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의지는 허상인가?
완결

자유 의지는 허상인가?

점점 더 많은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자유 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과연 그들의 말이 맞을까?

ⓒ일러스트: 나탈리 리스(Nathalie Lees)
인간 존재의 본성이라는 형이상학적 수수께끼에 대한 심도 있는 대화가 끝날 무렵, 철학자 갈렌 스트로슨(Galen Strawson)은 잠시 멈추더니 내게 이렇게 물었다. “혹시 이상한 이메일을 받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있나요?” 그는 자신의 컴퓨터에서 파일을 하나 찾더니, 지난 몇 년 동안 자신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을 걱정스럽게 만들었던 메시지들을 읽기 시작했다. 일부는 애처로웠고, 또 일부는 공격적이었지만, 그 메시지들은 모두 맹렬한 비난조였다.

그 편지는 이런 내용이었다. “지난해 당신은 그저 내 삶을 망가트리는 데 일조했어. 나는 당신 때문에 나의 아들, 나의 파트너, 나의 일, 나의 가정, 나의 정신 건강 등 모든 것을 잃었어. 이 모든 게 당신 때문이야. 당신은 내가 자제력이 없고, 내가 하는 일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나의 예쁜 여섯 살 아들도 자기가 하는 일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말했어... 안녕, 그리고 행운이 있기를. 암적이고, 사악하며, 한심할 뿐인 당신이라는 그 모든 존재여.”

그는 2015년에 받은 또 하나의 메시지를 읽었다. “똥통에서 썩어 버려, 갈렌. 당신의 아내, 당신의 아이들, 당신의 친구들, 당신은 당신이 이룬 모든 것들을 스스로 망쳐 버렸어. 당신은 X 같은 소리나 지껄이지.” 같은 사람이 쓴 메시지였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경고했다. “내가 당신을 조져 놓을 거야.” 그리고 며칠 후, “안녕”이라는 제목으로 “지금 당신에게 가고 있어”라는 메시지가 왔다. “이 시점에서는 저희도 경찰에게 협조를 요청해야만 했습니다.” 스트로슨의 말이다. 그 뒤로 폭력에 대한 위협은 사라졌다.

철학자들이 신변의 위협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윤리학자인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매우 예외적인 상황에서는 심각한 장애를 가진 신생아를 죽이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서 수많은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이처럼 특정한 괴롭힘 공세를 받는 입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스트로슨은 그저 자신의 오랜 입장을 표명해 왔을 뿐이다. 즉, 많은 사람들이 실생활의 정서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방구석 철학(armchair philosophy)”이라고 생각하는 오래된 담론에 대해서 말이다.

스트로슨을 비롯한 이들은 인간이 자유 의지를 가졌다는 걸 부정한다. 그들은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궁극적인 통제를 벗어난 힘에 의해 결정되며(그들의 주장대로라면 빅뱅 이전에 이미 그 모든 일들이 전부 결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전적인 책임은 없다고 말한다. 스트로슨은 자신의 허물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결점에 대해서 훨씬 더 관대한 듯한 인상을 주는데, 예전의 이메일을 다시 읽던 그는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의 스트레스에 대해서 자신이 공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저는 이 사람들이 그저 실존적인 재난을 겪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이다. “그리고 저는 그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유 의지가 없다는 고통스런 진실  


자유 의지라는 주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것의 난해함을 설명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복잡하거나 모호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이야기를 스스로 써내려간다고 생각하는 자유 의지를 가졌다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너무나도 기본적인 느낌이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에게 충분한 정신적 거리를 두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관찰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날 오후에, 당신이 약간 배가 고프다고 생각해 보자. 당신은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의 과일 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사과 한 개와 바나나 한 개가 있었다. 배가 고프기 때문에 당신은 바나나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사과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아니면 둘 다 고르지 않을 수도 있었고, 아예 둘 다를 모두 집을 수도 있었다. 그것이 바로 자유 의지이다. 만약에 세계의 시계를 되돌려서, 모든 것이 그 전과 동일한 상황에서 당신이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놓였다면, 당신은 다른 것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보다 더 자명한 것은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유로 시각을 달리한다고 말하는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그것이 사실과 다르다고 말한다. “이런 종류의 자유 의지는 물리학의 법칙들에 의해서 간단하면서도 분명하게 배제될 수 있습니다.” 자유 의지에 대한 회의주의자들 중에서도 가장 단호한 편에 속하는 진화생물학자인 제리 코인(Jerry Coyne)의 말이다.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나 폴 블룸(Paul Bloom)과 같은 세계적인 심리학자들도 여기에 동의하고 있다. 고(故)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도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샘 해리스(Sam Harris)가 2012년에 펴낸 《자유 의지는 없다》에 실린 추천의 말에서 자유 의지를 두고 “본질적으로 결함이 있고, 비논리적인 개념”이라고 했던 라마찬드란(V. S. Ramachandran)을 비롯한 수많은 저명한 신경과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참고로 샘 해리스는 저 책에서 라마찬드란과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

실천적 지성(public intellectual)인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에 의하면, 자유 의지는 시대착오적인 신화다. 아마도 과거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억압 이데올로기나 독재자에 맞서 싸우게 만들기 위한 동기 부여의 수단으로 유용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요즘에는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현대의 데이터 과학이 우리를 더 잘 알 수 있다. 그로써 우리의 선택을 예측하고 조작할 수 있는 현대의 데이터 과학의 힘 덕분에 자유 의지에 대한 믿음 자체가 구식이 되었다고 한다.

