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는 어떻게 신자유주의 시대를 종식시켰나
완결

코로나는 어떻게 신자유주의 시대를 종식시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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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해 드릴 콘텐츠는 영국 《가디언》이 발행한 〈코로나는 어떻게 신자유주의 시대를 종식시켰나〉입니다. 북저널리즘은 《가디언》과 파트너십을 맺고 롱폼 콘텐츠를 엄선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1970년대 이래 세계 경제를 장악해 온 신자유주의가 코로나19로 인해 종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컬럼비아대학교 역사학 교수인 저자 애덤 투즈는 코로나를 신자유주의 체제가 만들어 낸 질병이라며, 그린 뉴딜과 같은 진보적 정책이 재조명되는 기회라고 주장합니다.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는 어떻게 달라지게 될지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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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전에 없던 시장 중심의 글로벌 시스템의 위험성과 약점이 드러난 해였다. 이제는 전환점이 다가왔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가디언 디자인/AFP/게티/셔터스톡/신화/로이터
만약 2020년의 경험을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불신’일 것이다. 시진핑이 코로나바이러스의 발생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2020년 1월 20일부터 정확히 1년 뒤, 조 바이든이 미국의 4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날까지 12개월이란 기간 동안 220만 명의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중태에 빠지면서 질병 하나로 인해 전 세계가 들썩였다. 현재 공식적인 사망자 수는 451만 명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최종적인 사망자의 수는 현재보다 두 배 이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사실상 지구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의 일상 활동에 지장을 일으켰고, 공공 생활의 상당 부분을 중단시켰다. 학교들을 폐쇄했고, 가족들을 분리했으며, 여행을 중지시켰고, 세계 경제를 전복시켰다.

이러한 악영향을 억제하기 위하여 각국 정부들이 각 가정과 기업, 시장에 대해 벌인 지원 활동은 거의 전쟁 시기에나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경험할 수 있었던 가장 급격한 경기 후퇴였으며 질적으로도 독특한 불황이었다. 무계획적이며 들쑥날쑥한 것이었기는 해도, 세계 경제의 대부분을 폐쇄하기로 한 집단적인 결정은 그전까지 절대로 볼 수 없던 장면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표현처럼 그것은 “무엇과도 다른 종류의 위기”였다.

무슨 일이 우리에게 닥칠지 알게 되기 이전에도 2020년이 아주 떠들썩한 해가 될 거라 생각될 만한 이유는 많았다. 중국과 미국 사이에는 갈등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새로운 냉전”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2019년 전 세계의 성장세는 심각하게 둔화되었다. IMF는 지정학적인 갈등이 그렇지 않아도 이미 부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세계 경제에 미칠 수 있는 불안정한 영향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었다. 경제학자들은 투자를 저해하는 불확실성을 추적하는 새로운 통계지표들을 만들어냈다. 그걸 통해 산출된 데이터는 문제의 원인이 백악관에 있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었다. 미국의 45대 대통령이었던 도널드 트럼프는 전 세계를 해로운 강박관념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11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는데 설령 그것이 승리로 결론이 난다고 하더라도 선거 과정 자체에 흠집을 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국가 안보 분야의 다보스 포럼이라고 할 수 있는 2020년 뮌헨 안보 콘퍼런스(Munich Security Conference)의 슬로건이 “서방 부재(Westlessness)”였던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 했다.

워싱턴에 대한 우려와는 별개로, 브렉시트 협상은 주어진 시간이 만료되어 가고 있었다. 2020년이 시작되면서 유럽을 더욱 걱정하게 만든 것은 새로운 난민 위기가 닥치리라는 전망이었다. 그 배경에는 시리아 내전의 최종적인 끔찍한 확전의 위협과 저개발로 인한 만성적인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경제적 남반구(global south)의 투자와 성장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본의 흐름은 불안정했고 불평등했다. 2019년 말,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에 사는 저소득층 대출자들의 절반은 이미 더는 이자를 갚을 수 없는 지경에 다다라 있었다.

