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8월 20일 - 데일리 북저널리즘

탈레반이 재집권하면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위험에 처했다. ‘미국이 돌아왔다’고 선언했던 바이든은 철군을 강행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는 세계의 리더는 돌아왔는가.

아프가니스탄을 떠나기 위해 카불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는 국민들. ©Aykut Karadag/Anadolu Agency via Getty Images
아프가니스탄에서 한 여성이 길에서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을 모두 가리는 의복인 ‘부르카’를 착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8월 18일 폭스뉴스의 보도로 알려졌죠. 이슬람 무장 단체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미국은 지난 5월 3일 아프간에서 철군을 시작했습니다. 8월 말까지 완전히 철수한다는 계획이었죠. 철군이 시작된 이후 아프간 정부군은 탈레반에 속수무책으로 밀려났습니다. 결국 8월 15일 수도 카불에까지 들어선 탈레반에 정권을 이양했습니다. 미국의 철군이 시작된 지 3개월 만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은 20년 만에 다시 탈레반의 통치하에 들어섰습니다. 최악의 위험에 처한 건 여성과 아이들입니다. 탈레반은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 단체입니다.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엄격하게 적용해 여성의 사회 활동과 외출, 교육을 엄격히 제한하죠. 탈레반이 통치했던 1996~2001년 아프간 여성들은 전신을 가리는 부르카를 입고 남성 가족을 동반하지 않으면 외출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교육과 경제 활동도 금지당했습니다.

탈레반 재집권으로 그때와 같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우려는 빠르게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부르카를 입지 않고 외출했던 여성은 총살당했고, 아프간을 탈출하기 위해 시민들이 몰려든 카불 공항에서도 유혈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탈레반 군인들이 공항에 모여든 여성과 어린이 등 시민들에 채찍, 칼, 곤봉 등을 휘두른 겁니다. 아프간 국영TV의 여성 앵커 하디자 아민은 자신과 동료 여성 직원들이 무기한 정직을 당했다고 밝혔습니다. 아프간의 여성들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습니다. 회사나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 머무르고 있죠.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철군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8월 16일 대국민 연설에서 밝혔습니다. 이렇게 빨리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한 건 미국 탓이 아니라 아프간 정부군이 스스로 싸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미국은 아프간 전쟁을 시작한 20년 동안 막대한 돈과 인력을 쏟아부어 왔습니다. 바이든의 선택은 미국의 실리에 부합합니다. 그러나 바이든이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천명했던 슬로건과는 다른 선택으로 보입니다. 인권과 민주주의 같은 인류 공동의 가치 실현을 이끄는 리더로서의 ‘미국이 돌아왔다’는 선언 말이죠.
 

탈레반은 왜

8월 17일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는 탈레반 대변인 자비훌라 무자히드. ©Marcus Yam / Los Angeles Times via Getty Images
탈레반이 권력을 잡자 아프간의 시민들은 카불 공항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아프간을 떠나기 위해섭니다. 탈레반이 집권하면 어떤 탄압을 받게 될지 알고 있기 때문이죠. 탈레반은 현지 민족인 파슈툰족 언어로 ‘학생’이라는 뜻입니다. 이슬람 신학교 학생들이 아프간 내전을 무력으로 종식시키기 위해 1994년 결성한 것이 시초였죠. 1989년 아프간에 주둔하던 소련군이 철수한 뒤 1990년대 초중반 아프간은 내전 상태였습니다. 여러 군벌들이 세력 싸움을 벌이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일종의 민병대로 조직된 게 탈레반이었던 거죠. 탈레반은 내전으로 혼란한 아프간을 이슬람적 가치를 내세워 통일하려 했고, 빠르게 세를 불렸습니다.