자유 의지의 존재를 반대하는 주장은 수천 년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최근에 다시 부활한 회의주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발전한 신경과학에 의해서 주도되어 왔다. 요즘에는 신경영상(neuroimaging) 덕분에 우리의 결정과 관련한 두뇌의 물리적인 작용을 관찰하는 것이 가능하게 됐다. 그래서 인간의 결정을 “자유 의지”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물질적 우주(material universe)에 존재하는 또 다른 메커니즘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로 신경과학 분야에서 다양하면서도 구체적인 발견들이 이뤄지면서, 소위 말하는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우리의 두뇌 속에서 우리가 미처 그것을 인식하기 이전의 수 밀리초(ms) 이내에, 또는 그보다 훨씬 더 이전부터 발생하는 것일 수 있다는 논쟁적인 단서들을 제공해 왔다.

이 모든 것이 그저 방구석 철학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러한 주장을 비판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는 그리 많지 않을 수도 있다. 자유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진다면, 그래서 우리가 그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것은 “진화론을 두고 벌여 온 논쟁보다 훨씬 더 격렬한 문화 전쟁을 촉발시킬 것”이라고 《자유 의지는 없다》에서 해리스는 쓰고 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분명 사람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그에 대한 책임은 개인에게 없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그들을 칭송하거나 또는 비난하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악행을 저지른 것에 대한 죄책감이나, 뛰어난 성취에 대한 자긍심이나, 다른 사람의 친절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는 것도 불합리한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범죄자들에게 그에 합당한 응분의 처벌을 내리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 수도 있다. 그러한 잘못된 행동을 범죄자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인간의 모든 관계를 치명적으로 부식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 어떤 사랑이나 존경을 표하는 행동들도 따지고 보자면 모두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이어서, 낭만적인 사랑이나 우정, 이웃들 사이의 예절이 모두 개인의 선택에 기반을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 의지의 추락을 둘러싼 논쟁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고 나면, 여러분은 이미 심리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파탄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스트로슨이 자신에게 이메일을 보낸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다. 해리스는 자유 의지를 다룬 자신의 팟캐스트에서 그것의 존재를 부정하는 발언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그런 주제가 정서적으로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듣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하이파대학교(University of Haifa)의 철학 교수인 사울 스밀란스키(Saul Smilansky)는 자유 의지라는 대중적인 개념이 오류라고 믿고 있다. 그는 만약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대학원생이 이 주제를 연구하고자 한다면, 그 대학원생에게 그러지 말라고 설득할 것이라고 말했다. 관련해서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보시다시피 저는 원래부터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저는 촌스런 바보 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쉽게 행복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 의지라는 문제는 그걸 심각하게 고민한다면 정말로 우울한 주제입니다. 이 주제는 저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약 세월을 다시 대학원 시절로 돌이킬 수만 있다면, 저는 좀 더 나은 다른 주제를 선택했을 겁니다.”

 

자유 의지가 있다는 달콤한 환상 


스밀란스키는 그 자신이 “환영주의(illusionism)”라고 부르는 것을 옹호하는데, 이는 비록 자유 의지를 관습적인 방식으로 정의하자면 비현실적이지만, 사람들이 다른 방식으로 그것의 존재를 계속 믿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아이디어이다. 따라서 그의 생각에 의하면 지금의 이런 종류의 글은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만약 20년 전이었더라면, 그는 나와 이야기하는 걸 거절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요즘에는 자유 의지에 대한 회의적인 논의가 너무나도 널리 퍼지면서, “그 논의를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만약 사람들이 가장 심층적인 수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이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저조차도 그런 사실을 저 자신의 내면에서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아무튼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두렵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스밀란스키의 말이다. “윤리와 정서에 대한 믿음이 깊은 사람이라면, 그것은 상당히 우울하면서도 파괴적인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에 대한 자각, 개인적인 가치에 대한 인식을 심각하게 위협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그 진실은 그저 너무나도 끔찍할 따름입니다.”

그 누구도 무엇을 하든 간에 결코 자유롭게 선택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한 이러한 확신은, 다시 말해서, 우리는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조종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학문에 발을 들여놓는 초기에 일찌감치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갑작스럽게 번뜩이는 통찰력처럼 깨우치는 경우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75년에 저는 (옥스퍼드의) 울프슨칼리지(Wolfson College)의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박사 학위 논문을 무엇을 주제로 쓸 건지에 대해서 아무런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스트로슨의 말이다. “그런데 자유 의지에 대한 칸트의 견해를 다룬 글들을 읽다가, 저는 갑자기 짜릿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바로 그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얼핏 보면, 그 논리는 냉담할 정도로 가차 없는 것처럼 보인다. 명백한 사실로 보이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전적으로 그 전에 일어났던 일들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을 일으킨 일들은 역시 그전에 일어났던 일들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다. 이런 식으로 태초의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원인의 원인이 있고, 또다시 원인의 원인이 있으며, 모든 것들은 예측 가능한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 설령 우리가 아직까지 만물의 법칙을 모두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바위나 강물이나 내연 기관과 같은 직관적이면서도 물질적인 세계를 생각하면, 그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판단과 의도라는 물질적이지 않은 세계에서도 분명히 “하나의 무언가가 다른 것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판단을 하고 의도를 가지는 과정에서는 신경 활동이 수반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경이 바위와는 다르게 물리적인 법칙에서 제외되어야 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을까?

