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리그
 

7월 넷째 주 프라임 레터

안녕하세요. 북저널리즘 CCO 신기주입니다. 

“형.” 2성 장군은 4성 장군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한국군 계급 체계에서 2성 장군은 사단장급입니다. 4성 장군은 참모총장이나 합참의장급이죠. 물론 사석이었습니다. 저녁 술자리였죠. 총장과 장군은 호형호제했습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계룡대에서 군 복무를 할 때 직접 목격한 일화입니다. 이 정도는 물론 군사 기밀도 아닙니다만 군사 기밀이라고 해도 기밀 해제가 되고도 남을 만큼 적잖은 시간이 지난 이야기입니다.

계룡대는 육해군 참모본부가 모두 집결된 한국군의 펜타곤입니다. 그야말로 별이 쏟아지는 곳이죠. 육군 참모본부에서 4성 장군은 참모총장입니다. 2성 장군은 참모총장의 막료인 부장이나 단장을 맡죠. 작전부장이나 공병 단장 같은 보직입니다. 2성 장군은 야전에선 사단장으로 부대를 지휘하지만 육군 참모본부에선 총장의 지휘를 받는 수하입니다. 그래서 일반 병사들 눈엔 낯설 수밖에 없는 풍경들이 종종 펼쳐집니다. 포스타가 투스타한테 야자를 한다거나 원스타가 포스타한테 형이라고 하는 모습들이죠. 사석에서의 모습들은 60만 대군을 움직이는 사령관들이라기보단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동네 형동생 같은 인상마저 줍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실제로 장군들은 육군사관학교 선후배 사이인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고 권위가 생겼고 계급이 있어도 군 수뇌부들 사이엔 함께 군대 짬밥을 먹고 지내온 사이라는 패밀리 의식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20대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면 연대 의식은 더욱 공고할 수밖에 없죠. 유사시 나의 목숨을 너에게 맡겨야만 하는 사이라면 계급장 떼고 이야기하는 관계를 맺는 게 필요한 부분도 있습니다. 상관으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신뢰할 수 있어야만 하니까요.

그렇게 한번 맺어진 라뽀는 평생을 갈 수도 있습니다. 해병대 전우회가 대표적인 사례죠. 대한민국 육해공군을 지휘하는 장군들의 관계도 해병대 전우회와 정서적으론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젊은 시절에 처음 만나 조국에 평생을 바치며 전우애로 똘똘 뭉친 사이들이란 말입니다. 장군들은 같은 학교를 나왔고 같은 직업을 택했고 비슷한 경로를 거쳐서 별을 따는 데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내부 진급 경쟁을 벌일 때만 빼면 그들은 같은 경험과 같은 의견과 같은 판단을 공유합니다. 군 지휘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순혈 집단인 겁니다.

순혈주의 집단은 반드시 내파됩니다. 밖으론 일사불란해 보일지 몰라도 안으론 문제가 쌓이고 곯고 썩다가 끝내 붕괴합니다. 작은 외부 충격만으로도 와르르 무너지죠. GE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경영의 대가 잭 웰치가 이끌던 1990년대의 제너럴 일렉트릭은 글로벌 가전 시장을 주름잡았습니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GE의 몰락이 시작됐습니다.

원인은 순혈주의였습니다. 잭 웰치의 후임자들은 모두가 GE에서만 평생을 보낸 GE맨들이었습니다. GE에는 GE맨들을 양성하는 내부 교육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군대의 사관학교처럼 경영 사관학교가 있죠. GE의 승진 경쟁은 치열하기로 악명이 높습니다. GE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평생을 GE에서 일하다가 직장인의 별이라는 임원을 달 때쯤 되면 완벽한 순혈주의자가 돼 있기 마련입니다. 뼛속까지 GE적으로 사고하며 GE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사람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 돼버리는 거죠.