1996년 아프간 내전을 종료하고 집권한 탈레반 정권은 이슬람 교리를 엄격하게 해석해 가혹한 통치를 펼쳤습니다. 특히 샤리아라는 이슬람 율법을 앞세웠는데요, 샤리아를 가혹하게 적용해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자유를 억압했습니다. 여성들은 부르카를 입지 않고는 외출조차 금지됐습니다. 부르카는 이슬람권에서도 가장 엄격한 복장입니다. 이슬람권에서 여성의 신체 노출을 막는 의상은 크게 네 종류인데요, 히잡은 머리카락과 목을 가리는 스카프, 차도르는 얼굴을 제외한 전신을 가리는 망토입니다. 니캅은 눈을 제외한 전신을 가리는 복장입니다. 부르카는 눈마저 망사로 가리는 형태로 이슬람권에서도 착용하는 국가가 많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여성들은 외출할 때 남성 가족을 반드시 동반해야 했습니다. 취업도 금지됐고 10살 이상의 여성들은 교육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여성의 법정 증언 능력은 남성의 절반만 인정됩니다. 남성 1명의 증언과 여성 2명의 증언이 같은 효력을 갖는 식입니다.

탈레반 통치의 또 다른 특징은 엄벌주의입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투석형, 손발 절단 등 전근대적인 형벌이 내려졌습니다. 그 외에도 춤, TV, 음악 같은 오락을 금지하는 등 샤리아를 엄격하게 적용했습니다. 이런 탈레반의 이슬람 근본주의 통치가 돌아올 거라는 공포가 커지고 있습니다. 일부는 현실이 돼가고 있죠. 탈레반은 재집권 이후 첫 기자회견에서 “이슬람 율법의 틀 안에서 여성의 권리를 존중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성의 취업과 교육도 허용하겠다고 했지만, 그걸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후 탈레반 고위급 인사인 와히둘라 하시미는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여성의 역할과 여학생의 등교 여부는 율법 학자가 정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성이 히잡을 쓸지 부르카를 입을지 등은 율법 학자의 해석에 달려 있다고도 했죠. 이슬람 근본주의적인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사회를 통제할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탈레반의 강압 통치 움직임은 이미 포착되고 있습니다. 8월 18일 탈레반은 아프간 국기를 앞세운 시위대에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이로 인해 적어도 3명이 숨졌습니다. 부르카를 입지 않은 여성이 살해되고, 현지에서 부르카 가격이 10배 이상 급등한 것도 공포 통치로의 회귀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탈레반 점령지 곳곳에선 미혼 여성들을 탈레반 조직원과 강제 결혼시키기 위해 명단을 작성하고 있다는 보고도 나오는 상황입니다.
 

미국과 바이든의 선택

8월 16일 아프가니스탄 상황에 관한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Bill O'Leary/The Washington Post via Getty Images
미국이 철군을 결정하면서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닐 겁니다. 바이든 대통령도 아프간 정부의 함락이 예상보다 빠르게 전개됐지만, 지금의 위험과 모든 만일의 사태를 계획했다고 말했죠. 미국 입장에서 이번 철군은 ‘전략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바이든이 “후회하지 않는다”고 언급한 이유죠. 아프간 전쟁은 끝은 보이지 않는 데다, 막대한 자원과 인력이 드는 긴 싸움이 돼가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20년 동안 아프간 전쟁에 들인 돈은 2조 2600억 달러에 달합니다. 전사한 미군은 약 2440명에 이릅니다.

미국이 애초 아프간 침공을 시작한 건 9.11 테러의 배후인 오사마 빈라덴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탈레반이 그의 신병 인도를 거부해 침공을 시작했죠. 개전 초 미국은 탈레반 정권을 쉽게 무너뜨리고 테러의 배후인 알카에다의 거점도 파괴했습니다. 그런데 아프간에 민주주의 세속 국가를 세우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탈레반을 완전히 축출하지도 못했죠. 탈레반은 험준한 산맥으로 이루어진 아프간의 지형 곳곳으로 숨어들어 전열을 가다듬고 게릴라전을 벌여 왔습니다. 다양한 종족과 종파, 군벌이 공존하는 아프간의 복잡한 상황도 국가를 세우는 데는 복병이었습니다.

