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각성주의의 시대
1화

진보적 정체성 정치가 길을 잃은 고전적 자유주의를 대체하고 있다

비자유주의적 진보주의는 어떻게 고전적 자유주의를 구축해왔나. 불평등의 확대와 양극화된 정치가 원인이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서구 자유주의에 뭔가가 매우 잘못되었다. 그 중심에 있는 고전적인 자유주의는 인류의 진보가 토론과 개혁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분열된 세계에서의 파괴적인 변화를 헤쳐 나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개인의 존중, 시장의 자유, 작은 정부를 위해 모두가 헌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한 중국은 자유주의를 이기적이고 퇴폐적이며 불안정하다고 비웃는다. 서구에서는 좌우 진영의 포퓰리스트들이 자유주의가 엘리트의식과 특권을 갖고 있다며 분노한다.

지난 250년 동안, 고전적인 자유주의는 비견할 데 없는 진보를 이루는데 일조해왔다. 그것은 한 순간의 연기처럼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1세기 전에 볼셰비키 사상과 파시즘이라는 암적인 요소들이 자유주의 유럽 내부를 갉아먹기 시작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현재 그것은 심각한 검증을 거치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자유주의자들이 맞서서 싸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할 시기이다.

그러한 싸움이 가장 치열한 곳은 바로 미국이다. 이번 주, 미국 연방대법원은 가혹하면서도 기이한 낙태금지법을 폐지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자유주의의 정신적 고향에서의 가장 위험한 위협은 트럼프 측의 우파에서 제기되고 있다. 포퓰리스트들은 과학이나 법치와 같은 자유주의의 체계들을 숨은 권력집단이 국민을 상대로 벌이는 음모의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폄하한다. 그들은 사실이나 이성보다 동족의 정서를 우위에 둔다. 2020년의 대통령 선거를 강탈당했다며 끊임없이 제기되는 거짓 주장을 보면, 그러한 충동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알 수 있다. 즉, 사람들이 토론이나 신뢰할 수 있는 제도를 이용해서 의견의 차이를 해소하지 못하면, 그들은 위력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좌파로부터의 공격은 파악하기가 좀 더 어려운데, 이는 부분적으로 미국의 “자유주의”에 비자유주의적 좌파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운 스타일의 정치가 최근 들어 어떻게 엘리트 대학들로부터 퍼져나가게 되었는지를 주목하고 있다. 젊은 졸업생들이 일류 언론사 및 정치, 재계, 학계에서 일자리를 얻으면서, 그들은 “불안”이라는 공포의 감정과 억압받는 정체성 집단(identity group)[1]을 위한 정의를 획득하려는 협소한 비전에 집착하는 의제를 유입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이념적인 순수성을 강제하기 위한 전술도 가져왔는데, 그것은 바로 적들의 발언권을 제거하고 기준을 벗어나는 동맹들과의 관계는 취소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18세기 말 고전 자유주의가 뿌리내리기 전 유럽을 장악했던 참회국가(confessional state)[2]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표면적으로 비자유주의 좌파와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원하는 것들이 상당히 많이 일치한다. 둘 다 사람들은 성별이나 인종에 관계없이 잘 살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기득권과 권위를 의심한다. 그리고 둘 다 변화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전적 자유주의자들과 비자유주의적 진보주의자들 사이에는 이보다 더 의견 차이가 심할 수 없을 정도이다.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진보의 정확한 방향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자발적이어야 하고,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분립을 기반에 두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개인이나 집단도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반면에 비자유주의 좌파는 스스로의 힘을 그 중심에 두고 있는데, 그들은 진정한 진보란 일단 인종이나 성별 등을 비롯한 모든 위계질서가 해체된 이후에야 가능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법 상의 차이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초기의 조건을 공정하게 설정하고 경쟁을 통해서 사건이 전개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서, 기업의 독점을 제거하고, 조합을 개설하고, 조세제도를 급진적으로 개혁하고, 무상교육을 제공하는 것 등이 있다. 진보주의자들은 자유방임주의를 강력한 기득권이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는 일종의 가식으로 여긴다. 대신에 그들은 스스로가 공정하다고 여기는 결과물인 “평등”을 강제해야 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자면, 학자이자 활동가인 이브람 X. 켄디(Ibram X. Kendi)는 학생들에 대한 표준화된 시험을 포함하여 얼핏 보기에 인종과 무관한 정책이고, 그것의 배후에 아무리 깨우친 의도가 자리하고 있다 하더라도, 만약 그것이 결국 인종간의 평균 소득격차를 더욱 증가시키는 결과를 일으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인종차별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효성이 있는 반인종차별 정책이 필요하다는 켄디의 주장은 옳다. 그러나 그의 마구잡이식 접근법은 일부 불우한 아이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부정할 수 있고, 어떤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재능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사회가 번창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집단이 아니라 개인들이 공정하게 대우를 받아야 한다. 게다가 사회에는 수많은 목표들이 있다. 사람들은 경제성장, 복지, 범죄, 환경 및 국가적 위험을 걱정하고 있으며, 정책이라는 것은 특정한 집단을 발전시키느냐에 대한 여부로만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다원주의적인 사회에서 치열한 토론을 벌여서 우선순위와 절충안에 대한 결론을 내리며, 선거를 통해서 진로를 결정한다. 비자유주의 좌파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시장이라는 개념 역시 조작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근거와 토론으로 가장한 것이 실제로는 엘리트가 가진 원초적 권력을 행사하는 또 하나의 방식일 뿐이라고 말한다.

