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수는 카카오를 다음 다음 다음 단계로 바로 퀀텀 점프 단축시킬 묘수가 필요했습니다. 그게 다음이었습니다. 2014년 10월에 카카오는 다음을 인수합병합니다. 브라이언이 이 선배와 연합해서 만년 2위로 내려앉게 만든 그 다음 말입니다. 당시 카카오와 다음을 합친 시가총액은 7조 8000억 원 정도였습니다. 네이버의 시가총액은 25조 원이었죠. 이쯤되면 2021년 6월 라이언이 브라운을 추월한게 얼마나 대단한 역전극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네이버한테 고배를 마셨던 두 명의 패자가 하나가 돼서 마침내 승리한 겁니다. 2000년대 이후 대한민국 IT 역사가 총망라돼 있는 대역전극인 거죠.
2014년 당시 포털사이트 다음 인수를 통해 김범수가 노리는건 역시나 네이버의 포털 시장이라는 분석이 많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브라이언한테 포털은 온라인 시대의 유물이었습니다. 모바일 시대엔 전혀 다른 전선들이 생겨날 거라고 봤습니다. 카카오가 앞으로의 미래 전쟁에 대비하려면 대규모 개발 병력이 필요했습니다. 카카오가 다음을 인수한 진짜 목적은 다음의 숙련된 개발 인력을 한꺼번에 확보하는 데 있었습니다. 실제로 카카오는 다음 인후 이후에 무서울 정도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 나갑니다. 커머스, 핀테크, 모빌리티, 콘텐츠 분야로 전선을 확대하죠.
이때의 뒷얘기도 많습니다. 당시 카카오한테 엔지니어가 아닌 다음 인력들은 솔직히 핵심 인재는 아니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그런데 합병 이후에도 끝까지 살아남아서 카카오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다음 출신 인재가 있습니다. 카카오뱅크의
윤호영 대표입니다. 다음 다이렉트 출신의 금융맨이죠. 인터넷전문은행인 카카오뱅크는 카카오 핀테크 전략의 주력입니다. 8월 5일 IPO를 앞두고 있죠. 예상 시가총액은 최대 18조 5289억 원입니다.
다음 개발자 군단을 앞세운 카카오는 전방위적으로 사업 영역을 다각화해 나갑니다. 2021년 6월 현재 카카오의 계열사는 100개가 넘습니다. 국내 대기업 집단 가운데 2위죠. 1위는 SK그룹입니다. 이건 브라이언의 경영 스타일과도 일맥상통합니다. CEO 100인 양성이 경영자로서의 목표라고 말한 적도 있죠. 그래서인지 카카오의 창업과 인수 속도는 거의 세포분열 수준입니다. 카카오 시총이 단시간에 이렇게 빨리 커진 건 100개가 넘는 계열사들의 매출과 영업이익이 고스란히 지주회사인 카카오에 반영되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코로나로 인해 언택트 시장이 만개하면서 플랫폼 기업들의 매출이 커졌기 때문도 있죠. 게다가 2021년 들어선 계열사의 상장 기대감으로 주가가 부풀려지고 있고요. 카카오뱅크는 한때 장외시장에서 40조 원 벨류로 평가받은 적도 있습니다. 페이 서비스를 하는 또 다른 핀테크 계열사 카카오페이는 15조 대어로 통하죠. 웹툰 서비스를 하는 카카오페이지는 7조 원 안팎으로 평가받습니다.
한국 재계엔 시대마다 숙명의 라이벌들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으로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과 현대그룹의 창업주 정주영이 있죠. 삼성전자의 이건희 회장과 LG전자의 구본무 회장도 있습니다. 이병철 회장이 꼼꼼한 내실형 경영자라면 정주영 회장은 호방한 확장형 경영자죠. 이걸 네이버의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와 카카오의 김범수 이사회 의장으로 옮겨볼 수 있습니다. 김범수는 전형적인 확장형 경영자입니다. 이해진은 전형적인 내실형 경영자죠. 이들의 전혀 다른 경영 스타일은 카카오와 네이버의 기업 구조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카카오의 계열사가 세포분열을 하는 동안에 네이버는 오히려 계열사 숫자가 감소했습니다. 2017년에 75개였던 계열사 수가 2020년엔 오히려 47개로 줄어들었죠. 여기서 숫자의 행간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브라이언이 자회사 만들어서 대표를 맡긴 다음 권한을 주는 임파워먼트 경영자이고 이해진 선배는 서비스 말단까지 직접 챙기는 디테일 경영자여서 일어난 차이입니다. 김범수와 이해진의 캐릭터 차이가 카카오와 네이버의 외형을 결정한 거죠. 김범수 의장은 2015년엔 당시 35세였던 임지훈 대표를 CEO로 선임한 적도 있습니다. 파격이었죠. 브라이언이 어떤 경영을 추구하는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사례죠.
또 다른 변수도 고려해야만 합니다. 네이버는 2000년대부터 국내 시장에서 지배적 사업자였습니다. 2010년대로 접어들면서 다양한 규제와 견제를 받았죠. 네이버 골목 상권 침해 논란이나 포털 사이트 언론 독점 논란이 대표적입니다. 국회의원들은 국정감사 때마다 이해진 의장을 국감장에 세우지 못해서 안달이었죠. 이해진 GIO가 국내 시장보다 해외 시장에 더 집중했던 건 글로벌 진출에 대한 개인적 야망도 컸지만 이런 배경도 있습니다. 덕분에 네이버는 오히려 국내 계열사 숫자는 줄였죠. 네이버에 대한 규제는 카카오한텐 기회였습니다.
카카오가 카카오뱅크와 카카오페이를 앞세워 핀테크 시장에서 네이버를 앞설 수 있었던 건 그런 기회를 잘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라이벌이 장애물을 만났을 때 찬스를 놓치지 않은 거죠. 바꿔 말하면 이제 시총에서 네이버를 앞선 카카오도 네이버만큼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받을 거란 뜻입니다. 네이버가 2010년대에 겪은 규제와 견제를 카카오는 2020년대에 겪을 공산이 큽니다. 더군다나 2020년대는 ESG경영이 강조되는 시대니까요.
동시에 두 회사 모두 효율성을 높이려다 인간성을 잃어버리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관련해선 북저널리즘도 《
지금 판교는》에서 짚었습니다. 이해진 GIO는 지난 6월 30일 전사 직원에게 보낸 메일을 통해 " “이번 일의 가장 큰 책임은 이 회사를 창업한 저와 경영진에게 있다”고
인정했죠. 사회적 책임과 회사적 책임이 모두 요구되는 시기입니다.
이런 역사적 경험 차이는 네이버 주가가 카카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숨은 원인으로 이어집니다. 카카오는 잘 나가는 사업 영역을 분사해둬서 잘 나가는 티를 냅니다. 네이버는 잘 나가는데도 네이버 안에 숨겨서 티를 덜 냅니다. 임파워먼트 경영의 브라이언과 디테일 경영의 이 선배가 만들어내는 차이입니다. 규제와 견제라는 비포장도로를 달려본 네이버와 아직은 주로 포장도로만 질주해온 카카오의 기업문화가 만들어내는 차이점입니다.
추수하는 카카오, 파종하는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