세계 경제에 만연해 있던 리스크와 불안감은 놀라운 반전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냉전에서 서구가 거둔 명백한 승리, 금융 시장의 부상, 정보기술에서 이룬 기적, 경제성장 궤도의 확대 등을 보면 자본주의 경제는 현대사의 모든 것을 정복한 동력으로써 지위를 굳건히 하는 것으로 보였다. 1990년대에는 대부분의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답이 비교적 간단해 보였다. 그것은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1]”로 요약할 수 있었다. 경제 성장이 수십억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모습을 보면서 마거릿 대처는 “다른 방법은 없다”고 말하곤 했다. 즉 민영화, 가벼운 규제, 자본 및 상품 이동의 자유를 기반으로 한 질서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는 것이었다. 보다 최근인 2005년에 영국의 중도파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는 세계화에 대해서 논쟁을 하는 것은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는 것에 대해서 언쟁을 벌이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2020년에 이르러 세계화와 (기후변화로 인한) 계절에 대해 상당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 해답이었던 경제는 문제 그 자체로 바뀌어 있었다. 90년대 말 아시아에서 시작되고 2008년 대서양 양안의 금융 시스템 붕괴, 2010년의 유로존 위기, 2014년에는 전 세계의 상품 생산을 책임지는 국가들로 옮겨간 일련의 심각한 위기들은 시장경제에 대한 신뢰를 뒤흔들었다. 이런 모든 위기가 극복되긴 했지만, 이는 정부의 지출과 중앙은행의 개입에 인한 것이었기에 “작은 정부”와 “독립적인” 중앙은행에 대한 이전의 굳건한 믿음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이러한 위기들은 투기로 인해 야기된 것이었으며, 이를 안정시키기 위해 유례 없는 규모의 개입이 필요했다. 그러나 전 세계 엘리트 집단의 자산은 계속해서 팽창했다. 이익은 개인이 챙겼지만, 손실은 사회가 책임져야 했다. 이제는 많은 사람이 묻고 있다. “급증하는 불평등이 포퓰리즘적 혼란을 초래한대도 누가 놀라기나 하겠는가?” 한편 중국이 눈부시게 부상하면서 성장의 위대한 신들이 서양의 편이라는 사실도 더이상 확실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2020년 1월, 베이징에서 속보가 날아들었다. 중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대규모로 유행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는 환경 운동가들이 오랫동안 우리에게 경고했던 자연스러운 "반격"이었다. 하지만 기후 위기는 우리가 지구적인 규모로 사고하고, 수십 년 단위로 시간표를 짜도록 만든 반면, 바이러스는 미시적이고 전방위로 퍼지며, 며칠 또는 몇 주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빙하나 바다의 조류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에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우리의 숨결에 의해 옮겨 다녔다. 그것은 단지 일개 국가의 경제만이 아니라 세계 경제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들었다.
 

코로나, 예견된 재앙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것은 이전에 예견되었던 재앙의 특성들을 모두 갖고 있었다. 바이러스 학자들이 예측했던 전염성이 높고 독감처럼 감염을 일으키는 종류와 정확히 일치했다. 학자들은 동아시아 전역에 퍼져 있는 야생동물과 농촌 및 도시의 인구가 밀집된 상태로 상호작용을 하는 지역에서 그러한 전염병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코로나19는 바로 그러한 지역에서 발생했다. 바이러스는 예상대로 전 세계의 운송 및 통신망을 타고 확산되었다. 솔직히 이런 전염병은 꽤 오랜만이었다.

과거에는 코로나19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대규모 전염병들이 있었다. 2020년의 코로나바이러스가 극적일 정도로 새로웠던 것은 그에 대한 대응의 규모였다. 단지 부유한 국가들만이 시민과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자금을 쏟아부은 것이 아니었다. 중저소득 국가들 역시 거액의 돈을 기꺼이 나눠주고 있었다. 4월 초가 되자 중국 이외에도 세계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전염된 상태였는데, 이들은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은 나라 중 하나인 에콰도르의 레닌 모레노(Lenín Moreno)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진정한 1차 세계대전입니다. 앞서 다른 세계대전은 다른 대륙들이 거의 관여하지 않은 채 일부 대륙에서만 한정되어 진행되었지만, 이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어디론가 피난을 갈 수 있는 전쟁도 아닙니다.”