앞서 언급했던 냉장고 과일 칸의 예시를 보자면, 애초에 우리가 배고픔을 느끼는 생리적인 이유들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원인이다. 우리가 배고플 때 도넛이 아니라 과일을 먹기로 선택한다면, 그 원인은 우리의 유전자에, 우리의 성장 과정에, 우리의 현재 환경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예시에서 사과가 아니라 바나나를 선호한다면, 그 선택은 그 전에 있었던 일들로 인해서 유발되었을 것이며, 그러한 일들 가운데는 아마도 자신의 두뇌에서 뉴런이 신경 전달 물질을 분비하는 패턴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뉴런의 활동은 다시 그 사람의 출생으로, 그 전에 부모의 만남으로, 다시 그 두 사람의 출생으로, 그리고 결국은 우주의 탄생으로까지 그 인과 관계의 끊어지지 않는 사슬(unbroken chain of causes)이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사과와 바나나가 있는 것을 봤을 때 둘 중에 어느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자유 의지가 존재할 여지는 전혀 없게 된다. 학문적 용어로 “반-인과적(contra-causal)” 자유 의지라는 것이 존재하려면, 그래서 우리가 시간의 테이프를 거꾸로 감아서 어떤 선택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어떻게든 물리적인 현실을 벗어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인과 관계의 끊어지지 않는 사슬에서 다음의 결과로 연결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즉, 물질 세계와는 분리된 마치 유령 같은 존재이지만, 그래도 어떤 알 수 없는 방법에 의해서 여전히 그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곳이 만약에 우주의 외부에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우리가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원자들은 물론이고 우주를 지배하는 모든 법칙들을 전부 벗어던지고 실제로 그곳까지 갈 수는 없다. 우리는 그저 우주 안에 존재하는 원자들의 극히 일부일 뿐이며, 그 나머지의 모든 원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측 가능한 동일한 법칙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찰스 휘트먼은 라플라스의 악마에게 조종당한 것인가   

체코의 프라하에 있는 천문 시계(astronomical clock) ⓒ사진: 존 켈러만(John Kellerman)/Alamy
프랑스의 다재다능한 학자였던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는 1814년의 저술에서, 이에 대한 수수께끼를 아주 간명하게 표현했다. 즉, 모든 사건들이 마치 시계 장치처럼 그저 앞으로만 돌아가는 우주에서, 자유 의지라는 것은 과연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그의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은 라플라스의 악마(Laplace’s demon)라고 알려져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약 어떤 가상의 초지성적인 존재(또는 악마)가 어떻게든 특정한 어느 시점에서 우주 내의 모든 원자의 위치를 알 수 있다면, 그는 미래를 완전히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100년 또는 1000년 이후는 물론이고, 참새 한 마리의 아주 미세한 날갯짓에 이르기까지 그 존재가 모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각자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서 자신의 배우자와 결혼하고, 감자튀김이 아니라 샐러드와 함께 식사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라플라스의 악마가 끝없는 인과 관계의 사슬을 따라서 추론한다면, 이미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라플라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지적인 존재에게는 그 어떤 것도 불확실한 건 없으며, 미래는 마치 과거처럼 바로 눈앞에 보이게 될 것이다.”

라플라스의 시대가 지난 이후, 실제로 양자물리학에서는 원자나 전자의 수준에서 벌어지는 일부의 사건들이 말 그대로 임의적으로 벌어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즉, 원자나 전자의 수준에서는 아무리 초지성적인 뛰어난 존재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존재를 미리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 의지 논쟁에 관여한 사람들 중에서 그러한 특징이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러한 아주 미세한 파동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고 있는 규모의 현실에서는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정론적인 인과 법칙의 노예가 아니라 전자의 무작위적인 행동에 의해 좌우되는 대상이 된다고 해서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 어느 경우든, 자신의 자유 의지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 우리의 몸에 묶인 끈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의 시점에서 볼 때, 자유 의지가 존재하지 않음을 암시하는 가장 불편한 사례는, 그런 경우에 처한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서는, 도덕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인 것으로 보인다. 즉, 사람들이 하는 행동은 맹목적이며 결정론적인 영향의 결과이기 때문에(여기에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무작위성까지 약간 더해질 수도 있다), 그 누구도 결코 자신이 저지른 것에 대해서 진정으로 그에 합당한 보상이나 처벌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렉 카루소(Gregg Caruso)는 동료 철학자인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과 함께 나눈 대담을 엮은 신작 저서인 《적막한 불모지(Just Deserts)》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자유 의지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인 사람들에게는, 그 누구에게든 도덕적인 책임을 묻는 것은 결코 정당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만약 그런 생각이 암시하는 바를 모두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은, 그리고 특히 우리가 범죄자를 대하는 방식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바뀔 것이다.

