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유리천장을 깰 것인가

8월 18일 - 데일리 북저널리즘

여성 임원 할당제, 겨우 1년의 유예기간이 남았다. 실행율은 여전히 35퍼센트다. 앞으로 1년 안에 한국 기업들은 충분히 변화할 수 있을까.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자산총액 2조 원 이상인 상장 법인의 경우 이사회의 전원을 특정 성의 이사로 구성하지 아니하여야 한다.”

작년 개정된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의 일부입니다. 현재 2년 차의 유예기간을 거치는 중이고요. 내년 8월 5일부터 의무적으로 시행됩니다.

이른바 '여성 임원 할당제'의 실제 적용까지 1년 남은 셈입니다. 그런데 국내 상장 기업들의 1분기 보고서를 살펴보니 실행률이 저조합니다. 지난 8월 5일 여성가족부 발표에 따르면 상장 기업 중 여성 임원 선임 기업, 즉 ‘여성 임원이 한 명이라도 있는 회사’의 비율은 36.3퍼센트(2246개 회사 중 815개)에 그칩니다. 그나마 작년(33.5퍼센트)에 비하면 조금 높아진 수치입니다.

‘전체 임원 중 여성의 비율’을 놓고 보면 더욱더 낮습니다. 올해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유리천장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OECD 평균 여성 임원 비율은 25.6퍼센트입니다. 반면 국내 상장 법인(2246개)의 전체 임원 중 여성 비율은 5.2퍼센트입니다. 5배가량 차이 나는 수치죠. 그나마 한국은 29위를 기록하며 간신히 이코노미스트 리포트에 올랐으니, 다행인 걸까요.

남은 1년 동안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궁금합니다. 1년 뒤엔 여성 임원 선임률이 100퍼센트를 달성할까요? 한국은 ‘유리천장지수가 낮은 선진국’이라는 프레임을 벗게 될까요? 단순히 권고 수준에만 미치던 여성 임원 할당제가, 법적 효력까지 갖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여성 임원 할당제? 양성 고용 평등제?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에는 ‘여성 임원 할당제’가 없습니다. 정부는 '임원 중 여성을 몇 퍼센트 이상 고용하라’라고 명시한 바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특정 성이 이사회를 독점하는 경우, 최소한 한 명의 이성을 포함해 다양성을 확보하자는 것이 해당 법안의 취지입니다. 

반면 해외에서는 문자 그대로 ‘여성 임원 할당제’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여성 임원 할당제를 시행 중인 노르웨이가 선두주자였습니다. 2003년 세계 최초로 임원의 40퍼센트를 여성으로 할당하는 법안을 제정하였고, 이를 불이행할 시 해당 기업의 해산까지 가능하도록 ‘회사법’ 또한 강력히 개정하였죠. 그 결과 2002년 기준 7퍼센트에 머무르던 노르웨이의 여성 임원 비율은 10년 만에 40퍼센트를 달성하였습니다.

후발주자로 스웨덴, 핀란드, 스페인, 프랑스 등 또한 40퍼센트의 여성 임원 할당제를 도입하였습니다. 스페인은 페널티 대신 정부와의 계약우선권을 제공하는 등 법안 준수 기업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식을 택했고,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이사회 규모에 따른 여성 비율을 준수하지 않을 시 벌금을 부과한다는 방침을 발표했죠. 독일의 경우 메르켈 총리는 여성 임원이 적은 것에는 비판적인 반면 할당제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 논란이 됐었는데요. 그러나 작년 11월, 임직원이 2000명 이상인 기업을 대상으로 여성 임원 비율을 30퍼센트 이상으로 지정하는 법안이 합의되며 독일 또한 할당제를 시작했습니다.

할당 비율, 법적 제재는 각기 다르지만 고위층에 여성 인사를 포함하자는 움직임은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양성평등’이든 ‘여성 할당’이든, 사회 고위층의 ‘다양성’과 관련된 법안들이 꾸준히 이슈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양성 높은 기업이 일도 잘한다?

Mckinsey's Women Matter Research ©Mckinsey & Company
매켄지는 2007년부터 Women Matter 보고서를 통해 경영진의 성 다양성과 기업 수익률의 상관관계를 꾸준히 분석해 왔습니다. 일례로 2018년에 발표한 ‘기업 내 다양성에 관한 보고서’에 따르면 남녀 비율의 격차가 적은 기업일수록 영업이익이 21퍼센트 높고, 인종 및 문화적 다양성을 갖춘 기업은 33퍼센트 더 높은 수익률을 보입니다. 국제 신용평가 기관 S&P 글로벌 또한 지난 17년간 여성 임원의 성과에 관한 연구를 해 왔는데요. 여성 임원이 선임된 기업은 그렇지 않은 기업들보다 1.8조 달러가량 차이 나는 매출 총이익을 보였다고 발표했습니다. 국내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장 기업 170개를 대상으로 진행된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2018년 기준 5년간 여성 관리자가 늘어난 기업이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평균 2배 이상의 수익률을 달성하였습니다.