우리의 집단적인 대응을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용어인 봉쇄조치(lock down)는 일상적인 표현이 되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논쟁적이다. 봉쇄조치는 강제성을 의미한다. 2020년 이전에는 봉쇄가 집단적인 감금을 의미하는 용어였다. 이것이 코로나19에 대한 대표적인 대응임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사례들은 많이 있다. 델리, 더반, 파리에서는 무장한 경찰이 거리를 순찰하며 사람들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묻고, 통행금지령을 위반한 사람들을 처벌했다. 도미니카공화국에서는 인구의 거의 1퍼센트에 해당하는 8만 5000명의 사람이 봉쇄조치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폭력이 동원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모든 식당과 술집에 대한 정부의 강제 폐쇄조치는 가게의 주인들과 손님들에게 억압적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봉쇄조치를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경제적 대응으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 일방적인 것 같다. 정부의 명령이 내려지기 한참 전부터 사람들의 이동은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금융시장에서의 안전자산 선호(flight to safety) 현상은 이미 2월 말부터 시작되었다. 사람들을 가둬두기 위해서 교도소가 바빠지는 일은 없었다. 투자자들은 안전한 곳을 찾아갔다. 기업들은 직장을 폐쇄하거나 재택근무로 전환했다. 3월 중순이 되자 문을 닫는 게 표준이 되었다. 수십만에 달하는 선원들처럼 국가의 영토 밖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추방 명령을 받은 사람처럼 바다 위를 표류하는 신세가 되었다.
2020년 1월 시진핑 주석. ⓒ나레슈쿠마르 샤간티(Nareshkumar Shaganti)/알라미(Alamy)
“봉쇄조치”라는 용어가 널리 채택되었다는 사실은 이 바이러스의 정치적 성격이 얼마나 논쟁적으로 변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이다. 사회에서, 지역에서, 가족들 사이에서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두기, 자가격리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이러한 전반적인 상황은 독일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Ulrich Beck)이 80년대에 만든 용어인 “위험사회(risk society)”가 가장 거대한 규모로 나타난 하나의 사례이다. 울리히 벡은 현대 사회가 발전하면서 우리는 오직 과학에 의해서만 감지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위협에 집단으로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실제로 아프기 전까지는 여전히 추상적이며 실체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위협이다. 그리고 운이 없는 사람들이 그러한 위협을 체감했을 때는 이미 자신이 폐 속에 물이 차오르며 서서히 익사해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위험 상황에 대응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건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상상하는 건 순진한 생각이다. 거대한 규모로 삶을 앗아가는 수많은 만성질병과 사회적 병폐들은 무시되거나, 체념하듯 받아들여지거나,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현실”로 취급된다. 특히 기후 위기와 같은 거대한 환경적인 위험과 관련해서 보면, 우리의 일상적인 대응은 그 모든 것을 부정하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전 세계 대다수의 사람이 코로나에 맞서서 싸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벡이 말하듯, 현대사회가 야기하는 진짜 거대하고 만연한 위험에 대해서 말하는 건 쉽지만 실제 행동으로 나서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선 그 위험이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행동과 그것이 속한 사회질서에 대한 비판적인 토론이 요구된다. 여기에는 자원 분배 및 모든 측면에서의 우선순위에 대하여 정치적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적극성이 요구된다. 이 선택은 그러한 결단을 피하기 위해 시장이나 법률을 활용하며 정치를 배제하기 위해 애써왔던 지난 40년 동안의 노력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즉, 전 세계 분업 체계의 구조적인 변화 때문이든, 환경 오염이나 질병으로 인한 것이든 사회적 위험성이 매우 불공평하게 나타나게 되더라도 분배 이슈에서 정치를 배제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또는 시장혁명(market revolution)이 작동하는 기본적인 원칙이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우리의 제도적 준비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벡은 이를 두고 우리의 “조직적인 무책임”이라고 불렀다. 코로나는 정부의 최신 데이터베이스와 같은 국가의 기본적인 행정체계가 가진 약점을 드러냈다. 이러한 위기에 맞서려면 우리에게는 사회복지 서비스에 대해서 훨씬 더 커다란 우선권을 부여하는 사회가 필요했다. 필수 노동자들을 적절하게 평가하고 가장 운이 좋은 사람들이 즐기던 세계화된 생활방식에 의해 야기되는 위험성을 고려하는 “새로운 사회적 계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예상치 못한 곳들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린 뉴딜의 재조명

 

이번 위기에 맞설 책임은 주로 중도 및 우파 성향의 정부들에게 맡겨졌다.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현실을 부정하는 실험을 했다. 좌파 성향인 멕시코의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정부 역시 과감한 행동을 취하는 대신에 독불장군과도 같은 경로를 선택했다.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나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 등은 바이러스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애국심에 대한 호소와 약자를 괴롭히는 전략에 의지해서 상황을 견뎠다.