찰스 휘트먼(Charles Whitman)의 사건을 예로 들어 보자. 1966년 8월 1일, 자정이 막 지난 시각, 외향적이며 정신적으로는 안정되어 보였던 25세의 미국 해병대 출신의 휘트먼은 텍사스의 오스틴에 있는 모친의 아파트로 차를 몰고 가서 그녀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 집에 돌아온 그는 자신의 아내를 같은 방법으로 살해했다. 같은 날 그는 여러 종류의 무기를 가지고 텍사스대학교의 교정에 있는 높은 건물의 꼭대기에 올라가서, 대략 한 시간 반 동안 무작위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 휘트먼이 경찰에 의해 사살되기 전까지 현장에서 12명 이상이 숨졌으며, 당시 입은 부상으로 인해 몇 년 후에 한 명이 더 목숨을 잃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열 번째의 순위에 꼽히는 대량 난사 사건이다.

대참사가 있은 지 몇 시간 만에, 당국은 휘트먼이 전날 밤 타이핑한 종이를 한 장 발견했다. 그는 타자기로 이렇게 적어 놓았다. “무엇이 나에게 이 편지를 쓰게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최근에 저지른 행동들에 대해서 막연하게나마 이유를 남기라는 것인 것 같다. 나는 요즘의 나 스스로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 나는 합리적이고 지적인 보통의 젊은 청년이어야 했다. 하지만 최근에(그게 언제 시작되었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머릿속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이상하면서도 비이성적인 수많은 생각들의 희생양이 되고 있고, 뭔가 유용하면서도 진취적인 일에 집중하려면 엄청난 정신적 노력이 필요했다... 내가 죽으면, 나를 부검해서 뭔가 눈에 띄는 신체적 장애가 있는지를 확인해 주기를 바란다.” 처음 두 명(모친과 아내)을 살해한 이후, 그는 마지막에 이런 내용을 덧붙였다.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이런 유형의 추가적인 비극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부검이 실시됐다. 그리고 상당한 뇌종양이 휘트먼의 편도체(amygdala)를 누르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편도체는 공포를 마주했을 때 “싸울 것인지, 아니면 도망갈 것인지”에 대한 반응(투쟁 도피 반응, fight-or-flight response)을 관장하는 부위이다.

휘트먼 사건을 인용하는 자유 의지 회의론자들도 인정하다시피, 뇌종양이 과연 휘트먼이 저지른 사건들을 일으킨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해 보이는 것은,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며,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그에 대해 갖고 있던 태도에서 변화를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살인 행위들이 덜 잔혹해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경찰이 그를 사살했던 것이 정당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의 광란 행위가 악마 같은 사람이 저지른 악마 같은 행동이 아니라 어떤 끔찍한 장애의 증상에 의해서 촉발된 것이며, 휘트먼 자신도 어쩌면 희생자일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자유 의지와 관련한 문헌에서 다루면서 유명해진 또 다른 범죄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측 안와전두 종양과 소아성애 증상 및 구성실행증 징후(Right Orbitofrontal Tumor with Paedophilia Symptom and Constructional Apraxia Sign)’라는 제목으로 2003년에 발표된 논문에 등장하는 익명의 주인공은 40세의 학교 교사로서, 갑작스럽게 소아성애 충동이 발현돼서 아동 포르노를 찾기 시작했으며, 결국엔 아동 폭행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판결 직후, 두통을 호소하던 그는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종양을 제거하자 그의 소아성애 충동이 사라졌다. 1년 뒤, 그 증세가 재발했다. 그리고 다시 두뇌를 스캔한 결과, 종양이 재발해 있었다.

그러나 만약 이 사건에서 어떻게든 뇌종양을 무죄의 증거임을 밝히려면, 상당히 어려운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두뇌에서 사람들에게 뭔가를 행동하게끔 만드는 다른 수많은 작용들에 비해서, 뇌종양이 대체 왜 그렇게 특별한가 하는 것이다. 찰스 휘트먼의 두개골 내부에서 전개된 인과 관계의 구체적인 사슬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이번에도 그가 저지른 끔찍한 행위들에 대해서 그에게 개인적인 책임이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여느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도 모두 두뇌를 가지고 있으며, 그 안에서 사전에 인과 관계의 사슬이 전개되어 그 행위에 이르게 만들었다. 만약 그들에게 두뇌가 없었다면, 애초에 그런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해리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들에게 어떤 생각과 행동을 일으키는 신체적 사건들 중에서도 신경학적 장애는 특별한 경우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두뇌의 신경생리학을 이해하게 된다면, 그 안에서 종양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무죄의 증거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두뇌의 작용 원리를 더욱 많이 알게 된다면, “자유 의지”라고 불리는 것이 잠복해 있을지도 모르는 마지막 어둠의 영역에 빛을 비추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범죄자들은 단지 운이 나빴던 나머지, 결국엔 범죄로 막을 내리고 마는 인과 관계의 사슬에 위치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자유 의지가 없다면 범죄자도 응징받아선 안 되는가