GE의 순혈주의적 지휘부는 GE를 침몰시켰습니다. 순혈 조직에선 내부 비판과 문제 제기가 원천 봉쇄됩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내부 구성원 모두가 혐오하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면 조직 부적응자로 간주됩니다. 승진 누락 같은 개인적 불이익으로 이어지기에 십상입니다. 결국 순혈 조직엔 갈수록 순혈주의자만 남게 됩니다. 모두가 똑같이 생각하며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는 조직이 되죠. 

오히려 성공 극장만 만연합니다. 자신들의 잘못된 방식이 옳다고 확신하고 그걸 서로가 서로한테 자랑하면서 상호 인증해주는 개그 콘서트가 펼쳐지는 겁니다. GE는 그러다 내파됐습니다. GE는 2018년 6월 다우존스지수에서 퇴출당했습니다. GE는 다우지수가 처음 생긴 1896년부터 122년 동안 다우존스의 멤버였습니다. 발명왕 에디슨이 세운 회사를 자랑왕 순혈주의자들이 망친 겁니다. 

GE에서 일어났던 일이 우리나라 군대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주 북저널리즘은, 데일리 〈군대를 바꿔라〉에서 청해부대 문무대왕함의 코로나 회군을 집중 분석했습니다. 이현구 에디터는 문무대왕함의 회군이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라고 정리합니다. 원인은 순혈주의적인 군 리더쉽에 있다는 말이죠. 군사 기밀 해제가 되고도 남을 만큼 시간이 지난 경험입니다만 이현구 에디터의 지적은 옳습니다. 문무대왕함에서 드러난 군 지휘부의 무능함은 내부에서 어느 누구도 지휘부의 무능을 지적할 수 없어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대한민국 최정예 부대인 청해부대의 지휘관은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 군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아무리 엘리트 집단이어도 다양성이 배제된 순혈 집단은 결코 유연하고 개방적인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저널리스트로 꼽히는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쓴 《최고의 인재들》이라는 명저가 있습니다. 케네디 행정부의 최고 엘리트들이 어떻게 베트남 전쟁이라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는가를 기록하고 분석한 책입니다. 저널리즘의 전문성을 보여주는 최고의 콘텐츠죠. 《최고의 인재들》의 부제는 이렇습니다. 왜 미국 최고의 브레인들은 베트남전이라는 최악의 오류를 범했는가. 

답은 간명합니다. 순혈주의 때문입니다. 강철 부대 중 하나인 UDT까지 편제된 청해부대의 최고의 지휘관들도 아마 최고의 인재들이었겠지만 결국 코로나 방치라는 최악의 오판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병사들의 주적은 북한이 아니라 간부라는 말이 있다.” 이현구 에디터의 아티클을 읽고 노대영 독자님이 보내주신 댓글입니다. 군이 선진화를 부르짖은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닙니다. 공염불에 그치고 있는 건 병사들이 아니라 간부들이 바뀌지 않아서입니다. 여전히 끼리끼리 사이언스만 연구하고 있어서입니다. 

군은 코로나 회군이라는 참패를 당하고도 여전히 오아시스 작전 운운하고 있습니다. 파병 부대원들을 군 수송기로 긴급 호송해온걸 자랑하고 있죠. 이런 게 전형적인 성공 극장입니다. 대국민 개그 콘서트가 따로 없죠. 이쯤 되면 공수 부대가 아니라 개그 부대입니다. 