가장 커다란 압박을 받았던 것은 관리자 스타일의 중도파들이었다. 대표적으로는 미국의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나 척 슈머 상원의원, 칠레의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 그리고 유럽에서는 엠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등이 있다. 그들은 과학을 받아들였다. 부정하는 건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포퓰리스트”들보다 더 낫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정확히 중도의 길을 걷던 정치인들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결국 급진적인 일들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은 즉흥적이고 타협적인 것에 불과했다. 마치 계획적인 것처럼 포장되었지만, 2020년에 나온 EU의 차세대(Next Generation) 프로그램이든, 바이든의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 프로그램이든 그것들은 친환경 현대화, 지속가능한 발전, 그린 뉴딜(Green New Deal)과 같은 레퍼토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2020년 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행정수도인 프레토리아에서 자리를 함께 한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남아프리카의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 ⓒDpa픽처얼라이언스(Dpa Picture Alliance)/ 알라미
그 결과는 쓰라린 역사적 아이러니였다. 미국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나 영국 노동당의 제레미 코빈 전 대표와 같은 그린 뉴딜의 대표적인 옹호자들은 비록 정치적으로 패배하긴 했지만 2020년이 되자 그들의 진단이 얼마나 현실적이었는지 분명히 확인되었다. 환경 문제의 시급성을 정면으로 다루며 그것을 극단적인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와 결부시킨 것이 바로 그린 뉴딜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전에 맞서는 동안 예전 70년대의 전투로부터 계승되고 2008년의 금융위기로 인해 신뢰를 상실한 보수적 경제 독트린에 의해 민주주의가 무력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도 그린 뉴딜이었다. 민주주의가 희망적인 미래를 위해 분명히 의존하고 있는 청년 세대를 동원한 것도 그린 뉴딜이었다. 

그리고 그린 뉴딜은 당연하게도 불평등과 불안정, 위기를 조장하고 재생산하는 시스템을 계속 보수하기보다 그것을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것은 중도파들에게는 어려운 과제였다. 그러나 위기가 가진 한 가지 매력이라면 장기적인 미래에 대한 질문들을 제쳐둘 수 있다는 것이다. 2020년에는 생존이 급선무였다.
 

신자유주의의 종언


코로나바이러스의 충격에 대한 대응으로 즉시 나왔던 경제정책들은 2008년의 교훈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경제를 지원하기 위한 정부의 지출과 조세 감면은 예전보다 훨씬 더 신속했다. 중앙은행들의 개입은 훨씬 더 화려했다. 그들의 재정 및 통화 정책들은 한때 급진적인 케인스주의자들이 주장했으며 현대통화이론(MMT)과 같은 이론에 의해 새롭게 유행을 타고 있는 경제적 교리들이 본질적으로 얼마나 통찰력이 있었던 것인지를 확인해주었다. 국가의 재정은 가정의 씀씀이와는 다르게 사실상 제한이 없다. 만약 국가가 재정을 어떻게 집행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기술적인 차원 이상의 무언가로 취급한다면 그 순간 그것은 정치적인 선택이 된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 진정한 도전과제이자 진정으로 정치적인 질문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합의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낼 수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2020년의 경제 정책 실험들은 부유한 국가들로만 한정되지 않았다. 미국 연준이 찍어내는 풍부한 달러에 힘입은 것이기도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전 세계 자본의 흐름이 요동치는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인도네시아나 브라질을 위시한 많은 신흥국가의 정부에서는 이번 위기에 대해서 주목할 만한 대응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글로벌 금융 통합(financial integration)[2]의 위험성을 회피할 수 있는 일련의 정책들을 가동했다. 아이러니하게도, 2008년과는 다르게 중국이 바이러스 통제에 있어서 거둔 엄청난 성공은 오히려 그들의 경제 정책을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바이러스가 급속도로 확산됐지만 정부가 대규모의 경제 정책으로 대응하지 못한 멕시코나 인도 같은 나라들은 점점 시대적인 분위기에 걸음을 맞추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IMF가 대규모의 재정 적자를 감당하지 않는다며 좌파 성향의 멕시코 정부를 꾸짖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제는 전환점에 도달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과연 이것은 80년대 이후로 전 세계 경제 정책을 압도했던 통설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이것은 신자유주의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였을까? 정부의 일관된 이데올로기로서는,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병든 환경이든 기후 조건이든, 자연스러운 경제 활동의 범위가 규제를 위해 무시되고 시장에 맡겨질 수 있다는 생각은 분명히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회적 충격 및 경제적 충격과 관련하여 시장이 자율적으로 규제할 수 있다는 생각 또한 마찬가지다. 생존이라는 가치는 2008년보다 훨씬 더 긴급하게, 그리고 우리가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마지막으로 목격했던 대대적인 규모의 개입을 지시하고 있었다.