ⓒ일러스트: 나탈리 리스(Nathalie Lees)
그렇다 해도 우리는 문제적인 범죄가 여전히 도덕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다. 다만 그걸 저지른 범죄자들에게 개인적인 책임을 지울 수는 없는 것이다. 적어도 그러한 논리대로라면 우리 현대인들의 마음은 그렇게 향하게 될 것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전통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당시에는 설령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 할지라도, 그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뉴욕주립대학교(State University of New York)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그렉 카루소(Gregg Caruso)가 보기에, 이러한 모든 사실들이 가리키는 의미는 공공의 안녕을 지키기 위한 목적이나 다른 이들에 대한 경고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응분의 처벌을 하는 것이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스트로슨과 마찬가지로, 그도 역시 이러한 주장 때문에 불안을 느낀 많은 사람들로부터 협박성 이메일을 받았다.

응징은 현대적인 모든 사법 체계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카루소는 이렇게 생각한다.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어떤 행동에 대해서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도덕적으로 부당합니다. 그건 변덕스러운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심리한 연구를 보면, 사람들이 자유 의지를 믿는 이유에는 보복에 대한 욕구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도 일부 존재함을 알 수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못마땅해하는 어떤 행위를 마주했을 때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비난이나 처벌에 대한 욕구가 높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을 자제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가해자에게 돌림으로써 그들에 대한 비난을 정당화하는 요건을 만드는 것입니다.” (자유 의지에 대한 논란이 종교와 관련한 논쟁에 휘말리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즉, 종교에서도 죄인은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로 범죄를 저지르기로 선택한 것이라는 비슷한 논리를 따르고 있는데, 이는 신에 의한 응징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다.)

카루소는 사법 체계에 대해서 자신이 “공공보건 검역(public health-quarantine)”이라고 부르는 모델을 지지하는 사람이다. 이는 기존의 처벌 위주의 제도로부터 철저하게 인도적인 방향으로 전환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자면 살인자를 여전히 구금할 수는 있지만, 그 이유는 공공 보건을 지키기 위해서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될 사람을 격리하는 것과 동일한 논리이다. 그러나 공공의 보호를 위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 이상의 불편을 감수하게 할 권한은 없다. 그리고 그들이 더 이상의 위협을 보이지 않는다면, 즉시 그들을 풀어줄 의무를 지게 된다(공공 보건 시스템이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집중하는 것처럼, 카루소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애초에 범죄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사회적인 현안들을 바로잡는 데 모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그로 인해서 발생하는 복잡한 문제들을 어떻게든 모면하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다. 즉, 우리는 스스로가 가진 최악의 충동(예를 들자면 살의)에 굴복하는 걸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살해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에 저항하거나 때로는 정신 의학의 도움을 구할 수도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인격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새로운 전문 기술을 배우기로 결정한다든가, 다른 사람의 말을 좀 더 잘 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든가,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든가 하는 좀 더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언제나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보기와는 다르게 이러한 논리는 면책 조항이 될 수 없다. 이에 대해서 자유 의지 회의론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의 인격을 어떤 훌륭한 방식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우리의 인격은 이미 그러한 변화를 일으켰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잔악한 행위들이 우리가 예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덜 끔찍한 것이었다고 믿을 필요는 없다. 다만 가해자들에게 개인적인 비난을 돌리기는 힘들 것이다. 당신이 히틀러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서 히틀러의 양육 환경을 동일하게 경험했다면, 당신은 히틀러가 됐을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당신이 그렇게 태어나고 자라지 않았다는 것만이 유일한 행운인 것이다. 결국, 스트로슨이 말하듯이 “모든 것은 운에 달린 것”이다.



자유 의지와 결정론은 양립할 수 있는가 


자유 의지에 반하는 사례들이 이토록 물샐틈없이 탄탄해 보인다는 점을 고려할 때,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상당히 놀라운 부분이다. 필페이퍼스(PhilPapers)라는 웹사이트에서 2009년에 진행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그러한 주장에 설득된 철학자들은 12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러한 의견 차이는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부분적으로는 자유 의지를 부정하는 조류가 일부 철학자들을 상당히 당황하게 만들 정도로 폭넓은 추세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자연 과학을 공부한 철학자들에게서 나타난다. 그들은 철학계에서 오랫동안 격렬하게 논의되어 온 이러한 논쟁들에 대해서 전면적인 선언을 하고 나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물리학자와 신경과학자들이 전면에 나설 때까지 어리석은 철학자들은 모두 그저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언젠가 대니얼 데닛은 신경과학 박사 학위(PhD)를 가진 샘 해리스에게 비꼬는 듯한 칭찬을 보냈는데, 그의 책을 두고 “놀랍다”거나 “귀중한” 저서라고 표현했다. 다만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해리스의 책에 잘못된 주장들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다지 외향적이지도 않은 과학자들이 자기들 사이에서만 생각했던 내용을 해리스가 그토록 대담하고 명쾌하게 발언한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더욱 놀라우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사실이 있다. 자유 의지를 방어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택은 이미 결정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회의주의자들의 가장 첨예한 주장을 부정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다시 과일 칸의 예로 돌아가 보자. 만약 시간의 테이프를 돌려서 선택의 순간으로 되돌아간다 하더라도, 그리고 우주의 모든 조건이 정확히 동일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없을 것이라는 데 대해서 대다수의 철학자들도 동의하고 있다. 그러한 종류의 자유 의지는 데닛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령과 같은 허상”에 불과하다.

