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산업은 크게 제조업용 로봇과 전문 서비스, 개인 서비스를 위한 서비스용 로봇으로 나뉩니다. 페퍼는 이 가운데 개인 서비스를 위한 로봇으로, 본래 시판 초기에는 개별 가정이 주요 타깃이었습니다. 마치 반려동물처럼 주인과 감정을 나누는 새로운 가족 구성원으로 자리 잡도록 하는 게 목표였죠. 이를 위해 IBM의 인공지능 시스템 ‘왓슨(Watson)’과 시각, 청각, 촉각 센서 등을 적용해 사람과 대화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당시에 특히 획기적이라고 평가받은 건 소프트뱅크 자체 클라우드의 ‘감정 생성 엔진’과 연동한
지점입니다. 수천 대의 각기 다른 페퍼가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며 데이터를 축적하고 이를 공유해 빠르게 학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페퍼는 기존 의사소통 패턴을 기억해 적재적소에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춤을 추거나 웃긴 제스처를 취하는 등 특정 행동을 보였을 때 사용자가 기뻐하면 다음엔 이 행동을 더 자주 반복하는 식입니다.
다만 가정집을 주요 배경으로 했던 초창기 광고처럼 실생활에서 페퍼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우선 배터리 효율 차원에서 이족 보행이 아닌 바퀴로 움직이는 방식을 택한 터라 계단이나 높은 문턱 등을 넘지 못하는 등 이동에 제약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페퍼의 감정 발달 수준이 과연 매달 내는 사용료의 값어치에 상응하는지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가족이라면 얼굴을 알아보는 게 기본인데 센서 수리를 마친 뒤 돌아온 페퍼가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했다며 넋두리한 사용자도 있었습니다.
일터로 나온 페퍼
페퍼는 집 밖을 나서 각종 서비스 산업 현장에도 투입됐습니다. 사실 상용화 전인 2014년 일본 네슬레는 이미 그해 12월 페퍼를 고용해 전국 70여 곳의 네스카페 매장에 배치하고 고객을 응대하도록
했습니다. 진심 어린 마음으로 손님을 극진하게 대접한다는 ‘오모테나시’ 정신으로 무장한 일본에서 나타난 첫 시도였습니다. 2016년 업무용 페퍼가 공식 서비스된 이후 식당, 의류 매장, 자동차 대리점, 은행, 병원 등 각종 회사와 상점으로 진출한 페퍼는 1만 대가
넘었습니다.
해외 진출도 했습니다. 미국과 유럽,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2017년 처음으로 기업 차원의 시범 운영이 시작됐습니다. LG유플러스, 롯데백화점, 이마트, 우리은행, CGV, 교보문고, 길병원 등 7개 기업 현장에 페퍼가
파견됐습니다. 2018년도에는 영국 의회로도 출근해 로봇 최초로 연설을 했습니다. 4차 산업혁명 과정에서 인간의 역할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소프트웨어 기술은 로봇이 인간을 대신할 수 없다”고 답하기도
했죠.
비슷한 시기 페퍼 같은 로봇의 등장으로 인한 일자리 감소가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당장 페퍼만 해도 5만 5000엔(약 55만 원)이라는 저렴한 월급(한 달 대여 비용)이 가장 큰 강점이었는데, 굳이 더 많은 돈을 주고 로봇보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사람을 고용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였죠. OECD는 2019년 〈노동의 미래〉라는 보고서를 내고 향후 15~20년 사이 자동화 로봇이 현존하는 일자리의 14퍼센트를 차지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낙제 수준의 인사 고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