이런 모든 상황은 교조주의적인 좌파 경제학자들의 숨을 헐떡이게 했다. 이는 그 자체로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경제 정책을 교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언제나 비현실적이었다. 현실 속에서 신자유주의는 언제나 철저하게 실용적이었다. 신자유주의의 진짜 역사는 반대 세력을 억압하기 위하여 국가의 폭력을 강제로 투입하는 것을 포함하여 자본 축적이라는 이익을 위해서 국가가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과정이었다. 그 교리가 어떠한 우여곡절을 겪었건 간에 1970년대 이후로 시장혁명과 뒤엉켜 있던 모든 사회적 현실들은 2020년까지도 지속되었다.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제방을 결정적으로 무너트렸던 역사적인 힘은 급진적인 포퓰리즘이나 계급투쟁의 부활이 아니었다. 그 주인공은 부주의한 글로벌 성장과 금융 축적의 거대한 가속장치에 의해 촉발된 전염병이었다.

2008년의 위기는 은행들의 지나친 확장과 주택담보대출의 과도한 유동화로 야기된 것이었다. 2020년의 코로나바이러스는 금융 시스템의 밖에서 가해진 충격이었지만 이러한 충격이 드러낸 취약성은 시스템의 내부에서 생성된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 약한 고리가 은행이 아니라 자산 시장 자체였다. 충격은 그들의 신용 피라미드 전체가 의존하고 있는 시스템의 심장부이자 안전한 자산이라고 추정되었던 미국의 국채 시장에까지 가해졌다. 만약 그것이 녹아내렸다면 미국의 국채를 보유한 세계의 다른 나라들까지 집어삼켰을 것이다.
2020년 3월, 플로리다의 마이애미에서 켜져 있는 통행금지 신호. ⓒ에바 마리 우즈카테기(Eva Marie Uzcategui)/ AFP, 게티이미지(Getty Images)
안정화를 위해 2020년에 투입되었던 국가적 개입의 규모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의지만 있다면, 경제를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들을 이미 갖고 있다는 그린 뉴딜의 기본적인 주장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양날의 깨달음이었다. 왜냐하면 만약 이러한 개입이 주권의 행사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개입은 위기가 주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2008년의 국가적 개입은 잃을 것이 가장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 이번에는 단지 개별 은행들이 아니라 시장 전체에 이를 정도로 너무나도 거대했기에 실패를 선언할 수 없었다. 위기와 안정의 이러한 순환을 분쇄하고 경제 정책을 민주적 주권의 진정한 행사로 만들기 위해서는 뿌리부터 통째로 뒤흔드는 개혁이 필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실질적인 권력의 이동이 필요하지만, 승산은 높아보이지 않는다.

2008년과 마찬가지로 2020년의 대규모 정책적 개입은 양면성을 띠고 있다. 한편에서 보자면 그러한 규모는 신자유주의가 규정한 한계를 무너트렸고, 그에 대한 경제적 논리는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는 케인스 시절에 나온 거시경제학의 기본적인 진단이 옳다는 것을 확인 시켜주었다. 경제가 침체 국면으로 치닫고 있을 때, 우리는 그러한 재앙을 자연스러운 치료의 과정이라거나 원기를 되살리기 위한 일종의 구조조정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정부의 신속하면서도 결단력 있는 정책을 통해서 경제가 붕괴되는 것을 막고, 불필요한 실업이나 낭비, 사회적 고통 등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개입들은 신자유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체제의 전조로 보일 수밖에 없다. 반면에 이것들은 모두 하향식 개입이었다. 이것이 정치적으로 가능했던 이유는 좌파 진영에서의 반대도 없었고, 금융 시스템을 안정시켜야 하는 시급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2020년을 거치면서 미국의 가계 순자산은 15조 달러 이상 증가했다. 그러나 가장 압도적으로 혜택을 본 사람들은 상위 1퍼센트였는데, 그들은 전체 주식의 거의 40퍼센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위 10퍼센트로 범위를 확대하면, 그들은 84퍼센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만약 이것이 정말로 “새로운 사회적 계약”이었다면,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편파적인 계약이었다.

