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럴림픽에는 올림픽과는 다른 규칙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휠체어 농구엔 트래블링[2] 대신, 드리블 및 패스 사이 최대 2번까지 휠체어를 만질 수 있다는 규정이 있죠. 팀원들의 장애 점수를 합산해 팀을 구성한다는 점도 특이합니다. 선수들은 1.0~4.5점 사이의 장애 점수가 주어지고, 5명으로 구성된 한 팀의 장애 점수는 14점을 넘으면 안 된다는 것이 규칙입니다. 비장애인들의 스포츠는 비장애인들의 합의에 따라 결정된 것처럼, 패럴림픽에서는 장애인 선수들의 신체 조건에 맞춰 새롭게 규칙을 구성한 결과입니다.
올림픽에선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패럴림픽에선 자주 등장합니다. 주로 장애인 선수를 도와주는 보조자 역할을 하죠. 대표적으로 시각 장애인들의 수영 경기에 등장하는 ‘tapper’입니다. ‘tap’은 ‘가볍게 톡 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죠. 시각 장애인 선수들이 풀 끝에 다다랐을 즈음, 결승선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각자 긴 막대를 이용해 선수들의 머리를 쳐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힘껏 풀 끝을 향해 헤엄쳐 오던 선수가 딱딱한 수영장 벽에 부딪지 않기 위함입니다.
“난민들에게 주어진 것은 많지 않다. 그런데 스포츠는 그걸 잊게 해 준다.”
부룬디 난민 캠프 출신 태권도 선수 파르페 하키지마나가 말했습니다. 그는 16살 때부터 시작한 태권도를 이제 자신이 속한 부룬디 난민 캠프에서 태권도를 가르칩니다. 그는 150여 명 난민의 선생님이자 2020 패럴림픽 난민 대표입니다.
2020 도쿄 패럴림픽은 난민 대표팀이 구성된 첫해입니다. IPC는 지난 10월, 패럴림픽 난민 대표팀(RPT·Refugee Parlympic Team)을 선발하였습니다. 여성 1명과 남성 5명으로 구성된 총 6명의 팀입니다. 패럴림픽 개막식 날, 난민 대표팀은 국기 대신 패럴림픽 로고가 새겨진 깃발을 들고 행진하였습니다. 이들은 난민과 장애인이라는 두 가지 공통된 정체성을 갖고 패럴림픽에 참가합니다. 전세계 8200만 명의 난민을 지지하는 동시에, 그 중 1200만 명의 장애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합니다.
올해 우리나라의 패럴림픽 참여 선수는 총 86명입니다. 전 세계 참가 선수가 4500명인 것을 고려하면 의아할 만큼 작은 숫자입니다. 대한장애인체육회가 기대하는 종합 메달 순위는 20위지만, 폐막이 3일 남은 현재 대한민국의 메달 순위는 40위를 웃도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올림픽에서 차지한 16위에 비하면 안타까운 등수죠.
메달 개수에 함몰될 필요는 없습니다. 선수 개개인의 노력이 메달보다 값진 자랑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메달 순위가 아니다’라는 논리가,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낙후된 나라의 부끄러운 단면을 합리화할 핑계로 사용되진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인의 패럴림픽 참가 인원과 그 성과는 외면하기 힘든 지표입니다. 자타공인 패럴림픽 후원사인 기업도 존재하는 선진국에서, 막상 선수들은 경기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는 의아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패럴림픽에서 외교적 효과가 크게 기대되진 않습니다. 지역 경제 발전에도 극적으로 유리해 보이진 않고요. 올림픽 때는 문재인 대통령과 바이든의 방일을 화두로 한창 논란이 일었던 반면, 패럴림픽에 대해 미디어는 부뚜막 고양이처럼 얌전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때문에 패럴림픽은 오히려 스포츠 경기로서 건강하게 기능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입김이나 미디어의 수군거림으로부터 벗어나, 선수 각자가 신체의 한계에 도전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패럴림픽입니다.
혹 패럴림픽을 관람할 때면 나도 모르게 ‘저 선수는 어디가 장애일까’를 궁금해하며 살피지는 않았나요. 선수의 장애와 패럴림픽의 규정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태도이지만, 우리가 그들의 장애 정도와 성과 정도를 대차 대조표로 그릴 필요는 없습니다. 패럴림픽에서 주목할 것은 까다로운 등급제로도 정리되지 않는 수많은 선수의 이야기입니다. ‘패럴림픽은 분류가 너무 복잡하다’는 일각의 불평에, IPC는 ‘인간(의 신체)은 실제로 다양하다’는 입장을 표합니다. 도쿄 패럴림픽은 앞으로 72시간 남았습니다. 어떤 다양성이 펼쳐질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