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철군을 결정하면서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닐 겁니다. 바이든 대통령도 아프간 정부의 함락이 예상보다 빠르게 전개됐지만, 지금의 위험과 모든 만일의 사태를 계획했다고 말했죠. 미국 입장에서 이번 철군은 ‘전략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바이든이 “후회하지 않는다”고 언급한 이유죠. 아프간 전쟁은 끝은 보이지 않는 데다, 막대한 자원과 인력이 드는 긴 싸움이 돼가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20년 동안 아프간 전쟁에 들인 돈은 2조 2600억 달러에 달합니다. 전사한 미군은 약 2440명에
이릅니다.
미국이 애초 아프간 침공을 시작한 건 9.11 테러의 배후인 오사마 빈라덴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탈레반이 그의 신병 인도를 거부해 침공을 시작했죠. 개전 초 미국은 탈레반 정권을 쉽게 무너뜨리고 테러의 배후인 알카에다의 거점도
파괴했습니다. 그런데 아프간에 민주주의 세속 국가를 세우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탈레반을 완전히 축출하지도 못했죠. 탈레반은 험준한 산맥으로 이루어진 아프간의 지형 곳곳으로 숨어들어 전열을 가다듬고 게릴라전을 벌여 왔습니다. 다양한 종족과 종파, 군벌이 공존하는 아프간의 복잡한 상황도 국가를 세우는 데는 복병이었습니다.
오바마 정부 시절인 2011년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을 찾아 사살하면서 아프간에 주둔할 명분도 약해졌습니다. 오바마 정부 시절부터 미국은 아프간에서 철수할 방법을 찾았죠.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14년 아프간 철군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아프간 정부군으로 미군의 역할을 이양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탈레반의 저항에 미군과 민간인 희생이 늘었고, 전쟁이 이어지면서 철군 계획도 취소됐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 역시 아프간에서 발을 빼기 위해 탈레반과 평화 협정을 추진했습니다. 지난해 2월 마련된 평화 협정의 내용이 올해 5월 미군이 아프간에서 완전히 철수한다는 것이었죠. 바이든 대통령 취임 후 시한을 미뤄 8월 말까지 철군하기로 한 겁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철군이 시작되자 아프간 정부는 빠르게 무너졌습니다. 아프간 국민들에게는 공포가 찾아왔습니다.
바이든은 경험 많은 정치인입니다. 나름의 전략과 실리에 따라 철군을 추진한 걸로 풀이됩니다. 실제로 바이든은 상원 의원 시절이던 2001년엔 아프간 전쟁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부통령 시절부터는 회의적인 태도로 바뀌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2009년엔 당시 아프간 파병 증원을 검토하던 오바마 대통령을 설득하려고 하면서 국방·안보 담당자들과 충돌하기도 했죠. 2010년엔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특사이던 리처드 홀브룩이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없지만 아프간 여성들이 겪는 고통 등을 고려해 지원해야 한다고 하자 발끈했다고도
전해집니다. “아프간 여성들의 권리를 위해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서 내 아들을 거기 보낸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거죠. 바이든의 장남 보 바이든은 2008년 육군 소령으로서 이라크에 투입됐습니다.
바이든은 철군 결정에 대해 설명하면서 미국의 국익을 강조했습니다. “아프간 군대가 스스로 싸울 의지가 없는 전쟁에서 미군이 죽어서는 안 된다”, “국익에 맞지 않는 분쟁에 무기한 남아서 싸우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 “내 결정은 비판받겠지만 다음 대통령으로 넘기기보다는 내가 모든 비난을 떠안겠다”고
했죠. 지구 반대편의 민주주의와 인권보다는 자국 이익을 우선하는 미국 대통령으로서의 결정을 내린 겁니다.
미국은 돌아왔는가
‘미국이 돌아왔다(America is back).’ 바이든이 2020년 11월 당선 확정 직후 내놓았던 슬로건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등 보편적인 가치를 실현하는 리더로서의 역할을 했던 미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거였죠. 그러나 지금 바이든은 다시 미국의 이익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바이든도 ‘아메리카 퍼스트’로 선회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아프간 철군에 우호적이었던 미국 내 여론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8월 16일 로이터통신과 입소스가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바이든의 정책 수행 지지율은 46퍼센트로 취임 이래 최저를
기록했습니다. 탈레반이 아프간을 점령한 후로 여론이 악화했습니다. 모닝컨설트와 폴리티코가 8월 13~16일 실시한 조사에서는 미군 철수를 지지한다는 응답이 49퍼센트였습니다. 4월 이뤄진 조사에서 미군 철수 지지가 69퍼센트에 달했던 것과 대조적인
결과입니다.
바이든은 지난 5월 31일 메모리얼 데이(현충일) 연설에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인권 침해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맥락에서 나온 발언이었는데요, 역설적으로 아프간에선 현지인들의 인권을 위해 미군을 희생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복잡한 외교 셈법과 냉혹한 국제 정치, 아프간 정부의 무능과 부패 사이에서 가장 취약한 상황에 빠진 건 아프간의 여성과 아이들입니다. 아랍에미리트로 도망친 대통령도, 권력을 장악한 탈레반도, 아프간 국민들도, 미국도 이들을 지켜 주지 않습니다. 여성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SNS에 공개된 동영상에서 아프간 여성들은 기본권을 보장하라는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언제 공격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낸 용기입니다. 지금 이들을 지킬 수 있는 건 국제 사회의 일원들이 보내는 관심과 지지뿐일 겁니다. 외교 전략적인 유불리를 떠나 가장 취약한 계층이 처한 상황을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