그럼에도 2020년은 단지 약탈의 순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개혁적인 실험의 시기이기도 했다. 사회적 위기라는 위협적인 상황에 맞서서 유럽과 미국은 물론이고 수많은 신흥 경제권에서도 새로운 형태의 복지 정책들이 시도되었다. 그리고 긍정적인 의제를 찾고 있던 중도주의자들은 환경 정책과 기후 위기에 대한 문제들을 전례 없이 수용했다. 코로나19로 인해 다른 중요한 사안들이 관심에서 멀어질 것이라는 우려와는 달리 그린 뉴딜의 정치경제학이 주류로 떠올랐다. “녹색 성장”, “더 나은 재건”, “그린 뉴딜”처럼 표현은 다양했지만, 이런 표현들은 모두 이번 위기에 대한 중도파 진영의 공통적인 대응이 친환경 현대화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2020년 이후의 시대적 방향성


2020년을 환경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기반과 관련하여 신자유주의 시대의 포괄적인 위기로 보는 것은 우리의 역사적인 방향을 가늠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한 조건들로 봤을 때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는 70년대를 기원으로 볼 수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종언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우리 인류가 자연과 불균형적인 관계를 맺은 데서 오는 역풍으로 정의할 수 있는 인류세(Anthropocene) 시대 최초의 포괄적인 위기로도 볼 수 있다.

2020년은 경제활동이 자연환경의 안정성에 얼마나 의존적인지를 드러냈다. 미생물에 불과한 아주 작은 바이러스 변종이 세계 경제 전체를 위협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통화 및 금융 시스템 전체가 거대한 곤경에 처했을 때는 시장과 생계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향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누가 어떻게 지원받을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즉, 어떤 노동자들이나 어떤 기업들이 어떤 혜택을 또는 어떤 세제감면을 받아야 하는가?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면서 지난 반세기 동안 정치경제학의 근간이 되어왔던 장벽들이 허물어졌다. 그 장벽은 경제와 자연을 가르는 것이었으며, 경제학을 사회 정책과 그리고 경제학을 정치와 분리해 놓은 경계선이었다. 무엇보다도 2020년에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근본적인 전제를 허무는 또 하나의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중국의 부상이었다.

2005년에 토니 블레어가 세계화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비웃었을 때, 그가 조롱했던 것은 그들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는 세계화 덕분에 발전하고 있던 아시아 국가들의 밝은 에너지와 비판세력들의 편협한 불안감을 비교했다. 블레어가 인식하고 있었던 이슬람의 테러리즘과 같은 안보 위협은 심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기존의 질서를 바꿀 가능성은 없었다. 거기에는 그저 그들의 자살공격과 이질적인 세계의 비합리성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2008년의 금융위기 이후 10년이 지났을 때, 기존의 질서가 강력하다는 믿음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글로벌 경제 성장이 권력의 균형추를 움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드러낸 것은 러시아였다. 모스크바는 석유와 천연가스의 수출에 힘입어 미국의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자로 다시 부상했다. 그러나 푸틴의 위협은 제한적이었다. 중국은 그렇지 않았다. 2017년 12월, 미국은 인도-태평양 지역을 거대한 권력 경쟁이 펼쳐질 결정적인 무대로 지목하는 새로운 국가안보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을 발표했다. 2019년 3월, 유럽연합(EU)은 동일한 취지의 전략 문건을 발표했다. 한편, 2015년에 중-영 관계의 새로운 “황금기”를 축하했던 영국은 남중국해에 항공모함을 파견하는 놀라운 반전을 보여주었다.
2020년 대통령 선거 운동 당시의 조 바이든. ⓒ 올리비에 돌리에리(Olivier Douliery)/ AFP/ 게티이미지
이러한 군사적 논리는 익숙한 것이었다. 모든 강대국은 라이벌이다. 적어도 “현실주의자”의 사고 논리에 따르면 그렇다. 중국의 경우에는 이데올로기라는 추가적인 요소가 존재했다. 2021년, 중국 공산당은 소비에트의 공산당이 절대로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창당 100주년을 맞이한 것이다. 80년대 이래로 중국은 시장 주도적 성장과 사유 자본의 축적을 허용해왔지만, 베이징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거쳐서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마오쩌둥에 이르는 이데올로기적 유산을 고수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시진핑은 이러한 전통을 고수할 필요성에 대해 더 없이 강조했으며, 소비에트 연방의 이데올로기적 나침반을 상실한 고르바쵸프에 대해 매우 선명하게 비난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냉전은 실제로 “낡은” 냉전의 부활이었고, 서구가 실질적으로 단 한 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던 아시아에서의 냉전이었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를 가르는 두 가지 중대한 차이점이 존재했다. 첫 번째는 경제다. 중국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경제 호황 덕분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서구의 제조업 부문 노동자들에게 피해를 입히긴 했지만, 서구를 비롯한 세계 전역의 기업들과 소비자들은 중국의 발전 덕분에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향후에는 더욱 많은 수익을 기대하게 되었다. 이는 진퇴양난을 초래했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되살아난 냉전은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를 제외한 모든 측면에서 이치에 맞았다.

