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재킹 데모크라시

5월 28일 - 데일리 북저널리즘

벨라루스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하이재킹 당했나.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꽉 마주 쥔 두 손과 경직된 표정, 선명하게 남은 이마의 멍과 긁힌 자국. 누군가에게 구타를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남성은 벨라루스의 대표적인 반정부 인사 라만 프라타세비치입니다. 벨라루스의 한 국영 방송은 프라타세비치의 모습을 담은 29초 분량의 영상을 공개했는데요, 그는 영상에서 자신이 수도 민스크의 한 구치소에 수감돼 있다고 밝혔습니다. 벨라루스의 투사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벨라루스 정부가 체포한 프라타세비치의 모습을 공개했다. 얼굴에 구타 흔적이 또렷하다. ©Belsat TV 캡쳐
벨라루스 정부는 지난 23일, 리투아니아로 향하던 프라타세비치를 납치했습니다. 전투기까지 동원해 그가 타고 있던 여객기를 공중에서 ‘하이재킹’[1]한 것인데요, 비행기 안에 폭발물이 설치돼 있다는 핑계를 댔지만, 벨라루스에 도착하자마자 프라타세비치부터 체포했습니다.

프라타세비치는 영상에서 “민스크시에서 집단 폭동을 조직한 것을 인정한다”고 자백했습니다. 그러면서 “건강상 문제는 없고 교정직원들의 태도는 정중하고 법에 적합하다”는 말을 덧붙였는데요, 그의 가족과 지지자들은 프라타세비치가 고문에 못 이겨 허위로 혐의를 인정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프라타세비치는 벨라루스 대통령인 알렉산드르 루카셴코의 정적이기도 합니다. 학생 시절, 한 집회에서 경찰이 여성을 구타하고 아이와 함께 있던 엄마를 경찰차에 가두는 것을 목격하며 본격적인 반정부 투쟁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여러 차례 투옥되기도 했지만, 프라타세비치는 SNS에 ‘넥스타(NEXTA)’라는 채널을 만들어 루카셴코의 비위와 관련된 유출 문서와 동영상을 유포하며 민주화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았습니다.
대통령 선거 유세 중인 스베틀라나 티하놉스카야 후보 ©Photo by Tanya Kapitonova/Getty Images
또 다른 강력한 정적, 스베틀라나 티하놉스카야는 지난해 벨라루스 대선에서 루카셴코와 맞붙었던 야권 지도자입니다. 루카셴코가 크게 이기는 결과가 나오자 부정 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불복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정부는 그를 구금했고, 신변에 위협을 느낀 티하놉스카야는 어린 두 자녀와 함께 리투아니아로 망명했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민주 투사였던 것은 아닙니다. 평범한 교사이자, 엄마이자, 아내였는데요, 남편이 야권 성향의 블로그를 운영하다 잡혀간 이후 교사에서 정치인으로 탈바꿈하게 됐습니다.

망명지에서도 벨라루스를 위한 투쟁을 그치지 않았는데요, 사실, 프라타세비치가 하이재킹을 당하게 된 상황에는 티하놉스카야가 있습니다. 티하놉스카야가 그리스에서 경제 관련 회의를 열었고, 여기에 프라타세비치가 참석한 뒤 리투아니아로 돌아가다 봉변을 당한 겁니다.
 

벨라루스를 병들게 한 26년의 독재


도대체 왜 벨라루스에서는 민항기를 위협해 강제 착륙하게 하고, 정부에 비판적 성향을 보이는 인사를 모조리 잡아 가두는 것일까요? 문제의 중심에는 26년째 대통령 자리를 지키고 있는 루카셴코가 있습니다. ‘유럽에 남은 마지막 독재자’가 그의 별칭인데요, 특히 지난해 대선 결과에 대한 불복 시위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여론이 악화하자 더욱 폭압을 일삼고 있습니다.

