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 로봇

7월 30일 - 데일리 북저널리즘'

소프트뱅크가 기대보다 수요가 낮은 휴머노이드 페퍼의 생산을 중단했다. 로봇은 인간의 서비스 노동을 대체할 수 없다. 아직은.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사진: Unsplash
“회장님, 웃음이 멋지시네요.”
“그래?”
“그런데 정말 웃는 거 맞아요? 눈은 안 웃고 있어요.”
“하하. 눈이 안 웃는다고?(웃음)”
“이제야 진짜 웃네요.”

직원의 날카로운 지적에 멋쩍어하는 어느 회장님 모습이 그려지시나요? 2014년 6월 소프트뱅크 기자회견 자리에서 로봇 ‘페퍼(Pepper)’와 손정의 회장이 주고받은 대화 일부입니다. 키 121센티미터에 몸무게 28킬로그램, 바퀴 두 개로 360도 회전 이동하는 흰색 페퍼가 처음 세상에 공개된 순간이었습니다. 표정과 목소리를 분석해 사람의 감정을 인식하고 이에 맞춰 적절한 말을 건네는 휴머노이드(humanoid, 인간형 로봇)에 전 세계 관심이 쏠렸습니다. #페퍼 기자회견 영상

소프트뱅크는 2015년 6월부터 본격적인 페퍼 상용화에 나섭니다. 온라인으로 주문받아 매월 1000대씩 한정 판매하는 방식이었는데, 출시 이후 6개월간 연속 매진을 기록했습니다. 판매가 1600달러(약 180만 원) 외에 월 사용료 200달러(약 22만 원)를 3년간 납부하는 조건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그야말로 없어서 못 팔 정도의 인기였습니다. 시판 초기 석 달은 판매 개시 1분 만에 품절 사태가 빚어질 정도였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해 휴머노이드의 대명사가 된 페퍼가 최근 그 명성과 달리 점차 설 자리를 잃고 있습니다. 로이터 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이미 지난해부터 페퍼 생산 공장은 가동을 멈춘 상태입니다. 소프트뱅크는 현재 재고 상태인 로봇이 충분해 잠시 생산을 멈췄고 추후 생산을 재개할 예정이라고 밝혔지만,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소프트뱅크 로봇 사업부 재편의 신호탄이라고 해석합니다. 페퍼의 일자리는 왜 사라지고 있을까요?
 

집 안으로 들어온 로봇

평범한 가정을 배경으로 하는 초창기 페퍼 광고 ©소프트뱅크
로봇 산업은 크게 제조업용 로봇과 전문 서비스, 개인 서비스를 위한 서비스용 로봇으로 나뉩니다. 페퍼는 이 가운데 개인 서비스를 위한 로봇으로, 본래 시판 초기에는 개별 가정이 주요 타깃이었습니다. 마치 반려동물처럼 주인과 감정을 나누는 새로운 가족 구성원으로 자리 잡도록 하는 게 목표였죠. 이를 위해 IBM의 인공지능 시스템 ‘왓슨(Watson)’과 시각, 청각, 촉각 센서 등을 적용해 사람과 대화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당시에 특히 획기적이라고 평가받은 건 소프트뱅크 자체 클라우드의 ‘감정 생성 엔진’과 연동한 지점입니다. 수천 대의 각기 다른 페퍼가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며 데이터를 축적하고 이를 공유해 빠르게 학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페퍼는 기존 의사소통 패턴을 기억해 적재적소에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춤을 추거나 웃긴 제스처를 취하는 등 특정 행동을 보였을 때 사용자가 기뻐하면 다음엔 이 행동을 더 자주 반복하는 식입니다.

다만 가정집을 주요 배경으로 했던 초창기 광고처럼 실생활에서 페퍼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우선 배터리 효율 차원에서 이족 보행이 아닌 바퀴로 움직이는 방식을 택한 터라 계단이나 높은 문턱 등을 넘지 못하는 등 이동에 제약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페퍼의 감정 발달 수준이 과연 매달 내는 사용료의 값어치에 상응하는지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가족이라면 얼굴을 알아보는 게 기본인데 센서 수리를 마친 뒤 돌아온 페퍼가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했다며 넋두리한 사용자도 있었습니다.
 

일터로 나온 페퍼


페퍼는 집 밖을 나서 각종 서비스 산업 현장에도 투입됐습니다. 사실 상용화 전인 2014년 일본 네슬레는 이미 그해 12월 페퍼를 고용해 전국 70여 곳의 네스카페 매장에 배치하고 고객을 응대하도록 했습니다. 진심 어린 마음으로 손님을 극진하게 대접한다는 ‘오모테나시’ 정신으로 무장한 일본에서 나타난 첫 시도였습니다. 2016년 업무용 페퍼가 공식 서비스된 이후 식당, 의류 매장, 자동차 대리점, 은행, 병원 등 각종 회사와 상점으로 진출한 페퍼는 1만 대가 넘었습니다.

해외 진출도 했습니다. 미국과 유럽,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2017년 처음으로 기업 차원의 시범 운영이 시작됐습니다. LG유플러스, 롯데백화점, 이마트, 우리은행, CGV, 교보문고, 길병원 등 7개 기업 현장에 페퍼가 파견됐습니다. 2018년도에는 영국 의회로도 출근해 로봇 최초로 연설을 했습니다. 4차 산업혁명 과정에서 인간의 역할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소프트웨어 기술은 로봇이 인간을 대신할 수 없다”고 답하기도 했죠.