두 번째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세계의 환경문제와 그것을 가속화하는 데 있어서 경제 성장의 역할이었다. 전 지구적인 기후 문제가 90년대에 처음 현대적인 형태로 대두되었을 때, 미국은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면서도 가장 처치 곤란한 오염의 주범이었다. 당시 중국은 가난했으며, 그들의 탄소 배출량이 세계의 평형 상태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다. 2020년이 되자, 중국은 미국과 유럽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으며, 그러한 격차는 최소한 향후 10년 동안에는 더욱 벌어질 태세였다. 우리는 중국을 제외하고 기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구상할 수 없다. 신종 감염병의 위험에 대한 대응에서 중국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국은 기후 문제와 감염병 모두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인큐베이터이다.

2020년, 유럽연합에서 친환경 현대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여러 전략 문건에서 중국을 체제의 라이벌이자 전략적 경쟁자인 동시에 기후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파트너로 규정함으로써 이러한 이중적인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기후 문제를 부인함으로써 스스로 편히 행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워싱턴 역시 베이징을 이념적으로는 비난하면서도 전략적으로 복잡한 계산을 해야 했고, 중국에 대한 장기적인 민간투자도 고려해야 했으며, 거기에 더해 무역협상을 빠르게 마무리하고자 하는 대통령의 욕심이 맞물리면서 경제적 딜레마에 빠졌다. 이것은 불안정한 조합이었으며, 2020년이 되자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중국은 전략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미국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재규정되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 정부의 정보기관과 안보부서, 법무부는 중국과의 경제전쟁을 선포했다. 시장을 폐쇄하고 마이크로칩과 그 마이크로칩을 만드는 부품의 수출을 금지함으로써, 그들은 현대 경제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의 첨단기술 분야의 발전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미중 간의 갈등이 이렇게 고조된 것은 어느 정도 우연적인 측면이 있다. 중국의 부상은 세계사적으로 볼 때 장기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베이징의 성공적인 대처와 그로 인해 더욱 커져 버린 중국의 위상은 트럼프 행정부에는 경고의 신호였다. 한편, 금융과 기술, 군사력 측면에서의 세계적인 우위를 떠받치고 있던 미국의 국내 현실에는 문제점이 많다는 사실이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었다. 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치자 미국의 보건의료 시스템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고, 그들의 사회안전망은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빈곤의 나락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지 못했다. 시진핑의 “차이니스 드림(Chinese Dream, 中國夢)”이 2020년을 거치면서도 온전하게 살아남았던 반면,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은 절대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다.
 

미국식 민주주의의 미래


따라서 2020년 신자유주의의 전반적인 위기는 미국에 있어서, 특히 미국 정치권의 일부에게는 대단히 충격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었다. 공화당과 그들을 지지하는 민족주의적이며 보수적인 유권자들은 2020년에 실존적인 위기라 할 만한 고통을 겪었다. 그것은 미국 정부에, 미국의 헌법에, 미국과 세상의 관계에 심각한 피해를 줬다. 이러한 위기는 2020년 11월 3일부터 2021년 1월 6일 사이에 절정에 달했다. 트럼프는 대통령 선거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공화당의 많은 이들이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사회적인 위기가 찾아왔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 과정에서 코로나19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었다. 결국 1월 6일, 대통령을 비롯한 공화당의 주요 인사들이 시위대를 자극해서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당연히 미국식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서 깊은 우려가 제기되었다. 그리고 미국 정치권의 극우 세력들을 파시스트라고 설명할 수 있는 요소들도 충분했다. 그러나 2020년의 미국에서는 파시스트를 정의하는 오리지널 공식에서 두 가지의 기본적인 요소가 빠져 있었다. 하나는 전면전이다. 미국인들은 남북전쟁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한 내전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최근까지 외국에서 벌인 일련의 전쟁들은 미국 사회를 무장병력에 의한 치안유지와 준군사주의(paramilitary)라는 환상에 빠트렸다. 그러나 전면전은 사회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전면전을 하려면 2020년의 미국처럼 개개인들로 구성된 특공대원들이 아니라 집단을 구성해야 한다.

