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적 마찰
 

7월 둘째 주 프라임 레터

안녕하세요. 북저널리즘 CCO 신기주입니다. 

파괴적 혁신. 구창선 하버드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좌교수가 남긴 말이죠. 구창선은 고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의 한국 이름입니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제프 베조스도 스티브 잡스도 한 수 접고 들어갔던 경영구루입니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한국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1970년대 초엔 부산에서 선교 활동을 했었죠. 당시에 이름을 발음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스스로 구창선이라는 한국명을 지었습니다. 구교수는 파괴적 혁신 이론으로 유명합니다. 혁신적인 진입기업이 어떻게 기존기업이 선점해온 시장을 파괴하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했죠. 

파괴적 혁신 이론은 경영학계에선 혁신의 현상을 설명한 것이었지만 경영현장에선 혁신의 방법을 보여준 메뉴얼로 읽혔습니다. 자원은 없지만 혁신적인 스타트업이 시장을 지배해온 대기업을 상대로 어떻게 다윗과 골리앗의 구도를 만들 수 있는지를 가르쳐줬기 때문이죠. 구창선 교수가 한국을 사랑했던건 개인적인 인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한국이 글로벌 경제에서 파괴적 혁신에 성공한 예외적인 나라였기 때문이었죠. 

지금도 매일 시장에선 새로운 다윗과 골리앗의 파괴적 혁신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달라진 것도 있습니다. 지금의 다윗은 맨 주먹 하나로 돌팔매질이나 하는 언더독 소년이 아닙니다. 빵빵한 VC 자금으로 무장하고 있죠. 혁신스타트업이라는 이미지로 MZ세대 소비자들의 응원까지 받고 있습니다. 지금의 골리앗도 덩치 하나만 믿고 자기 시장이 잠식당하는 줄도 모르는 근육맨이 아닙니다. 오히려 크리스텐슨 교수의 파괴적 혁신 이론을 철저하게 공부한 상태죠. 파괴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단 말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의 어디부터 노릴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파괴적 혁신의 양상이 더욱 교묘하고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지난 주 북저널리즘이 다룬 〈플랫폼 라이벌리즘〉은 골리앗과 골리앗의 싸움을 그립니다. 카카오와 네이버는 코스피 시가총액 3위와 4위죠. 두 회사 모두 다윗에서 골리앗이 되는 파괴적 혁신의 과정을 거쳐서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카카오도 네이버도 다윗에서 골리앗이 된 뒤엔 자신들이 파괴한 골리앗들을 반면교사로 삼았습니다. 한 마디로 똑똑한 골리앗이 된 겁니다. 결국 새로운 다윗들은 스마트 골리앗들한테 인수당하거나 격침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모든 파괴적 혁신 기업이 성공하는 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기존기업이 진입기업을 인수하는 것으로 파괴적 혁신을 포획할 수 있단 예언이었죠. 카카오와 네이버는 크리스텐슨 교수의 예언을 정확하게 실현해냈습니다. 

이번 주 북저널리즘이 다룬 〈직방이 직방할까?!〉는 파괴적 혁신의 또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직방은 진입기업으로서 부동산 시장의 외곽부터 건드렸습니다. 부동산은 공급자와 중개자가 매매 정보를 독점하는 전형적인 비대칭 시장입니다. 직방은 디지털을 통한 정보 습득엔 능숙한 반면에 기존 부동산 시장에선 소외돼온 MZ세대 부동산 소비자들부터 겨냥했습니다. 결과는 파괴적 성공이었죠. 문제는 존속기업들도 이젠 변화에 예민해졌다는 사실입니다. 부동산 시장의 존손기업은 라이센스를 가진 부동산중개업자들입니다. 이미 직방 불매 운동까지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런 파괴적 마찰은 타다과 택시업계의 마찰에서 이미 목격한 현상입니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파괴적 혁신이 일어나는 동안에도 존속기업들은 변화에 둔감해서 주변시장을 진입기업한테 쉽게 내준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젠 정반대인겁니다. 파괴적 혁신 이론이 혁신의 매뉴얼이면서 동시에 반혁신의 매뉴얼로도 작동하고 있는겁니다. 덕분에 파괴하려는 자와 파괴당하지 않으려는 자 사이의 파괴적 마찰은 점점 커져만 갑니다.

크리스텐슨 교수가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파괴적 혁신 이론을 발표한지도 26년이 지났습니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2020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람은 떠났지만 그가 남긴 파괴적 혁신 이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세상 모든 게 파괴돼도 파괴적 혁신 이론만큼은 쉽게 파괴할 수 없는 지식인가 봅니다. 지금, 우리 사회 이곳 저곳에서 파괴적 혁신의 마찰음과 파괴적 마찰의 파열음이 아우성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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