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의 전나무를 지나 내부로 들어가면 또 다른 나무를 만나게 됩니다. 역시 기후 변화로 고사한 나무를 옮겨왔습니다. 마당의 나무보다 고사한 지 오래된 소나무입니다. 우리가 아는 소나무의 갈색 껍질은 수분 증발로 떨어져 나가 없고, 창백한 속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곧게 뻗은 나무 기둥은 서너 조각으로 부러진 채 미술관 로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전시 목적으로 옮기면서 부러뜨린 게 아니라, 고사하면서 부러진 겁니다.
전시장의 고사목은 산에서 벌어지는 일의 일부일 뿐입니다.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등 한반도의 주요 국립공원과 삼림보호지역에서는 구상나무, 분비나무, 소나무 등 침엽수들이 집단 고사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만 자라는 특산종인 구상나무의 고사는 특히 심각합니다. 한라산과 지리산 고지대가 주요 서식지인데요, 한라산 구상나무는 2019년 제주도 세계유산본부가 발표한 자료 기준으로 20년 사이 36퍼센트가
고사했습니다. 세 그루 중 한 그루가 죽은 겁니다. 세계 최대 자생지인 한라산 진달래밭 일대 구상나무 숲에선 고사율이 90퍼센트에 달하기도 했습니다. 전시장에선 드론으로 촬영한 한라산 구상나무 서식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침엽수 하면 떠오르는 짙은 녹색이 아니라, 갈색과 흰색으로 뒤덮인 산과 나무는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국립산림과학원의
연구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 이후 전국의 침엽수림은 20년간 약 25퍼센트 감소했습니다. 특히 설악산, 백운산-함백산-장산, 지리산, 한라산 지역에서 가장 많이 감소했다고 합니다. 미술관 바깥의 전나무도 강원도 정선에서, 로비의 소나무는 경상북도 울진에서 왔습니다.
침엽수가 집단 고사하는 건 기후 변화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수분이 적정량 공급되지 못하는 데다, 서식지의 기온이 올라갔기 때문이라는
분석입니다. 기후 변화로 적설량과 강우량이 변화하면서 계절별로 필요한 만큼의 수분을 공급받기 어려워지고, ‘수분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겁니다. 폭염, 폭우, 가뭄 등 기후 변화로 인한 극단적인 기상 현상도 침엽수에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원인입니다.
침엽수는 기후 변화에 취약한 종입니다.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자료에 따르면 칩엽수의 멸종 위기율은 34퍼센트로 양서류(41퍼센트), 상어와 가오리류(36퍼센트)에 이어 세 번째로 높습니다. 그런데 침엽수는 전 세계 삼림의 3분의 1을 차지합니다. 활엽수와 달리 겨울에도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내보내는 종이기도 합니다. 생태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생물이 기후 위기 때문에 위험에 처하고 있는 겁니다. 대책을 찾지 않으면 기후 위기가 더 가속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북극곰처럼 상징적인 동물이 멸종 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어 왔지만, 주변 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침엽수가 멸종 위기를 겪고 있다는 사실은 기후 변화가 얼마나 가까이 와 있는지 실감하게 해줍니다.
짓고 부수고, 짓고 부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