비슷한 시기 페퍼 같은 로봇의 등장으로 인한 일자리 감소가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당장 페퍼만 해도 5만 5000엔(약 55만 원)이라는 저렴한 월급(한 달 대여 비용)이 가장 큰 강점이었는데, 굳이 더 많은 돈을 주고 로봇보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사람을 고용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였죠. OECD는 2019년 〈노동의 미래〉라는 보고서를 내고 향후 15~20년 사이 자동화 로봇이 현존하는 일자리의 14퍼센트를 차지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낙제 수준의 인사 고과

이마트에 배치된 페퍼. 도입 초창기에 반짝 관심을 얻었다가 인기가 시들해졌다. ©신세계그룹
불행인지 다행인지 예상치 못한 페퍼의 무능이 드러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페퍼는 아직 한참 더 배워야 한다”는 혹평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습니다. 막상 페퍼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단순한 업무들로 제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2018년 영국의 한 식료품점에 고용된 페퍼는 단 일주일 만에 해고됩니다. “우유가 어디 있냐”는 손님 질문에 “냉장고 코너에 있다”고만 답하고 그나마도 주변 소음이 생기면 엉뚱한 답을 내놨기 때문입니다.

잦은 고장도 문제였습니다. 리튬 이온 배터리, 열 개가 넘는 각종 센서, 10.1인치 터치스크린 등 작은 결함에도 제 기능을 못 하는 첨단 소재로 만들어진 만큼 예측 불허의 현장에 투입되기엔 무리였던 겁니다. 완벽한 서비스 로봇으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사방을 살필 수 있는 센서와 자율주행, 회피 기능이 탑재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일본 장례 업체 니세이 에코는 추모객을 응대하고 불경을 읽는 등 장례식을 보조할 용도로 페퍼를 고용했다가 계속되는 고장에 결국 사용을 포기했습니다.

서비스 로봇 특히 페퍼처럼 사람의 모습을 한 휴머노이드에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사람의 지능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현재로서 이러한 기대 수준을 충족시키기에 기술 수준이 한참 부족한 게 현실입니다. 후루타 타카유키 지바 공과 대학 교수는 “마치 장난감 자동차와 실제 자동차의 차이와 마찬가지”라고 설명했습니다. “사람 닮은 로봇을 만드는 일은 헛되고 불쾌한 결과가 될 것이다. 휴머노이드 로봇을 만들지 말라”던 컴퓨터 과학의 선구자 앨런 튜링의 경고를 새겨들어야 했던 걸까요?
 

페퍼는 계속해서 일할 수 있을까


페퍼의 효용성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완벽하진 않아도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이, 노인, 자폐 아동 등이 모여 있는 시설에서는 여전히 페퍼가 부족한 일손을 대신하며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수요가 산업용 수요보다 지극히 낮다는 겁니다. 낮아진 기업의 수요는 소프트뱅크 로봇 사업부의 적자로 직결됐습니다. 페퍼의 생산 거점이라 할 수 있는 소프트뱅크 로보틱스 유럽은 지난해 3800만 달러(430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지난 3년간의 누적 손실은 1억 1900만 달러(1360억 원)에 달합니다.

최근 소프트뱅크는 과격한 사업 재편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로봇 전문 매체 더 로봇 리포트(The Robot Report)에 따르면 소프트뱅크 로보틱스 유럽이 직원 40퍼센트 감축에 나섰습니다. 또 익명의 내부 제보자 인터뷰를 통해 소프트뱅크가 페퍼로 대표되는 휴머노이드에 대한 투자는 줄이고 자율 바닥 청소 로봇인 ‘휘즈(Whiz)’ 같은 상업용 로봇 개발에 더 집중할 것이라고 보도했습니다. 페퍼에 대한 지식 재산권은 유지하되 대부분의 사업 영역을 아웃소싱으로 전환하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전망에 힘을 싣는 두 가지 힌트가 있습니다. 먼저, 지난 6월 소프트뱅크는 구글로부터 인수했던 보행 로봇 개발 기업 보스턴 다이내믹스 지분 80퍼센트를 현대자동차에 8억 8000만 달러(1조 90억 원)를 받고 넘겼습니다. 이보다 앞선 올 4월에는 노르웨이의 물류 창고용 로봇 기업 오토스도어의 지분 40퍼센트를 28억 달러(3조 2100억 원)에 사들였습니다. 비전펀드를 설립해 쿠팡, 알리바바 등에 투자한 소프트뱅크가 전자상거래 생태계 장악을 위해 인간과 교류하는 로봇 대신 도구로서의 로봇을 택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오늘 데일리 북저널리즘에서는 휴머노이드 페퍼의 운명을 가를 소프트뱅크의 로봇 사업 전략을 살펴봤습니다. 읽으시면서 들었던 생각을 댓글로 남겨 주세요. 서로 다른 의견을 말하고 토론하면서 사고의 폭을 확장해 가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댓글이 북저널리즘의 콘텐츠를 완성합니다.

오늘 데일리 북저널리즘은 《인공지능, 말을 걸다》, 《인공지능 시대의 일》, 《법정에 출석한 인공지능》, 〈야놀자와 미다스손〉, 《오모테나시, 접객의 비밀》 과 함께 읽으시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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