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호신임(客戶信任)

5월 26일 - 데일리 북저널리즘

TSMC는 어떻게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이 될 수 있었나?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 대만 반도체 회사인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의 모토입니다. TSMC는 대표적인 반도체 위탁 생산업체로, 고객사가 TSMC를 믿고 거래할 수 있도록 반도체만 생산합니다. 예를 들어 애플이 생산하는 스마트폰이나 소니가 만드는 게임기 등을 만들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고객사들은 자신의 전략이나 비밀 노출을 걱정하지 않고 TSMC에 반도체 생산을 맡길 수 있습니다. ‘객호신임(客戶信任)’이라는 말로도 표현됩니다.

TSMC는 왜 이런 전략적 선택을 하게 된 것일까요? 35년 전 설립 당시 TSMC는 D램 메모리 반도체를 만들었습니다. 도시바나 IBM 등이 시장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던 때라 TSMC만의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위탁 생산, 즉 파운드리(foundry)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게 된 것이죠. 반도체를 설계만 하는 팹리스(fabless) 기업의 출현과 맞물리며 함께 도약할 수 있었습니다.
 

‘반도체의 대부’ 모리스 창의 선견지명

UDN 포럼에서 연설 중인 TSMC 창립자 모리스 창 ©I-Hwa Cheng/Bloomberg via Getty Images
창업자인 모리스 창(Morris Chang·張忠謀)의 선견지명과 경영 방식은 TSMC를 성장시킨 중요한 요인입니다. 창 전 회장은 젊은 시절 미국에서 유학 후, 현지 반도체 업체에서 근무하며 사업 총괄 책임자를 역임하는 등 관련 경험을 두루 쌓았습니다. 그러다 1985년 대만 산업기술연구원장으로 발탁됐고, 2년 뒤엔 정부로부터 반도체 기업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아 TSMC를 설립하게 됩니다. 창 전 회장은 파운드리라는 전례 없는 사업 모델을 개발해 TSMC의 입지를 다져 나갔습니다.

창 전 회장은 2005년 은퇴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발생해 TSMC가 어려움에 처하자 77세의 나이로 다시 경영 일선에 복귀합니다. 대부분 기업은 위기가 계속될 것으로 예측해 투자를 줄였지만, 창 전 회장은 오히려 투자를 늘렸습니다. 반도체 산업에서는 수요가 회복되리라 예상한 것입니다.

2012년 TSMC는 아이폰6용 반도체 계약을 따내면서 전기를 맞습니다. 애플이 반도체 위탁 생산업체로 TSMC를 택한 이유도 바로 객호신임에 있습니다. 창 전 회장은 회사 방문객이 회의실에 들어올 때도 노트북의 USB 포트를 봉인하게 할 만큼 영업 비밀 보호를 최우선했습니다. 비밀주의로 잘 알려진 애플이 좋아할 수밖에 없었죠.

2년 뒤 출시된 아이폰6는 전 세계에 2억 2000만 대가 팔립니다. 여기에 들어간 반도체를 생산한 TSMC는 이때부터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이 됩니다. 현재 스마트폰과 PC, 가전, 자동차 등 일상생활에서 편리함을 주는 하드웨어와 클라우드 컴퓨터 서버에는 대부분 TSMC가 제조한 비메모리 반도체가 들어가 있습니다.
 

TSMC vs. 삼성

TSMC에서 만든 실리콘 웨이퍼 ©Maurice Tsai/Bloomberg via Getty Images
삼성전자도 반도체 업계 강자입니다. 특히 메모리 반도체 분야는 ‘세계 일류’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메모리 반도체는 소품종 대량 생산이 가능해 반도체 설계와 생산을 모두 하고 있습니다. 반면 TSMC는 시스템 반도체라고도 불리는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파운드리 최강자입니다. 비메모리 반도체는 종류가 다양하고 회로가 복잡해 설계와 제조를 여러 회사가 나눠서 합니다. TSMC는 이 중 제조를 맡고 있습니다.

메모리 반도체보다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규모가 3배 정도 큽니다. 그런 만큼 삼성전자도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요,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해 향후 10년 동안 133조 원을 투자해 비메모리 사업을 확충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갈 길은 조금 멀어 보입니다. 지난해 기준으로 삼성전자의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4퍼센트인 것으로 조사됐는데요, TSMC가 13퍼센트를 차지하는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리스 창 전 회장은 “삼성전자는 TSMC의 강력한 경쟁자로 대결이 불가피하다”라고 언급했습니다. 시장 장악력이나 규모 면에서 삼성전자를 훨씬 앞서고 있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모습인데요, 두 기업 간 경쟁은 갈수록 격화될 전망입니다. 삼성전자가 TSMC에 이어 미국 내 파운드리 공장 신축을 공식화했기 때문입니다. 두 기업 모두 파운드리 매출의 절반 이상을 미국에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삼성전자는 170억 달러, TSMC는 370억 달러 규모를 투입할 계획입니다.

공장 신축은 삼성에게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줄 것으로 관측됩니다. 2030년까지 파운드리를 포함한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고, 미국 빅테크 회사들이 파운드리 ‘큰 손’들인 만큼 미국 시장에서 존재감을 더 키운다면 TSMC를 추격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세계적 흐름이 만들어 낸 TSMC의 위치

난징 국제 반도체 컨퍼런스에 설치된 TSMC 부스 ©Costfoto/Barcroft Media via Getty Images
삼성뿐 아니라 세계 반도체 업계는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 특히 파운드리에서 점유율을 높이기 위한 경쟁이 치열합니다. 시장 규모가 크고 수익성이 좋다는 점 이외에 어떤 부분이 업계에 어필을 한 것일까요?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가격 상승과 하락에 따라 매출액이 들쭉날쭉해 변동성이 크지만, 비메모리 반도체는 다양한 상품을 소량 생산하기에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주문에 맞춰 생산량이 정해지기 때문에 가격 변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세계 반도체 시장이 커지면서 기존 반도체 기업들이 다양한 수요를 소화하기 위해서 자체 생산보다 파운드리에 주문을 의뢰하는 것이 더 이득인 점도 있습니다.

이런 장점과 더불어 2010년 무렵부터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고, 최근엔 코로나19로 비대면이 일상화되면서 노트북과 가전제품에 필요한 비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TSMC는 더욱 확고하게 파운드리 업계에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TSMC의 독주는 계속될까?


반도체 업계에선 TSMC가 지금의 독주 체제를 계속 이어 갈 것으로 전망합니다. 미국과 일본 등의 지역에 공장과 연구 시설을 짓기로 결정하며 과감한 투자를 이어 가고 있기 때문인데요, 올해 신규 투자에 300억 달러, 우리 돈 33조 원가량을 쓰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경쟁 업체들의 상황도 TSMC의 독주를 돕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중국 SMIC는 미국의 제재로 반도체를 생산할 장비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고, 최신 기술인 ‘3나노 반도체’ 경쟁에서는 삼성전자보다 더 많은 투자금을 쏟아부어 2022년에 개발을 마무리하겠다는 계획입니다. 바꿔 말해 그때까지는 반도체 생산을 TSMC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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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데일리 북저널리즘은 〈모든 칩을 걸어라〉와 함께 읽으시면 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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