오바마 정부 시절인 2011년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을 찾아 사살하면서 아프간에 주둔할 명분도 약해졌습니다. 오바마 정부 시절부터 미국은 아프간에서 철수할 방법을 찾았죠.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14년 아프간 철군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아프간 정부군으로 미군의 역할을 이양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탈레반의 저항에 미군과 민간인 희생이 늘었고, 전쟁이 이어지면서 철군 계획도 취소됐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 역시 아프간에서 발을 빼기 위해 탈레반과 평화 협정을 추진했습니다. 지난해 2월 마련된 평화 협정의 내용이 올해 5월 미군이 아프간에서 완전히 철수한다는 것이었죠. 바이든 대통령 취임 후 시한을 미뤄 8월 말까지 철군하기로 한 겁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철군이 시작되자 아프간 정부는 빠르게 무너졌습니다. 아프간 국민들에게는 공포가 찾아왔습니다.

바이든은 경험 많은 정치인입니다. 나름의 전략과 실리에 따라 철군을 추진한 걸로 풀이됩니다. 실제로 바이든은 상원 의원 시절이던 2001년엔 아프간 전쟁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부통령 시절부터는 회의적인 태도로 바뀌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2009년엔 당시 아프간 파병 증원을 검토하던 오바마 대통령을 설득하려고 하면서 국방·안보 담당자들과 충돌하기도 했죠. 2010년엔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특사이던 리처드 홀브룩이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없지만 아프간 여성들이 겪는 고통 등을 고려해 지원해야 한다고 하자 발끈했다고도 전해집니다. “아프간 여성들의 권리를 위해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서 내 아들을 거기 보낸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거죠. 바이든의 장남 보 바이든은 2008년 육군 소령으로서 이라크에 투입됐습니다.

바이든은 철군 결정에 대해 설명하면서 미국의 국익을 강조했습니다. “아프간 군대가 스스로 싸울 의지가 없는 전쟁에서 미군이 죽어서는 안 된다”, “국익에 맞지 않는 분쟁에 무기한 남아서 싸우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 “내 결정은 비판받겠지만 다음 대통령으로 넘기기보다는 내가 모든 비난을 떠안겠다”고 했죠. 지구 반대편의 민주주의와 인권보다는 자국 이익을 우선하는 미국 대통령으로서의 결정을 내린 겁니다.
 

미국은 돌아왔는가


‘미국이 돌아왔다(America is back).’ 바이든이 2020년 11월 당선 확정 직후 내놓았던 슬로건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등 보편적인 가치를 실현하는 리더로서의 역할을 했던 미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거였죠. 그러나 지금 바이든은 다시 미국의 이익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바이든도 ‘아메리카 퍼스트’로 선회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아프간 철군에 우호적이었던 미국 내 여론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8월 16일 로이터통신과 입소스가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바이든의 정책 수행 지지율은 46퍼센트로 취임 이래 최저를 기록했습니다. 탈레반이 아프간을 점령한 후로 여론이 악화했습니다. 모닝컨설트와 폴리티코가 8월 13~16일 실시한 조사에서는 미군 철수를 지지한다는 응답이 49퍼센트였습니다. 4월 이뤄진 조사에서 미군 철수 지지가 69퍼센트에 달했던 것과 대조적인 결과입니다.

바이든은 지난 5월 31일 메모리얼 데이(현충일) 연설에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인권 침해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맥락에서 나온 발언이었는데요, 역설적으로 아프간에선 현지인들의 인권을 위해 미군을 희생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복잡한 외교 셈법과 냉혹한 국제 정치, 아프간 정부의 무능과 부패 사이에서 가장 취약한 상황에 빠진 건 아프간의 여성과 아이들입니다. 아랍에미리트로 도망친 대통령도, 권력을 장악한 탈레반도, 아프간 국민들도, 미국도 이들을 지켜 주지 않습니다. 여성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SNS에 공개된 동영상에서 아프간 여성들은 기본권을 보장하라는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언제 공격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낸 용기입니다. 지금 이들을 지킬 수 있는 건 국제 사회의 일원들이 보내는 관심과 지지뿐일 겁니다. 외교 전략적인 유불리를 떠나 가장 취약한 계층이 처한 상황을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데일리 북저널리즘에서는 탈레반 재집권으로 위험에 처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과 바이든의 선택을 살펴봤습니다. 읽으시면서 들었던 생각을 댓글로 남겨 주세요. 서로 다른 의견을 말하고 토론하면서 사고의 폭을 확장해 가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댓글이 북저널리즘의 콘텐츠를 완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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