여성 임원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가 국내외에서 활발히 이루어지는 와중에, ‘다양성’은 일종의 기업 가치로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글로벌 소비재 브랜드 ‘P&G 컴퍼니’는 여성 임원의 비율이 50퍼센트 이상인 것으로 알려지며 화제가 된 바 있는데요. 한 관계자는 흔히 여성 비율이 적다고 알려진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ematics) 분야에서 자사의 여성 관리자, 임원이 많다는 점을 소셜 미디어에 어필했습니다. 이외에도 한 인간의 ‘생애주기를 함께 하는’ 회사임을 강조하고 여성 임원의 수가 적은 것은 여성 개인의 책임이 아님을 주장하는 등, 임직원 구성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기업 이미지를 소비자들에게 각인시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기업 브랜딩 전략을 넘어 '다양화'는 국제사회의 의무로도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주식 시장 나스닥이 상장 기업 이사회의 다양성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추진한 것이 대표적이죠. 작년 12월, 나스닥은 상장 기업이 여성과 소수자를 각 한 명씩 이사로 선임하도록 하는 제안서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하였습니다. “이사회 구성의 다양성은 기업 재무 성과와 관련 있다”는 아데나 프리드먼 나스닥 최고경영자(CEO)의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왜 실력 아닌 성별인가요?

민간기업 여성이사 의무할당 찬반토론 ©동아일보
기업의 성장을 위해, 이미지 개선을 위해, 국제사회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다양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 임원 할당제는 '다양성'이라는 키워드만큼 인기를 얻진 못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선 여성들조차 양성평등 고용제에 반대하는 의견을 표명하는데요. 능력을 인정받아 뽑힌 여성에게 ‘착한 낙하산’이라는 누명이 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정당당하게 승진하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해당 법안은 오히려 부정적인 꼬리표로 따라붙을 수 있습니다. 

토크니즘(tokenism)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토크니즘이란, 소수자 집단의 일부만을 대표로 뽑아 구색을 갖추는 정책적 조치를 뜻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사회적 차별을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해당 집단의 극히 적은 수만 조직에 편입시킬 뿐 유의미한 사회변화를 끌어낼 순 없는 경우죠. 이는 할당제를 적용하는 정당 혹은 기업의 이미지 마케팅의 일환으로 전락할 우려도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여성 소비자들이 주 타깃이 아닌 기업의 입장에선 도움도 안 되고 관심이 가지 않는 법안으로 보일 수도 있겠죠. 

즉 여성 고용 할당제로 인해 여성 임원들은 개인의 개체성보단 집단의 대표성이 두드러질 위험, 일반 구성원들보다 더 높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에 처할 수 있습니다. 소수자들을 보호하는 정책이 기업을 위한 마케팅 전략으로 변질할 우려도 있고요. 그러나 여성 임원 할당제에 대한 찬반 논쟁이 펼쳐질 때 무엇보다도 주목받는 이슈는 바로 ‘역차별’입니다.


평등인가 또 다른 차별인가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할당제를 둘러싼 역차별 논란은 여전히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는 성별 말고 실력으로 겨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녀 모두 같은 업무 성과를 내더라도 특정 성별이라는 이유만으로 선발되는 것은 부당한 결과겠죠. 즉 할당제는 양성평등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차별을 불러일으키는, 모순적인 제도가 될 수 있다는 비판입니다.

하지만 여성 임원 할당제의 배경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해당 법안의 취지는 ‘이유 없는 차별’을 철폐하자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냥 천장이 아닌 ‘유리’ 천장을 마주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불평등을 수치로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5퍼센트의 여성 임원 비율에 주목하는 것은 남성 임원들의 권리를 침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95퍼센트의 남성들의 목소리 속에 여성의 목소리가 침투할 기회를 얻기 위함입니다. 인식의 개선만으로는 해소할 수 없던 불평등의 영역에 갇힌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최후의 보루인 제도와 그에 따른 선언적 효과입니다. 

‘혹시 모를 역차별’에 대한 우려가, 이미 가시적으로 드러난 현재의 사회적 차별에 너무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진 않은가요. 누군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승진함으로써 능력 있는 남성이 기회를 얻지 못한다면 부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해당 사례는 역차별을 보완할 수 있는 추가적인 제도가 마련되어야 함을 시사할 뿐, 여성 임원 할당제를 금지해야 할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현재 필요한 것은 제도의 허점을 내세우며 제도 전체를 비판하는 것보다, 제도가 화두에 오르게 된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먼저 아닐까요. 조용하지만 뿌리 깊게 박힌 사회적 불평등을 충분히 이해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완성도 높은 제도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내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여성 임원 할당제가 시행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처벌조항은 없습니다. 현재 여성 임원이 한 명이라도 있는 국내기업의 비율은 35퍼센트지만, 1년이 지난다 해도 큰 변화가 찾아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양성'은 글로벌 트렌드지만 '여성 고용 할당제'는 무리수, 조롱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많은 논란을 헤치고 제도가 시행되는 것은 서툴러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음소거 버튼을 해제하고 싶은 물결 아닐까요. 이때까지 여성에겐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이 있어 왔다면, 이제는 눈에 보이는 지원군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제도가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데일리 북저널리즘에서는 여성 임원 할당제의 찬반 입장을 살펴봤습니다. 읽으시면서 들었던 생각을 댓글로 남겨 주세요. 서로 다른 의견을 말하고 토론하면서 사고의 폭을 확장해 가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댓글이 북저널리즘의 콘텐츠를 완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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