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최종적으로 방일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어제 7월 19일이었죠.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이 도쿄 올림픽 계기 방일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도쿄 올림픽에 때맞춘 문 대통령의 방일은 한일 양국 모두 한일 관계의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보고 상당히 공을 들인 외교 이벤트였습니다. 《요미우리 신문》은 7월 19일자 보도에서 한일 양국 정부가 도쿄 올림픽 개막일인 7월 23일에 대면 정상 회담을 진행하기로 했다고 특종 보도했었죠. 결국 오보가 됐습니다. 요미우리는 한 달 전 한일 양국 정부가 정상 회담 조율에 들어갔다는 맨 처음 알린 일본 유력지입니다. 일본 정부가 자국 내 유력지를 통해 한일 정상 회담 정보를 흘렸다는 건 그만큼 일본도 이번 정상 회담을 성사시키려는 의지가 컸다는 방증입니다.
이건 사실 올림픽과 한일 정상 회담을 둘러싼 일본의 셈법이 복잡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가까운 나라인 한국에서조차 국가 정상이 방문하지 않는다면, 일본의 방역 상황에 대한 불신은 더 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이런 속사정을 잘 아는 탓에 양국 외교는 밀당을 계속했습니다. 스가 총리는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다면 정중히 맞을 것”이라고 표현했죠. 문재인 대통령은 ‘한일 간의 3대 현안’에 대한 총괄 합의가 있어야 방일한다는 입장을
내비쳤습니다. 협상에 유리한 조건이 갖춰진 만큼 파격적인 딜을 제시한 것입니다.
물론 일본 측에서 이를 흔쾌히 받아들일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외교부 고위 관계자는 일본에 협상 가능성을 열어주면서도 부드러운 압박을 이어갔습니다. 한국 정부 역시 한일 정상 회담에 대한 의지가 있었으니까요. “한일 간 3대 현안 중 적어도 하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야” 올림픽에 참석한다며, 일단 협상 논의의 시작 단계라도 이루어지면 참가하겠다는 다소 온건한 입장으로 선회한 것입니다.
한국이 처음부터 참석 불가 입장을 못 박고 강경한 태도만 보였다면 일본 정부는 문재인 대통령의 방일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우리 정부는 해당 논의에 대한 회담 시간을 1시간 이상 보장할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의 교도 통신은 일본 정부 관계자의 말을 빌려, “문재인 대통령 방일 시에도 각국 정상을 접견할 때와 같이 15분을 할애하겠다”라고 보도하여 양국의 긴장감은 팽팽했습니다.
하지만 양국 정부의 외교적 조율과는 별개로 한일 관계를 악화시키는 악재가 꼬리를 물었습니다. 지난 7월 12일에는, 일본의 《2021 방위백서》에 독도의 영유권이 다시금 주장되며 우리 외교부가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정타는 따로 있었죠. 일본 대사관 총괄공사 소마 히로히사는 지난 7월 15일에 주한 일본 대사관에서 열린 한국 언론과의 오찬에서 “일본 정부는 한국이 생각하는 것만큼 두 나라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면서, 뒤이어 문재인 대통령을 대상으로 성적 농담을 곁들여 한일 외교 정상화 의지를 폄훼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즉각 이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죠.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요미우리 신문》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의 방일이 23일에 성사될 것으로 보도하였지만, 청와대는 "정해진 것은 아직 없다"며 소마 총괄공사에 대한 경질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19일,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은 방일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고 23일 한일 정상 회담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BATNA‘라고 하죠. 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ed Agreement. 협상을 포기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을 의미합니다. 강력한 BATNA를 갖출수록 협상력은 강해집니다. 우리 정부가 문재인 대통령 방일을 둘러싼 신경전에서 협상을 제시하며 일본 측에 다소 무리한 제안을 하기도, 유화적인 입장을 펴기도 했던 것은, 이 사안에 대해 한국의 협상력이 상대적 우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의 BATNA는, 문재인 대통령이 방일을 하지 않지만, 문재인 정부 임기 말까지 한일 관계가 악화일로를 걸을 것을 감수하는 것이었죠. 반면 일본의 BATNA는 문재인 정부에 기존보다 강경한 자세를 보임으로써, 기존 자민당의 대외 노선을 공고히 하고, 그 대신 각국 정상의 참여가 더욱 적은 실패한 올림픽으로 기록되는 것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우리 외교부가 과거사 협상 카드를 꺼내든 배경엔, 이미 이 줄다리기에서 한국이 일본보다 더 나은 대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일 정상 회담 무산은 스가 정부보단 문재인 정부한테 유리한 결과입니다. 심지어 소노 망언은 문재인 정부가 방일을 하지 않는 결정을 하는 걸 더욱 쉽게 해줬죠. 정치와 외교에 있어 최고는, 힘을 쓰지 않으면서 힘을 쓰는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다시 한 번 일본 정부에 정치적 타격을 입혔습니다.
올림픽 취소는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