전통적인 진보주의자들은 여전히 자유로운 발언을 옹호한다. 그러나 비자유주의적 진보주의자들은 특권층과 반동세력에 유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의 균형을 맞추려면 평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발언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것이며, 최고위층 집단이 정의의 회복을 더욱 큰 목소리로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에 따르는 피해의식의 카스트 제도가 활용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또한 소위 반동세력이라는 사람들이 특권을 덜 가진 이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발언을 할 때 그들을 처벌함으로써 본보기로 삼을 것이다. 그 결과는 파업 결의, 관계 절연, 발언권 제거가 될 것이다.

밀턴 프리드먼은 “자유보다 평등을 우선시하는 사회는 결국 어느 것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가 옳았다. 비자유주의적 진보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억압된 집단을 해방시킬 수 있는 청사진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개인들을 억압하기 위한 공식이며, 바로 그 점에서 그것은 포퓰리스트 우파의 계획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방법은 서로 다르지만 양쪽의 극단주의는 모두 과정보다 권력을 우선시하고, 수단보다 목적을 중시하며, 개인의 자유보다 집단의 이해를 중요하게 여긴다.

빅토르 오르반 치하의 헝가리나 블라디미르 푸틴 치하의 러시아처럼, 포퓰리스트들이 동경하는 권력자가 통치하는 나라들을 보면, 견제 받지 않는 권력으로는 훌륭한 정부를 세우기 힘들다는 걸 알 수 있다. 쿠바나 베네수엘라와 같은 유토피아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국가가 강제하는 인종 및 경제적 고정관념을 개인들이 기꺼이 따르려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포퓰리스트들이 진실보다 당파성을 우선시하면, 그것은 좋은 정부의 기반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진보주의자들이 서로 경쟁하는 카스트로 갈라놓으면, 그것은 국가의 존재 자체에 반하는 것이다. 둘 다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제도를 약화시킨다. 그래서 그들이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얼마나 좋아하든, 그들은 강요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고전적 자유주의가 다른 대안들보다 훨씬 더 낫다면, 도대체 왜 전 세계적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일까? 한 가지 이유는 포퓰리스트들과 진보주의자들이 서로를 병적으로 뜯어먹고 살기 때문이다. 이들이 서로 상대 진영에 대해 느끼는 증오의 심리는 각자의 지지 세력을 격분시키며, 이는 양쪽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동족 집단의 과도함을 비판하는 것은 마치 배신행위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자유주의에 대한 논의는 숨 쉴 공간이 부족하다. 지난 몇 년 동안 보수당의 브렉시트 진영과 제레미 코빈 전 대표가 이끌던 노동당이 서로 타협하지 않은 채 소모적인 논쟁을 일삼았던 영국을 살펴보라.

자유주의에는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측면이 일부 존재한다. 우리는 설령 그들이 틀렸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발언권을 지켜줘야 한다. 자신의 가장 깊은 신념에 대해서도 기꺼이 의심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들은 창조적 파괴의 강풍으로부터 보호받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규칙을 악용해서라도 돕고 싶겠지만, 그들은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발전해야 한다. 반대 세력들이 나라를 망칠 거라고 생각하더라도, 선거에서 그들이 승리한다면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간단히 말해서, 진정한 자유주의자가 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고 최후의 이념적 도전자가 무너질 것처럼 보였을 때, 기고만장한 엘리트들은 자유주의의 겸손함과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을 상실했다. 그들은 자신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들은 자신과 같은 사람들에게 유리한 미국의 능력주의를 만들어냈다. 금융위기 이후에 그들이 감독했던 경제는 너무 느리게 성장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번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없었다. 백인 노동계급의 비평가들을 존중하며 대하기는커녕, 그들에게는 백인으로서 가져야 할 교양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웃었다.

이러한 안이한 태도로 인해서 반대세력들은 수많은 결함들을 자유주의 탓으로 돌려왔다. 그리고 미국에서 인종 문제가 끊이지 않으면서, 이 나라는 시작부터 썩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계속되는 불평등과 인종차별을 대하면서, 고전적인 자유주의자들은 변화라는 건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상기시켜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워싱턴은 무너졌고, 중국은 거침없이 앞서가고 있으며, 사람들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자유주의적인 신념의 결여


궁극의 안일함은 고전적인 자유주의자들이 그러한 위협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우편향적 자유주의자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포퓰리스트들과의 편한 결혼 생활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수많은 좌편향적 자유주의자들 역시 사회적 정의를 어떻게 이뤄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은 가장 편협한 자유주의는 주변부에 속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리고 편협함조차도 변화 메커니즘의 일부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즉, (편협한 자유주의는) 불의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중심부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극단으로 몰아가는 힘에 대항해야만 고전적인 자유주의자들이 극단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자유주의의 원칙들을 적용함으로써, 그들은 어떠한 강요에도 의존하지 않고 사회의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오직 자유주의자들만이 모든 형태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그것을 어떻게 강점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이해하고 있다. 오직 그들만이 국민의 창의적인 에너지를 발산하기 위하여 교육에서부터 각종 계획과 외교정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공정하게 다룰 수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스스로의 투지를 재발견해야 한다. 그들은 협박 세력과 절연하는 이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자유주의는 여전히 공정한 진보를 위한 최고의 엔진이다. 자유주의자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1]
특정한 개인이 소속감을 느끼는 집단
[2]
공식적인 국교가 있으며 국민들에게도 신앙을 권장하는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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