대신에 그들은 그러한 사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의 모든 선택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양립주의자(compatibilist)”라고 부른다. 그들은 결정론과 자유 의지가 ‘양립할 수 있다(compatible)’고 생각한다(이 논쟁에 대해서는 그 외에도 수많은 입장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서, 일부의 철학자들은 우리가 정말로 마치 “유령과도 같은” 자유 의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들 중의 상당수는 기독교인들이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이러한 모든 문제가 범주의 혼란이나 언어적인 오류에서 기인한 가당치도 않은 생각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자유 의지를 부정하는 설득력 있는 사례를 찾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양립주의가 언뜻 보기에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사실상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는데, 어떻게 그러한 선택의 자유가 가능하다는 것일까? 그러나 양립주의자들의 요점을 파악하려면, 자유 의지는 뭔가 마술 같은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성인들이 거의 언제나 갖고 있는 아주 평범한 기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이에 대해서 양립주의자인 카드리 비흐벨린(Kadri Vihvelin)은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유 의지를 갖고 있다. 거기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행동의 자유도 포함되는데, (우리는) 여러 단위의 능력을 갖고 있으며 올바른 환경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양립주의자들이 가진 관점에 의하면, “자유롭다”는 것이란 단지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본 다음에 그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행동하고 때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에 바나나를 고른다면, 그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좋아하는 과일에 대해서 생각한 다음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과일에 대해서 과도하게 집착하는 무장 강도가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바나나를 선택하는 상황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또는 바나나 중독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바나나를 집어 들라고 말하는 상황도 아니다. 이러한 모든 사례들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우리의 행동은 인과 관계의 끊어지지 않는 사슬을 따라서 태초의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러나 무슨 상관인가? 그래도 위에서 든 극단적인 사례에 비해서, 평범한 상황에서 바나나를 선택한 사람은 그래도 확실히 좀 더 자유로웠다.

“해리스, 핀커, 코인, 이들 과학자는 모두 동일한 2단계 논법을 펼치고 있습니다.” 미국 조지아주립대학교에서 재직하는 양립주의 철학자인 에디 나미아스(Eddy Nahmias)의 말이다. “첫 번째 단계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자, 자유 의지의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는 그 누구도 결코 실제로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예외 없이 그것의 힘을 빼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앞에 그렇게 부풀려진 풍선이 있다면, 그 안에 든 공기를 빼는 건 아주 간단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자연 법칙으로도 그것이 거짓임을 입증할 수 있을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최면에 걸려서 특정한 물건을 구매하도록 유도되는 사람이 있고, 평범한 상태에서 잘 생각한 다음에 신용카드를 꺼내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런 경우에 자유주의에 대해서 철두철미하게 회의적인 사람이라면, 그 두 사람이 가진 자유의 수준이 다르지 않다고 주장할 것이다. 아무튼 그들이 생각하는 개념에 의하면, 자유 의지라는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떤 선택이 전적으로 이전의 원인들에 의해 결정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하다. 그러나 최면에 걸렸든 그렇지 않았든 두 경우 모두 전적으로 이전의 원인들에 의해서 결정되었고, 따라서 자유 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그냥 짜증나는 설명입니다.” 자유 의지에 대해서 폭넓은 저술 활동을 해온 맨체스터대학교(University of Manchester)의 철학자인 헬렌 비비(Helen Beebee)의 말이다. 그녀는 회의주의자들이 내세우는 다소 기이한 주장에 대해서 양립주의자들이 흔히 느끼는 불만에 대해서 설명하던 중이었다. “사람들이 그것을 ‘자유 의지’나 ‘자유롭게 행동하기’ 또는 그 외의 뭐라고 부르든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최면에 걸려서 어떤 행동을 하든 말든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분명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호환 가능한 버전의 자유 의지라는 개념은 조금은 덜 흥미로울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가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런 종류의 자유 의지는 (다시 한 번 대니얼 데닛의 표현을 빌리자면) “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자유 의지”일 수도 있다. 우리는 특정한 과일에 대한 욕망을 경험하고, 그것에 따라서 행동하고, 그 과일을 손에 넣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 외부의 어떤 무장 강도나 내부의 어떤 장애도 우리의 선택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한 명의 사람이 이보다 어떻게 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우리가 선택한 것은 그저 우리가 선택한 것이다 

