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고 패러독스
 

6월 29일 - 데일리 북저널리즘

2025년 민사고가 사라진다. 엘리트 교육엔 어떤 개혁이 필요할까.

©일러스트: 유덕규/북저널리즘
한복 입고 영어로 수업하는 학교, 소규모 토론 수업을 하고 학생이 수업을 선택하는 학교로 잘 알려진 민사고가 2025년 사라집니다. 정부는 2025년부터 외고와 자사고를 일반고로 일괄 전환하기로 했습니다. 교육 불평등 해소를 위해섭니다. 예정대로 정책이 시행된다면 자사고인 민사고도 일반고로 바뀌게 됩니다. 민사고 측은 일반고로 전환되면 기존 교육과정과 설립 취지를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학교를 폐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한때 엘리트 교육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민사고가 존폐 위기에 놓인 겁니다.

엘리트 교육에 본질적인 질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외고와 자사고는 학교에 교육 과정상의 자율권을 갖고 특정 분야에 뛰어난 학생을 선발해 특화된 교육을 제공한다는 취지로 운영돼 왔습니다. 그러나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수단이 되어 고교 서열화와 교육의 불평등을 조장하고 있다는 비판을 직면했습니다. 올해 무상교육으로 전환된 일반고와 달리, 자사고와 특목고는 학부모가 높은 학비를 부담해야 합니다. 민사고의 연 학비는 자사고 중 가장 높은 편입니다. 2840만 원에 달하죠. 이들 학교의 교육이 고소득층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지적이 나온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민사고를 비롯해 자사고와 외고를 없애면 교육 불평등을 개선할 수 있을까요.
 

민사고에서 배우는 것


자사고들은 폐지 정책에 소송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자사고는 5년마다 교육청의 평가를 받아 자사고 지위를 유지할지 결정하는데요, 지난해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지정 취소 처분을 받은 자사고 8곳은 행정소송을 냈습니다. 교육청이 평가 기준을 갑자기 변경하고 소급 적용했다는 겁니다. 자사고 및 외고 폐지 자체에 대한 헌법소원도 제기됐습니다. 수도권 자사고와 외고, 국제고 25곳이 참여했죠. 자사고와 외고 폐지를 위해 정부가 개정한 시행령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주장입니다.

민사고의 한만위 교장은 일반고가 되면 민사고의 교육 방식을 유지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일반고 재정으론 소수 정예 수업과 현재의 교육 과정을 이어갈 수 없다는 거죠. 일반고로 강제 전환되면 차라리 문을 닫겠다는 방침을 세운 이유입니다. 민사고는 자사고로서 연간 2840만 원의 학비를 받습니다. 자사고는 교육과정 운영비 등에 대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재정 지원을 받지 않는 대신 높은 학비를 받는 방식입니다. 민사고는 학비를 많이 받고, 교육비에 다시 많이 썼습니다. 학비는 학부모가 학교에 내는 돈, 교육비는 학교가 학생 교육에 투자하는 돈인데요, 민사고는 자사고 중 교육비에 가장 많은 돈을 투자했습니다. 학비보다 교육비를 더 많이 썼죠. 2018년 기준으로 학생으로부터 받은 학비는 2741만 원, 학생에게 쓴 학비는 2968만 원이었습니다.

민사고의 교육 과정을 들여다보면 비용이 많이 들 만합니다. 민사고는 석·박사 이상 교사 1명당 학생 5~7명의 소규모 수업을 운영 합니다. 수업 방식은 주로 토론식입니다. 사회 과목 수업에서는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결정문을 분석하고 토론하는 식입니다.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 자유주의, 입헌주의 같은 개념들을 이해하게 된다는 거죠. 수업도 학생이 직접 선택해 수강합니다. 대학에서처럼 학생들이 교사의 강의실을 찾아 수업을 듣는 식입니다.

학생들이 직접 과목을 선택해 수강하는 고교학점제는 정부가 추진하는 교육 개혁의 방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미 고교학점제를 시행하고 있던 민사고 등 자사고·외고는 고교학점제의 걸림돌입니다. 고교학점제를 추진하려면 내신에 절대평가를 도입해야 하는데, 그러면 자사고·외고 학생들이 대입 전형에서 현저히 유리해지기 때문이죠. 자사고와 외고 학생들의 유일한 핸디캡이 사라지는 겁니다.

민사고 졸업생들은 토론식 교육을 통해 ‘내 의견’을 갖는 법, 다른 사람의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민사고 학생이 학교의 애국 조회를 비판하는 글을 언론에 기고해 논란이 됐을 때도 “그런 주장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동기들의 의견이 나왔다는 일화도 언급됩니다. 다양성을 통해 창의성을 높이는 질 좋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주장인 셈입니다. 자율형 사립고라는 교육 형태가 등장하고 적극적으로 추진된 것도 ‘다양한 교육과정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였습니다. 학교에 자율성을 줘서 일반고와는 다른 교육 방식을 만들자는 겁니다.
 

