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임에는 룰이 있습니다. 중공이 룰 메이커라면 중국 기업은 룰 테이커가 됩니다. 하지만 이유 없는 복종은 없습니다. 중국은 대표적인 권위주의 독재국가이지만, 명분 없이 이루어지는 독재는 쉽게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중국 공산당의 영도력은 모든 인민에게 적용되는 헌법과 당원에게 적용되는 당장(黨章, 당의 헌법)에서 비롯하고, 중국 지도부는 늘 사회주의의 기본 노선을 견지하며 그 틀 안에서 국제·국내 상황에 맞게 유기적인 해석을 하거나 비전을 제시합니다. 즉, 중국 기업이 규제 당국으로부터 큰 타격을 입으면서도 이 데스 게임을 포기할 수 없는 것에는 기업이 지도부의 비전에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지가 핵심으로 작용합니다.
만약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개인적 성향이 빅테크 규제의 원인이라면 기업은 그저 탈출구를 모색하는 고양이 앞의 쥐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 주석이 ‘공동 부유’라는 단어로 천명한 마오이즘적 비전은 단순히 그가 깊은 마오의 신봉자이거나 그 권위에 다가가려는 야욕만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중공은 철저한 집단지도체제로, 공산당 창당 100년을 앞둔 지난 6월 5일 기준 중국 내
공산당원의 수는 9514만 8000명이고, 거대한 피라미드형 권력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당 주석을 포함한 정치국 상무위원 7명이지만, 그들은 각자 다양한 영도소조(領導小組)
[3]의 핵심 인물들로, 나름의 견제를 합니다.
중공은 그야말로 마오쩌둥이라는 신화적 인물로부터 국가 재건을 시작하여, 계획경제로 필요한 산업군을 육성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도농·빈부의 격차를 해결하기 위한 집단지성으로서 기능해왔습니다. 사실상 마오쩌둥 사상과 덩샤오핑 이론은 그들 개인 신념의 결과라기보단 제한적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의 결과라고 볼 수 있지요. 현재 중국의 빅테크 규제가 마오이즘으로의 회귀로만 비치는 경향이 있지만, 대부분 언론이 간과하는 것은 후진타오 집권기입니다. 후진타오·원자바오 체제 역시 ‘공부론’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의 분배에 굉장한 신경을 썼습니다. 덩샤오핑과 장쩌민 시기를 거치며 극심해진 도농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발달한 연안 지방의 문물을 농촌으로 들여오고자 애썼죠. 상하이나 선전에 회사를 지으려면 내륙 지방에 투자를 해야 했습니다. 그때 교통의 중심지로 고속도로와 철도 등이 들어선 곳이 우한이지요.
이는 시진핑 집권기부터는 달라집니다. 미·중 간의 기술 패권 경쟁이 심해지며 5G, AI, 반도체 등의 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했고, 관련 기업에 많은 혜택을 주었습니다. 지금의 빅테크 기업들은 시진핑 1기의 수혜자들이나 다름없지요. 하지만 시진핑 2기의 분위기는 달랐습니다. 중국의 경제체제는 지나친 대외 의존형 성장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외부충격에 취약하다는 단점을 안고 있었죠. 세계적인 저성장 속에 미·중의 무역 분쟁이 발발하고 나서부터 등장한 것이 내수 활성화를 강조한 ‘쌍순환(双循环, Dual-Circulation)’ 전략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균형 발전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다시 한번 분배의 시간이 온 것이지요.
룰 테이커가 될 수밖에 없는 기업들
현재의 기조는 중공이 이제껏 중국 경제를 이끌어온 전략 중 하나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기업들은 규제가 억울하겠지만 그들이 철저한 계획경제 속에서 성장하고 시장 지배력을 늘려간 것도 사실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인앱결제 강제 방지법’을 통과시키고, 네이버나 카카오와 같은 플랫폼 사업자의 독점 행위를 규제하려는 것과 중국의 규제는 상당히
궤가 다릅니다. 반독점 이슈가 터질 때마다 적극적으로 항변하고 소송전에 임하거나, 조금씩 양보하여 규제를 지연시켜왔던 빅테크 기업들과는 반대로, 중국 내 기업들은 대부분 “당의 지시를 겸허히 수긍”한다는 식의 입장을 발표하며 발빠르게 당의 명령을 받아들이죠.
그런 점에서 장이밍의 사퇴 소식에는 묘한 뉘앙스가 있습니다. 그는 지난 5월 20일 바이트댄스 전 직원을 대상으로 보낸 편지에서 “CEO 사임 후 지식 공부에 매진하면서 회사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공익사업을 펼치는 데 깊이 참여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앞서 바이트댄스가 당한 규제를 생각해보면 IPO(기업공개)를 앞두고 사퇴하는 젊은 사업가가 할 수 있는 발언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죠. 앞서 중국의 금융 당국에 쓴소리를 했던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은 당국의 집중적인
규제와 압박으로 자취를 감췄다가 반년 만에 공식 석상에서 수척해진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마윈은 공산당원이며 당국의 주요 인물들과 ‘꽌시(关系)’
[4]가 돈독하지만, 그 역시 자유롭진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룰 테이커가 될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다만, 반대로 중공의 요구와 전략을 충실히 수행할 경우 그들에게는 성장의 동력이 되었던 전폭적인 지원이 있으리란 것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덩샤오핑 28자 외교 방침’의 ‘도광양회(韜光養晦)’, 기회를 기다리며 수 세에 힘쓰고, ‘결부당두(決不當頭)’, 앞장서는 일을 피하며, ‘유소작위(有所作爲)’, 때가 되면 움직인다는 문구와도 같은 것이죠. 결과적으로 중국 기업에 있어 중국 공산당은 채찍을 휘두르지만, 때에 따라서는 확실한 당근을 주기도 하고, 여태껏 무슨 수를 써서라도 중국 전체의 경제성장을 주도적으로 이뤄낸 무소불위의 지도 체계입니다.
다만 최근 시진핑 주석을 중심으로 권력을 집중하며 집단지도체제의 변화가 감지되고 있고, 미국으로 망명한 전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 차이샤 교수는 “시 주석이 ‘조직’으로서 공산당을 죽였다”는
발언을 한 만큼, 언제까지 중국 내 기업들과 공민들이 당에 충성할지는 지켜봐야 합니다. 공산당 일당독재의 명분과 당위성이 훼손될 경우 기업들은 당에 충성할 이유가 사라지고, 공민들에게 주입한 ‘중국몽’ 역시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게 변질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중국은 항상
집단지도체제라는 의견도 있는 만큼, 만약 시 주석의 권력 강화가 공산당 내부에서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필요성을 실감하고 의도적인 시 주석 띄우기를 한 것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죠. 현재 중공 지도부의
충성 요구에 대한 중국 공민들과 기업의 신뢰는 내년 당 대회를 기점으로 달라질 수 있으므로 지켜봐야 할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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