대니얼 데닛, 스웨덴 스톡홀름 ⓒ사진: Ibl/Rex/Shutterstock
자유 의지에 대해서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면 1980년대에 미국의 신경과학자인 벤저민 리벳(Benjamin Libet)이 수행했던 일부 악명 높은 실험들에 대해서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 그가 진행한 실험들은 자유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로 해석되어 왔다. 그는 피험자들을 두뇌 스캔 장치에 연결한 후, 그들이 원하는 순간에 손가락을 움직여 보라고 했다. 그리고 리벳은 그들이 의식적인 결정을 내리기 300밀리초(ms) 전에 이미 그 선택에 대한 두뇌 활동이 감지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던 것 같다(다른 연구들을 보면, 의식적인 선택보다 최대 10초가량 앞서서 그런 활동이 감지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만약 실험 장비가 그들의 결정을 미리 알았다면, 이들 피험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판단에 자유롭게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대부분의 양립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실험은 공연한 난리법석에 다름 아니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식적 선택은 우리의 신경 프로세스(neural process)가 인과 관계의 사슬로 묶인 링크(연결 고리)이다. 그래서 당연히 두뇌 활동의 일부는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보다 앞서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찰스 휘트먼과 같은 사례는 이제 우리가 그 누구의 악행에 대해서도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거나, 또는 그 누구의 성취에 대해서도 찬사를 보낼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여 미리 당황할 필요는 없다(그들을 대신해서 말하자면, 내가 이야기를 나눠 본 자유 의지 회의론자들도 그렇게까지 주장하지 않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대신에 우리는 그들의 행위에 비추어 볼 때 그 사람이 과연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정상적인 능력을 가졌는지를 물어보면 된다. 우리 모두 신생아에게는 아직 그런 능력이 없다는 데 동의하기 때문에, 아기들이 한밤중에 깨어난다고 해서 비난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 이외의 동물들도 대부분 그런 능력이 없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혹여 말벌이 사람을 쏜다고 해서 벌들을 향해서 격한 분노를 쏟아 내는 이들은 거의 없는 것이다. 심각한 신경학적 장애나 발달 장애를 가진 이들 중에서도 그런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있다. 아마 휘트먼도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어떨까? “제가 내세우고 싶은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버니 매도프(Bernie Madoff)입니다.” 철학자인 에디 나미아스(Eddy Nahmias)의 말이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며, 자신이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우리가 “자유 의지”라고 부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활용해서 투자자들에게서 171억 달러 이상의 돈을 가로챘다.

자유 의지 회의론자들에게는 이런 모든 사실들이 그저 체면치레이자 주제를 전환하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라고 생각한다. 즉, 자유 의지라는 것을 우리가 어떤 선택을 마주했을 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이름을 붙일 가치도 없는 것으로 재정의하려는 노력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행위자가 아니라는 아이디어를 싫어한다”고 제리 코인은 주장한다. 샘 해리스는 대니얼 데닛을 두고, 잃어버린 도시인 아틀란티스를 발견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게 그냥 시칠리아에 여행 가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주제를 접근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아무튼 그러한 비유는 몇 가지 기준에서는 적절한 것이다. 즉, 그것은 바다에 떠 있는 하나의 섬이며, 고대에 기원을 둔 문명의 고향이라는 점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실은 명확하다. 아틀란티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바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해도,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자유 의지가 허상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도 허상이다 


철학적 진실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우리는 자유 의지가 있는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근거로 들어서, 자유 의지와 관련한 논쟁을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라며 묵살하고 싶을 수도 있다. 나는 확실히 누구를 만나든 그들에게 자유 의지가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대답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나 자신 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한다면, 당신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기 때문에)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을 거라는 점을 참작해서 너그럽게 웃어넘기기보다는, 맹세컨대 당신에게 격렬하게 분노할 것이다. 이러한 경험적인 감각에서 보자면, 자유 의지는 그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의 마음이 최대한 고요할 때, 예를 들어서 네 살짜리 아이가 깨어나기 전에 아침 일찍 혼자서 조용히 커피를 마시는 상황이라면, 상황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게 편안하게 집중할 수 있는 순간이면, 우리의 의도와 선택들은 다른 모든 생각이나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의식 속에서 뜻하지 않게 발생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나 자신이 그러한 판단의 입안자라는 생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순간에 내가 커피 잔을 내려놓고 샤워를 하러 간다면, 왜 그랬던 걸까? 왜냐하면 그러고자 하는 의도가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인데, 이는 분명 의심의 여지없이 나의 두뇌에서 일어난 온갖 종류의 활동들에 의해서 야기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두뇌의 활동은 나의 명령을 듣지도 않을뿐더러,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밖에 존재한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뭔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한 판단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자면, 어떤 친인척의 장례식에 참석할 것인지, 또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의 직업적인 기회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와 같은 선택에 있어서 말이다. 나는 그러한 사안에 대해서 나 스스로에게 “결정을 내려야 해”라고 말하면서 몇 시간, 아니 며칠이라도 보내기도 한다. 그런 후에도 정작 내가 하는 행동이라는 것은, 솔직히 말하자면, 여전히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방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갑자기 어떤 예측하지 못했던 순간에, 또는 해당 사안에 대해서 외부적으로 설정된 마감 시한에 쫓겨서 한 가지 경로를 실행하기로 결심하거나, 아니면 그냥 단순히 또 다른 방안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샘 해리스가 말하는 것인데, 자세히 살펴보면, 자유 의지가 허상이라고 말 할 때 그것은 자유 의지 그 자체가 허상일 뿐만 아니라, 자유 의지가 허상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도 허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우리는 심지어 자유로워 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내게 이메일을 통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누구나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면, 무언가를 경험하는 와중에는 그 경험의 주체가 없고 오직 경험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그저 그 자체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David Hume)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의 근원을 불교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즉,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명령을 내리는 지휘관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그 자체적인 인과 관계에 의해서 결정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는 그저 마음의 작용만이 계속되고 있다. 또는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가 1871년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내 생각이 전개되는 것을 바라보는 관전자이다. 나는 그것을 관찰하고, 그것을 경청한다.”