벨라루스의 한 인권 단체에 따르면 대선을 전후해 약 5개월 동안 3만 명이 넘는 시민과 인권 단체 활동가, 야권 성향 언론인들이 체포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구타와 고문이 비일비재했고, 사망자도 다수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자신이 지난 대선에서 80퍼센트가 넘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됐다고 밝혔지만, 취임식을 몰래 치르는가 하면 부정 선거 의혹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는 등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국민으로부터 받은 정당한 권력임을 입증하는 대신 의혹이 제기되는 통로를 막으려고만 하니 문제가 되는 것이죠.

이런 이유로 반정부 전선의 중심인물인 프라타세비치와 티하놉스카야를 눈엣가시로 여기며 납치하거나 가두고, 정부의 감시를 피해 국민들이 ‘넥스타’ 등 SNS로 진실을 소통하는 것이 두려워 인터넷을 전면 차단하는 강경 조치를 취한 것이 아닐까요?
 

빗발치는 국제 사회 비난에도 러시아는 두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CIS 및 EEU 정상 회담에 참석한 루카셴코와 푸틴 대통령 ©Photo by Mikhail Svetlov/Getty Images
국제 사회는 이번 일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유럽 연합은 즉각 27개 회원국의 영공과 공항에 벨라루스 항공기가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는 제재안에 합의했습니다. 주변 육로까지 차단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되면 과거 ‘철의 장막’[2] 시절처럼 벨라루스가 고립의 길을 가게 되지 않겠느냐는 전망도 나옵니다.

미국도 규탄에 나섰습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사건의 완전한 진실을 알아내기 위한 국제적인 조사 요구에 동참하겠다”라고 밝혔고, UN 역시 독립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만은 동조하지 않고 있는데요, 오히려 비행기 착륙이 “합리적 행동이었다”고 두둔할 정도입니다. 왜일까요?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관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벨라루스와 주변 국가들 ©북저널리즘
루카셴코는 러시아를 ‘벨라루스의 큰형’이라고 표현합니다. 러시아를 어떤 존재로 여기고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 주는 워딩이죠. 실제 두 나라는 구소련에서 벨라루스가 독립하던 1994년부터 지금까지 안보와 경제 분야에서 서로를 돕고 있습니다. 특히 러시아는 벨라루스를 군사적 전략지로 삼고 있습니다. 북대서양조양기구(NATO) 동맹국이 많은 서유럽과 러시아 사이 완충지가 벨라루스이기 때문인데요, 러시아와 나토 동맹국들은 서로를 견제하면서 군사 훈련을 진행하고, 일촉즉발의 긴장감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벨라루스의 봄’은 언제


일각에선 다음 달 바이든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정상 회담을 앞두고 ‘큰형’ 러시아가 계속 벨라루스 편만 들기는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나옵니다. 미국이 이번 사건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고, 미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들과 관계 개선을 원하고 있는 만큼 프라타세비치를 석방해 주는 논의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벨라루스 국민의 독재 타도를 향한 열망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그러려면 루카셴코를 탄핵해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오게 해야 하지만,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의회 동의가 필요한데, 벨라루스 국회의원 110명 가운데 90여 명이 루카셴코의 심복과 지지자라 찬성할 가능성이 작기 때문입니다. 또, 반정부 진영 인사들이 대부분 감옥에 가 있거나 주변국으로 망명 중인 상황이라 판을 뒤집을 만한 힘이 부족해 보인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주제를 읽고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댓글로 의견 남겨 주세요.

* 오늘 데일리 북저널리즘은 《푸틴이 두려워 하는 것》 가운데 〈벨라루스의 반란과 나발니 독살 테러〉와 함께 읽어 보시면 더 좋습니다.
 
[1]
하이재킹(Hijacking)은 운항 중인 항공기를 불법으로 납치하는 행위를 뜻한다. 미국의 금주법(禁酒法) 시대(1919~1933)에 약탈자들이 숨어서 기다렸다가 밀매자의 위법 주류 운반차를 탈취하면서 ‘하이잭(Hi Jack)’이라고 소리쳤던 데서 유래한 말이다.
[2]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 진영에 속하는 국가들의 폐쇄성을 풍자하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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