고전적인 파시스트 공식에서 빠진 또 하나의 요소는 사회적인 적대감이다. 그것은 상상에 의한 것이든 실재하는 것이든 간에 좌파 진영이 사회경제적 현실에 대해 제기하는 위협이다. 2020년에 헌정사상 초유의 위기가 닥치자 미국의 기업들은 트럼프에 대항해서 대규모로, 그리고 정면으로 맞섰다. 미국 재계의 주요 인사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는 이유를 주주들의 가치, 회사의 노동자들이 정치적으로 분열되었을 때의 문제점, 법치주의의 경제적 중요성, 그리고 다소 의외이긴 하지만 내전이 일어날 경우에 예상되는 매출의 손실 등을 포함하여 비즈니스적인 관점에서 설명했다.
2019년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의원. ⓒ마이클 레이놀즈(Michael Reynolds)/ EPA
2020년에 미국이 보여준 자본과 민주주의의 일치단결은 안심되는 것이어야 했지만, 그건 어느 정도까지였다. 잠시 다른 시나리오에 대해서 고려해 보자. 만약 코로나바이러스가 미국에 몇 주만 더 일찍 유입되었고, 그 확산세가 버니 샌더스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를 높여주어 보편적인 의료서비스를 요구하는 그의 주장에 더욱 힘이 실리면서 민주당 경선에서 조 바이든이 아니라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샌더스에게 결선 티켓을 안겨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미국 재계가 모두 한 마음이 되어 샌더스의 당선을 막기 위해 전적으로 트럼프를 지지했으리라는 건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만약 샌더스가 대선에서도 과반수를 획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미국의 헌법을 비롯한 미국 사회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이 시험대에 올랐을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시나리오들을 고려해봐야만 한다는 사실은 2020년의 동시다발적인 위기가 매우 극단적이었음을 시사한다.

조 바이든이 당선되고 그의 취임식이 2021년 1월 21일에 예정대로 진행되면서 사회는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바이든이 “미국이 돌아왔다”고 대담하게 선언했을 때 우리가 다음에 던져야 할 질문이 무엇인지는 더욱 명확해졌다. 어떤 미국이, 어떻게 돌아왔다는 것인가? 신자유주의의 전면적인 위기가 한때는 죽어 있던 정치의 중심에서 창조적인 지적 에너지를 해방시켰을 수 있다. 그러나 지적 위기가 새로운 시대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활력을 준다면, 그것은 또한 우리를 곤경에 빠트리기도 한다. 우리는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그것을 정말로 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대체 그런 우리는 누구인가?

영국과 미국, 브라질이 보여주고 있듯이, 민주주의 정치는 생경하면서도 낯선 새로운 형태를 취해가고 있다. 사회적 불평등은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더욱 악화되고 있다. 적어도 부유한 나라들에서는 집단적인 대항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가들은 위험성을 계속 급증시키는 경로로 축적을 지속하고 있다. 우리가 새로 발견한 재정적 자유의 주된 용도는 재정의 안정을 위한 점점 더 기괴한 노력들이다. 서방과 중국의 적대관계는 냉전 종식 이후로는 볼 수 없었던 방식으로 세상의 거대한 부분을 갈라놓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그 괴물은 코로나라는 형태로 찾아왔다. 아직은 온순한 규모이기는 하지만 인류세는 숨겨두었던 송곳니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코로나는 우리가 예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는 아니었으며 2020년의 현실은 전면적인 경계 태세도 아니었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툭툭 털고 일어나서 상황이 회복되는 것을 즐기는 대신에 오히려 진지하게 성찰을 해야한다. 전 세계의 사망자 수를 정확히 집계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추정해 보자면 10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매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2020년은 그러한 현실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한 해였다.
[1]
1992년 미국 대선 당시 빌 클린턴 후보 진영에서 내세웠던 구호
[2]
인접한 국가들이나 세계 경제의 금융시장이 서로 긴밀하게 연동되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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