사울 스밀란스키(Saul Smilansky)의 의견에 동의해야 하는 이유는, 설령 그것이 사실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해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대니얼 데닛은 비록 우리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도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자유 의지가 없다는 주장을 퍼트리는 것이 도덕적으로 무책임하다고 주장한다). 2008년에 수행된 일련의 연구에서 심리학자인 캐슬린 보스(Kathleen Vohs)와 조너선 스쿨러(Jonathan Schooler)는 한 그룹의 참가자들에게 DNA의 구조를 공동으로 밝혀낸 프란시스 크릭(Francis Crick)이 쓴 《놀라운 가설(Astonishing Hypothesis)》에서 발췌한 내용을 읽어 달라고 요청했다.

참고로 이 책에서 저자는 자유 의지가 허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유 의지의 존재를 의심해야 한다는 내용을 읽은 이 그룹의 사람들은 다음 단계의 테스트에서 돈이 걸려 있는 시험을 진행했을 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서 부정행위를 저지를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연구에서는 자유 의지에 대한 믿음이 적어지면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자진해서 나서려는 의지가 줄어들었고, 인간관계에 대한 관심과 노력의 수준이 낮아졌으며, 감사함을 느끼는 정도도 낮아졌다.

그러나 보스와 스쿨러의 연구 결과를 재현하려는 시도들이 성공하지 못하자, 그들의 연구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설령 그 연구 결과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일부 자유 의지 회의론자들은 그러한 연구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한 가지 공통적인 실수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주어진 과제를 상당히 빠르게 해결하는 참가자는 오히려 자유 의지에 반하는 사례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한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연구에서 갑자기 비도덕적인 태도를 보인 참가자들은 결정론과 운명론을 혼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에게 자유 의지가 없다면 우리의 선택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선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행동은 우리의 선택과는 관계없이 미리 정해진 것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아이에게 채소가 풍부한 식단을 먹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결정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선택은 대단히 중요하다. 또는 차들이 바삐 오가는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에 도로의 양쪽을 조심스럽게 확인할 것인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회의론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는 그러한 선택을 자유롭게 내릴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오늘도 스스로 커피를 마신다 


어느 경우든, 만약 자유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실제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그 의미가 완전히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물론, 냉혈한 살인자가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 그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거나, 한편으로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스밀란스키의 표현대로 “이미 주어진 결과가 전개되는 것”이며 인간적인 특징은 전혀 없이 그저 냉랭한 인과 관계에 불과하다고 특징짓는 것은 상당히 거부감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해방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즉, 우리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보다 관대해질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해왔던 것처럼 정확히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는 것이 치유에 도움이 될 것이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우리 스스로가 그보다 더 잘 해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사소한 잘못에도 쉽게 화를 내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신 역시도 얼마든지 그들처럼 실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물론, 자유 의지에 대한 불신이 사람들을 더욱 친절하게 만든다는 연구 결과들도 존재한다).

해리스는 만약 우리가 자유 의지에 반하는 사례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싫어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 비난할 수 없는데, 그 사람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사랑이라는 개념은 거의 상처받지 않고 살아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하고, 그러한 윤리적이며 정서적인 유대감에 의해서 우리 스스로가 행복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개의 감정은 그 어느 것도 손상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외에도 우리들 인생의 수많은 긍정적인 측면들도 비슷하게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스트로슨의 표현대로, 자유 의지에 대한 믿음이 없는 세상에서도 “딸기는 여전히 예전처럼 맛있을 것”이다.

아침 일찍 커피를 마시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떠나서, 개인적으로 나는 자유 의지에 반하는 결정적인 사례를 찾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우리의 삶에 있어서 명백하게 사실이라고 여겨지는 다른 수많은 사례들과 상충할 뿐이다. 그러나 비록 가상의 가능성으로만 느끼는 즐거움에 불과할지라도, 자유 의지에 대한 회의론은 한 개인의 성취가 오직 그 사람 한 명에게만 귀속되며, 따라서 실패한 사람들은 그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만 물어야 한다는 삭막한 개인주의적인 철학에 대한 해독제가 될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출생이라는 사건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우리 인생의 궤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는 단지 우리가 태어난 사회 경제적인 지위만이 아니라, 우리의 재능, 약점, 낙천성, 그리고 폭력이나 게으름, 절망에 빠지려는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떠나게 되는 여정 등 우리의 성격은 물론이고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전반적인 경험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실의 모습 안에는 인간적인 동료애라는 깊은 의식이 존재한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폭풍우가 몰아치는 운명의 바다 위를 표류하는 같은 배에 올라타서 서로에게 필사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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