순혈 조직은 망한다. 민간에선 진작부터 깨달은 진리입니다. 한국에서 혼혈주의를 기업 조직에 맨 먼저 도입한 대표적인 경영자가 이건희 회장입니다. 2000년대 이후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퀀텀 점프를 할 수 있었던 데는 유능한 여성 임직원들의 역할이 지대했습니다. 남성 중심 적이었던 삼성그룹은 이건희 회장을 거치면서 여성 파워가 강한 기업으로 거듭났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맨이라는 순혈주의도 타파했습니다. 공채 출신 대신에 외부 인재들을 경영진으로 발탁했죠.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진대제 전 삼성전자 대표도 IBM 출신으로 이건희 회장이 발탁한 외부 인재입니다. 이제 민간 기업들에게 혼혈주의는 생존을 위해선 필수입니다. 요즘은 보수적으로 정평이 나 있는 롯데그룹조차도 여성 인재와 외부 인재 발탁에 나서고 있죠. 롯데그룹은 알짜 핵심 계열사인 롯데칠성음료의 CFO로 여성 인재이면서 외부 인재인 송효진 상무를 선임했습니다. 최고재무책임자는 C레벨 중에서도 순혈주의 장벽이 가장 높은 요직입니다. 조직 내부의 다양성 지수를 높여야 리스크 대응과 이노베이션 경영이 가능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시장엔 이제 없습니다. 군대만 모릅니다. 

기업이 망하면 주주만 망합니다. 군대가 망하면 국민이 망합니다. 기업은 망해도 되지만 군대는 망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군이 이렇게 자꾸 내파되면 전쟁 억제력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국가 기능에서 군의 역할은 국방력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징병제 국가에서 군은 일정한 교육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손목시계가 보편화한 건 2차 대전 때문입니다. 장병들이 모두 같은 시각에 같은 작전을 수행하도록 군이 시계를 보급해줬죠. 군에서 시계를 보고 시각을 맞추는 습관을 얻은 사람들은 사회에서도 자연스럽게 서로 시간을 맞췄습니다. 그렇게 사회에서도 시간 엄수가 보편화됐죠.  

이렇게 군대와 사회가 가지는 상관관계는 한둘이 아닙니다. 사회가 군대보다 월등히 진보하면서 군의 존재감은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사라진 건 아닙니다. 군대에서의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장병 개개인의 사회생활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선 군에 관해 논의하는 것조차도 시대착오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입니다. 군대는 단어부터가 낡은 용어로 치부되죠. 사회적 손실입니다. 이렇게 우리 군에 대한 불편한 인식이 사회 전반에 쌓이다 보면 결국 군사력의 쇠퇴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군대는 결코 강군이 될 수 없으니까요. 강군을 갖지 못한 국가는 결국 강국이 될 수 없습니다. 악순환이죠. 

북저널리즘은 지난 6월 11일 자 데일리 〈군은 가해자부터 지켰다〉에서도 성추행 피해자인 공군 중사를 자살로 몰고 간 군의 조직 문화를 비판했습니다. 원인을 분석하면 역시 문제는 군의 순혈주의입니다. 남성 중심적인 군대의 순혈주의 문화가 민간 사회보다 훨씬 저능한 성인지 감수성을 방치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순혈주의는 이런 성범죄 앞에선 자칫 조직 전체를 공범으로 연루시킬 수도 있습니다. 순혈주의가 자행할 수 있는 최악의 범죄 행위죠. 

이렇게 잘못된 걸 아무도 잘못됐다고 인지하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군의 순혈주의는 결과적으로 사회 전반에 악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일반 병사든 직업 군인이든 누구나 결국엔 전역하니까요. 순혈주의 사고에 피폭된 인재들이 우리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겁니다. 군대 문제가 군대 문제로만 그치지 않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이제 군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학연과 지연 그리고 성별과 종교 등에서 군조직의 다양성을 높여나가야 합니다. 민간에선 20세기부터 시작된 변화입니다. 특히 지휘부의 성비부터 다양해져야 합니다. 그렇게 순혈 군대에서 혼혈 군대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결국 지금 우리 군의 가장 큰 주적은 우리 군이란 말입니다. 외부의 적에게 패배하면 다시 반격할 수 있습니다. 내부의 적에게 패배하면 다시 일어설 수 없습니다. 외침보다 내파가 더 무서운 까닭입니다. 지금은 21세기입니다. 21세기도 20년이 넘게 지났습니다. 우리 군의 시간은 아직도 20세기입니다. 국방부 시계는 언제쯤이나 2021년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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