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목표와 정책 비전은 비슷해 보이지만 구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정책의 문제의식과 철학의 차이라고 볼 수 있죠. 기본소득의 원류는 16세기 토머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때는 르네상스가 태동할 때이고, 다소 철학적 논의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현재의 기본소득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생각은 1975년에 토머스 페인이 쓴 《토지정의(Agrarian Justice)》에서 나타났습니다.
이 책에서 괄목할만한 점은, 토지를 단독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그 자체로 사회에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페인은 이를 ‘지대(Land rent)’라고 표현했습니다. 땅을 빌려 쓰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지대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여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분배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토지가 발생시키는 ‘불로소득’의 개념을 만든 것이죠.
무언가 떠오르지 않았나요? 바로 이 지사가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탄소세와 함께 강조한 국토보유세와 유사합니다. 토머스 페인은 땅이 없는 자들은 사유제의 희생양이라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독립적인 생존을 담보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죠. 미국 사회 보장국(SSA)는 그를 기본소득/시민배당을 제안한 미국인의 시초로 봅니다.
[2]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1920년대에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전쟁으로 피폐해진 빈곤층을 위한 다양한 생각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 중 ‘
찻주전자 비유’로 유명한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은 당대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는데, 그 역시도 1918년 출간한 저서《자유로 가는 길(Proposed Road to Freedom)》에서 무상 교육이나 기본소득과 같은 이상주의적 견해를 제시했습니다.
한편 기본소득 논의에서 가장 유명한 밀턴 프리드먼은 그 유명한 ‘
음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를 제안했습니다. 그가 제안한 내용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오 시장의 안심소득과 대부분이 일치합니다. 밀턴 프리드먼이 기본소득의 창시자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의 생각은 이 지사보다는 오 시장의 것과 유사합니다. 즉, 한국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각종 기본소득에 대한 생각들을 볼 때는, 정책 철학을 살펴봐야 합니다. 프리드먼은 사회 보장 제도를 받아들이는 신자유주의를 견지한 인물이며, 그에게는 이 지사가 주장하는 ’생산성은 낮지만 삶의 만족도가 높은 일자리‘는 고려 대상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안심소득의 정책 비전은 어디까지나 신자유주의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공정한 출발선에 설 수 있도록, 교육 격차와 소득 격차를 공격적으로 해결하여 경쟁의 장에 나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반면, 기본소득의 정책 비전은 패러다임의 전환에 가깝습니다. 철학적 배경은 버트런드 러셀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In Praise of Idleness)》을 간단히 언급하자면, 이 책에서는 인간의 삶의 의미를 조명하며, 인간은 노동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냐 반문합니다. 러셀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생계유지 활동으로서의 노동이 아닌 여가라고 주장하며, 이러한 여가가 곧 자신의 직업이 되어 가치 있는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나치게 자본에 예속되어 살지 않은 것을 권장하죠.
아주 최소한의 생계만이라도 유지 된다면 삶의 만족도가 오르며 가치 있는 노동을 창출하지 않겠냐는 것이 러셀의 아이디어이자, 이 지사의 청사진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는 최근 핀란드에서 일어난 실험의 결과와도 이어집니다. 헤이키 히일라모 교수는 청년 장기 실업자 10만 명 중 2000명을 선정하여, 기존에 취업 교육 이수 및 상시 보고가 필수였던 실업 부조 75만 원을, 말 그대로 채찍 없이 자율 사용하게 했습니다.
이 ‘당근 그룹’에서 히일라모 교수는 내심 사람들이 그래도 유급 노동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결과는 반대였죠. 오히려 무급 노동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자녀와 시간을 보내고, 지역 커뮤니티에서 봉사 활동도 하는 등, 생산성은 없지만 가치 있는 노동이죠. 이들은 삶의 질이 올라가고 만족도가 높았다고 합니다. 물론 만족도가 상대적으로 올라갔는지 여부는 실험 이전의 대조군이 없어 입증이 되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결론적으로, 기본소득과 안심소득의 정책은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그 이면의 정책 비전은 크게 다를 수 있음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본소득은 기본철학의 차이
결국 기본소득과 안심소득의 논쟁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어떻게 진단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경제학의 커다란 두 물줄기인 케인즈 학파와 시카고 학파의 차이처럼 말이죠. 소득의 양극화가 나타나더라도, 이 것을 애초에 ‘해결해야 할 것’으로 인식하는 것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정책 구상의 출발선부터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소득과 안심소득 두 정책 가운데 단순히 어떤 것이 더 우월한 복지인지에 대한 논의하는 것은 소모적일 수 있습니다. 격변하는 시기에 미래를 어떻게 설계할지를 놓고 벌이는 치열한 경제 정책 논쟁이기 때문입니다. 정파적이고 소모적인 논쟁을 하기 전에 각자 어떤 청사진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3차 산업 혁명이 전세계를 자본주의화시켰듯이 4차 산업 혁명은 전세계 자본주의를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가보지 않은 길을 걷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해보지 않은 정책이라도 먼저 국민적 논의를 시작하는 쪽이 유리합니다. 그것이 미래를 대비하는 기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