한미 정상 회담의 전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재인, 한반도의 운전대를 다시 잡다
백악관 웨스트윙 오벌오피스에서 이뤄진 한미 정상 간 단독 회담은 37분 남짓이었습니다. 중간에 점심 식사도 함께 했으니까 사실상 런치 미팅이었던 셈입니다. 바꿔 말하면 오후 이스트룸에서 있을 한미 공동 기자 회견의 내용은 이미 정리가 끝난 상태였단 뜻입니다. 밥알 튀기면서 토론할 만큼 첨여한 이견도 별로 없었단 뜻이고요. 청와대가 한미 정상 단독 회담에 관해 배포한 보도 자료는 점심 메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메릴랜드 크랩 케이크를 함께 먹었다는 내용이었죠. 메릴랜드 크랩 케이크는 꽃게살을 이용한 일종의 어묵입니다. 어쨌든 양 정상이 함께 마스크를 벗은 채 가까이 앉아서 점심을 먹는 장면은 일본 스가 요시히데 총리와의 오찬 장면과 대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과 스가 총리는 멀찍이 떨어져 앉아서 20분 동안 햄버거를 함께 먹었습니다. 사실 미국 측은 코로나를 우려해서 스가 총리와의 오찬을 취소하려고 했었습니다. 일본 측의 요구에 따라 오찬 자리가 만들어진 거죠. 스가 총리로선 햄버거 대접을 받아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실제로 스가 총리는 햄버거에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이어진
한미 정상 공동 기자 회견에선 외교의 달인들인 두 정상의 화려한 플레이가 돋보였습니다. 한마디로 줄건 주고 받을 건 받았죠. 일단 문재인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으로부터 “2018년 판문점 선언과 싱가포르 공동 성명 등 기존의 남북 간, 북미 간 약속에 기초한 외교와 대화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정착을 이루는 데 필수적이라는 공동의 믿음을 재확인했다”는 발언을 얻어 냈습니다. 판문점 선언과 싱가포르 공동 성명은 모두 트럼프 대통령의 업적입니다. 바이든 역시 ‘Anything but Trump’일 수도 있었습니다. 바이든은 부시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클린턴과 김대중 그리고 부시의 실패에서 배운 거죠. 판문점 선언엔 남북한 철도 연결이나 DMZ 평화지대 전환 같은 실질적인 남북한 협력 방안이 담겨 있습니다. 싱가포르 공동 성명은 장차 북미 수교의 교두보가 될 수 있습니다. 모두 문재인 정부 대북 외교의 성과죠. 문재인 대통령은 이걸 지켜 내는 데 성공한 겁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김대중 대통령 이후로는 처음으로 한반도의 운전대를 잡은 지도자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 국내 정치의 변화 탓에 운전대를 놓쳤었죠.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내내 운전대를 다시 잡아 보려고 사력을 다했습니다. 부시 대통령과의 관계만 악화됐죠. 트럼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한테 운전대를 내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단지 오바마가 못한 걸 자신은 해냈다는 걸 과시할 수 있는 화려한 외교쇼를 원했죠. 문재인 대통령은 그런 트럼프의 야망을 지렛대 삼아서 평양 정상 회담과 싱가포르 정상 회담을 성사시키는 수완을 발휘합니다. 정작 한반도의 운전석에 제대로 앉았다고 볼 수는 없었죠. 운전대는 여전히 트럼프가 잡고 있었고 조수석에서 길잡이 역할만 해달라는 셈이었으니까요. 이번엔 다릅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한반도의 운전대를 문재인 대통령한테 맡긴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조건은 있습니다. 비핵화에 관해 북한의 실질적인 양보를 이끌어 내는 것이죠. 결국 앞으로 서울-평양 간 대화 채널이 얼마나 제대로 가동되느냐가 관건입니다.
대신 내줄 건 내줬습니다. 공동 성명에는 “한미는 쿼드 등 개방적이고, 투명하며, 포용적인 지역 다자주의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남중국해 등에서 평화와 안정, 합법적이고 방해받지 않는 상업, 항행, 상공 비행의 자유를 포함한 국제법 존중을 유지하기로 약속했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쿼드, 남중국해, 대만는 모두가 미국 측이 원하는 키워드들이었습니다. 한미 미사일 지침 철회에서도 드러났지만 미국은 한국을 대중 전선의 최전선으로 지목했습니다. 1950년 1월 에치슨 라인의 실수에서 배운 거죠. 바이든은 존 맥케인 사후 미국 조야에서 유일무이한 외교 전문가로 꼽힙니다. 심지어 지금은 대통령이죠. 한국을 포기하면 중국의 동진을 막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라는 겁니다. 한국에 원하는 걸 다 들어주더라도 한국을 대중 전선 쪽으로 한 발자국 끌어들이는 게 이번 한미 정상 회담에서 미국의 최우선 목표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Good Lu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