다양성의 역설


창의성은 다양성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다양성엔 여러 층위가 있습니다. 의견의 다양성, 교육 과정의 다양성 말고도 경제적 계층과 사회적 배경의 다양성이 있죠. 자사고와 외고가 충족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자사고와 외고에는 일반고와 달리 학생 선발 권한이 있습니다. 지역 단위 혹은 전국 단위로 학생을 선발하죠. 전반적인 성적이 좋거나 특정 과목에 뛰어난 학생을 뽑습니다.

문제는 이때 의도치 않게 경제적으로 상위 계층의 학생들을 선발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들이 더 양질의 사교육을 받아 좋은 성적을 거두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사고와 외고의 학비 자체가 비싸서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집 학생들이 지원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즉, 자사고나 외고에 입학하면 일반고에 비해 경제적 계층이 비슷한 친구들과 공부하게 됩니다. 실제로 자사고와 특목고 학생들의 가구소득 분포를 살펴보면 일반고에 비해 고소득 가구의 비중이 높았습니다. 특목고의 경우 가계 소득이 가장 높은(월 500만 원 이상) 계층인 경우가 절반 이상이었고, 자사고는 41.9퍼센트였습니다. 일반고에선 이 계층에 속하는 학생이 19.2퍼센트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한국사회학》에 실린 연구를 보면, 자사고와 특목고는 계층 효과를 더 크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즉 자사고와 특목고 학생들 내부에서도 경제적 계층이 높을수록 엘리트 대학에 진학할 확률이 높다는 겁니다. 일반고에서는 계층 분위가 1분위 증가하면 엘리트 대학 진학 확률이 1~1.5퍼센트 포인트 증가하는데, 자사고와 특목고에서는 4퍼센트 포인트 증가한다는 겁니다. 입학할 때 이미 계층 효과가 생긴 데다가, 그 안에서도 한번 더 경제적 계층이 높은 학생들에게 유리한 구조가 만들어지는 셈입니다.

자사고와 외고가 당초 취지였던 ‘다양한 교육’을 실질적으론 제대로 이행하고 있지 않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교육 과정에 자율권을 부여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수능이나 대입에 유리한 과목 위주로 교육 과정이 편성돼 있다는 겁니다. ‘고급영어’, ‘고급수학’ 등을 다양한 교육 과정이라고 내세우면서 일반고에는 50퍼센트로 제한돼 있는 국영수 과목 비중을 최대 60퍼센트가 넘게 늘렸다는 지적입니다.
 

양질의 다양한 교육이라는 이상, 대입 경쟁이라는 현실


자사고와 외고가 계층을 재생산하고, 상위 대학 입시에 유리하게 작동하는 시스템이 된 것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외고와 자사고가 표방한 ‘다양한 교육’, ‘양질의 교육’은 지금의 사회구조하에서 의도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득이 더 높은 계층에게 차별화된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기관이자, 대학 입시에 유리한 일종의 특권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외고와 자사고가 사라지면 교육은 더 다양해지고 질이 높아질 수 있을까요? 외고·자사고의 존재와 관계없이 대학 입시를 위한 치열한 경쟁은 실존합니다. 현재 구조에선 그나마 외고와 자사고가 일반고와 다른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각에서 외고와 자사고를 없애면 강남 등 ‘학군 좋은’ 지역 고등학교들에 들어가려는 경쟁이 더 치열해지고 공교육은 더 무력해질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결국 진짜 문제는 학벌을 기준으로 양질의 일자리와 같은 주요 자원이 분배되기 때문에 생겨난 치열한 대입 경쟁이라는 현실과, 양질의 다양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이상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입니다. 교육부는 자사고와 외고 폐지 이후 일반고에도 고교학점제를 도입해 양질의 다양한 교육을 모두가 누리게 하겠다는 입장입니다. 특목고 수준의 심화 수업도 선택할 수 있게 하겠다는 계획입니다. 이것 역시 치열한 대입 경쟁이라는 현실에서는 어떻게 작동할 수 있을지 논의해야 하는 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고와 자사고가 추구했던 이상이 실패한 과정을 반복해선 안 되겠죠.

오늘 데일리 북저널리즘에선 사라지는 민사고와 엘리트 교육의 개혁 방안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읽으시면서 들었던 생각을 댓글로 남겨 주세요. 서로 다른 의견을 말하고 토론하면서 사고의 폭을 확장해 가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댓글이 북저널리즘의 콘텐츠를 완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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