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의 귀환이 오래 걸렸던 이유로 청와대 박수현 국민소통수석은 두 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 첫째로 남북이 모두 봉환을 원했으며, 둘째로는 장군이 현지 고려인 사회의 정신적 지주라는 점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북한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우리 정부보다도 먼저 봉환 요청을 한 바가 있습니다. 박 수석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은 남북 모두와 수교하며, 장군의 고향이 평양이기 때문”에 카자흐스탄으로서는 난감했던 것이죠. 실제로 북한은 장군의 유해 송환과 관련하여 당연히 수도인 평양으로 모셔와야 한다며 우리 정부를
비난했습니다. 만약 북한이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봉환하는 데 성공했다면, 한국 독립군의 정통성을 승계하는 격이 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로서도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죠.
중요한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홍범도 장군이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에게 가지는 의미와 위상입니다. 현재의 독립국가연합(CIS)에서 카자흐스탄에 거주 중인 고려인은 10만 명이 넘고 이는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다음가는 숫자입니다. 소수민족이지만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이지요. 그들에게는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1922년, 스탈린이 등장한 이후부터 소련으로 망명한 고려인의 운명은 위기에 놓이기 시작했습니다. 1935년에는 소련에서 3년 동안 약 2500여 명의 러시아 극동 지역 고려인을 일본의 간첩이란 혐의로 체포 및 총살했습니다. 당시 일본 첩자와 외모 구분이 쉽지 않기 때문이었죠. 고려인들은 통제가 어렵고 신뢰할 수 없는 ‘적성 민족’으로 낙인찍혀 37년에 강제 이주를 당했습니다.
그런 고려인들에게 홍범도 장군은 성경 속 모세와 같았습니다. 레닌에게 신임받았던 그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고령에도 불구하고 참전 의사를 밝혔습니다. 노구를 무시하던 당시 공산당원 앞에서 동전을 던져 바로 권총 사격을 성공시키며 함구시켰다는 일화도 있지요. 장군의 빨치산 활동과 항일 운동의 공은, 고려인 전체에게 찍힌 낙인을 극복하는 데 유일한 희망이 되었습니다. 장군은 그야말로 카자흐스탄 고려인의 역사 그 자체이자 정신적 지주이지요.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박노자 교수는 이번 봉환이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의 여론을 고려하지 않았다며, 페이스북을 통해
쓴소리하기도 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교민들의 섭섭함을 이해한다며, 기존의 묘역을 공원화하는 등 후속 작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죠. 장군의 존재는 그의 발이 닿은 곳마다 참 거대한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한편 다른 의미로 기분이 나쁜 국가도 있을 겁니다. 일제를 상대로 맹위를 떨치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광복절에 봉환한다는 것은 일본에게는 불편한 일이자 한일 관계에 있어 외교적 위험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의미도 의미이지만 정치인들이 유해 봉환을 계기로 반일 정서를 자극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장군은 이렇게 각각의 이해 관계자에게 서로 다른 의미가 있는 인물이며, 최종적으로 한국이 유해 봉환에 성공했다는 것은 과거에 비해 크게 성장한
국력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예우를 통해 장군의 정신을 계승하고 기림으로써 애국심 고취와 더불어 국가 정체성을 포괄적으로 다질 수 있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장군의 귀환에 걸린 문제들, 특히 고려인 사회에 대한 존중이 부족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지만, 장군이 항일 무장 투쟁으로 독립시키고자 한 것은 한반도이자 한민족입니다. 여기서 한반도는 대한민국만을, 한민족은 한국 국민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에스니시티(Ethnicity)와 민족 정서를 포괄적으로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한국도 나름의 지리적, 역사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해 봉환보다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은, 소련 해체 이후 오랫동안 고려인들을 외면해온 정부와 해당 지역의 국가 유공자들 자녀에게 간이 귀화 절차도 제공되지 않는다는 점일 것입니다.
유공자를 예우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