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 폭력이란 말은 없다

10월 14일 - 데일리 북저널리즘

마포구 데이트 폭력 사건을 화두로 관련 기사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데이트 폭력’이란 말에 사회적 합의가 있었는가.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사람이 죽었습니다. 지난 7월 25일 새벽 2시 50분의 일입니다. 마포구 한 오피스텔 입구에서 벌어진 가해 장면이 CCTV에 찍혔습니다. 상해치사로 기소된 가해자는 피해자의 연인이었습니다.

일명 ‘마포구 데이트 폭력’으로 검색창을 뜨겁게 달군 사건입니다. 가해자가 살인이 아닌 상해치사로 기소된 후, 피해자 유가족은 청와대 게시판에 국민청원을 올렸습니다. 한 달만에 53만 명의 동의를 얻은 해당 사건에, 지난 9월 25일 청와대 측이 답변을 발표했습니다.
 
답변에서 눈에 띄는 단어가 있습니다. ‘데이트 폭력’입니다. “남자친구에게 폭행당해 사망한 딸의 엄마입니다”. 피해자 어머니가 올린 청원의 제목입니다. ‘데이트 폭력’이란 단어는 그의 청원 중 마지막 “데이트폭력가중처벌법 신설을 촉구”한다는 문장에 1회 사용되었습니다. 반면 청와대 측 답변에는 이 단어가 총 16번 등장합니다. “오늘은 데이트 폭력으로 사망한 사건을 고발하신 청원에 답변” 드린다는 문장으로 시작해, 현재까지 데이트 폭력 사안에 경찰 측이 해온 제도적 노력과 향후 데이트 폭력 사건들의 처리 방침 등이 주 내용을 이루는데요.

청와대 측이 말한 ‘지금까지 관심 가져왔고 앞으로 더욱 처벌을 강화할’, 데이트 폭력의 개념이 한 번이라도 합의된 적 있었나요?
 

데이트 폭력이 뭔가요?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 따르면 데이트 폭력은 ‘데이트 관계에서 발생하는 언어적・정서적・경제적・성적・신체적 폭력’을 의미합니다. 한국데이트폭력연구소는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난 모든 폭력’을 데이트 폭력으로 좀더 넓게 규정하죠. 2017년 11월, 신보라 전 국회의원은 ‘데이트 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에서 데이트 폭력을 ‘서로 합의하여 교제관계에 있거나 있었던 사람 중 한 명 이상에 의하여 발생하는 신체적・정서적・경제적 폭력이나 그 위협’으로 정의했습니다. 정의가 많아 보아야, 경찰 실무에서는 ‘연인 간 폭력’이라는 용어가 통용됩니다. 데이트 폭력이란 단어는 정의가 명확하지 않으며 학술지 및 언론, 법적 공방에서도 데이트 폭력, 젠더 폭력, 연애 폭력, 이별범죄 등 각기 다른 단어들을 혼용하고 있습니다. 즉 현재 데이트 폭력은 하나의 개념이라기보단 특정 현상들을 바라보는 프레임에 가깝습니다.

기준이 불분명한 것은 우리나라뿐이 아닙니다. 영미권에서도 ‘데이트 폭력’에 대해 합의된 정의는 없습니다. 한국의 ‘데이트 폭력’이 유래한 영어의 ‘dating violence’ 혹은 ‘dating abuse’의 경우 미국에선 주마다 다르게 정의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domestic violence’ 즉 ‘관계 내 폭력’이란 개념인데요. ‘domestic violence’란 ‘모든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으로, 부부·형제·자식·연인 등 어떠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이든 해당됩니다. 즉 영미권에선 데이트 폭력이 발생했을 때 이 ‘domestic violence’의 범주에서 주로 다뤄집니다. 영국의 경우 데이트 폭력을 당했을 때 ‘national domestic abuse helpline’로, 미국의 경우 ‘domestic violence hotline’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그 때문이죠.

데이트 폭력 처벌법이 따로 없다고 해서 가볍게 처벌되지 않습니다. 영국의 경우 데이트 상대의 폭력 전과를 사전에 조회할 수 있는 클레어법이 2014년부터 시행되고 있으며, 캐나다의 앨버타 등 일부 주에서도 같은 법을 도입했습니다. 또한 죄질을 측정할 때 ‘의도성’을 중시하는 미국에선 데이트 폭력을 오히려 더 엄중히 다룹니다. 피해자・가해자가 친밀한 관계였음을 감안하면, 데이트 폭력은 그 의도성과 반복성을 고려해 더 큰 형량을 내릴 수 있는 것이죠. 반면 현재 한국에선 데이트 폭력 사건이 발생해도 일반 ‘성폭력’, ‘폭행’, ‘상해 치사’ 등의 범죄로 분류하는 것은 물론, 개별 사례에 따른 신중한 처벌보단 일괄적인 사후 처벌식의 기조가 강합니다.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데이트 폭력이란 개념이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인데, 피해자 보호 차원에서 차이가 나는 이유입니다.
 

데이트 폭력을 둘러싼 사각지대

2019년 데이트 폭력 검거 범죄 유형 ©KOSTAT 통계플러스
데이트 폭력을 일반 범죄와 같은 범위로 치부하는 현상, 이대로 괜찮을까요. 《KOSTAT 통계플러스》 2020년 가을호에 따르면 데이트 폭력 신고 건수는 2017년 1만 4136건에서 2019년 1만 9940건으로 약 40퍼센트 증가했습니다. 단순히 일반 성폭력, 폭행 등에 포섭하기엔 무시할 수 없는 숫자입니다. 2019년 검거 기준, 폭행·상해, 성폭력, 감금, 살인미수 등 범죄 유형 또한 다양합니다.

데이트 폭력이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이번 마포구 사건이 처음은 아닌데요. 가장 최근으론 2017년, 래퍼 아이언의 연인 폭행 사실이 알려졌을 때였습니다. 유명 래퍼의 범죄 사실과 함께 관련 데이트 폭력 사례를 소개하며 매체가 한창 떠들썩했죠. 최근 ‘마포구 데이트 폭력’ 사건이 터지자 그간의 데이트 폭력 사례들을 조명하기 시작한 것과 비슷한 양상입니다. 아무튼 그래서일까요, 2017년도는 데이트 폭력에게 가장 유력한 기회가 있던 해였습니다. 표창원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박남춘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신보라 전 자유한국당 의원, 함진규 전 자유한국당 의원 등 각 당 국회의원들이 너도나도 데이트 폭력 관련 특례법안을 발의한 해였으니까요. 20대 국회의 종료와 함께 그 법안들은 모두 계류되었지만요.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데이트 폭력에 대한 조항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나요? 대답은 ‘거의 그렇다’입니다. 미국에선 데이트 폭력 가해자를 체포해 피해자와 격리하는 여성폭력방지법이 시행되는 반면, 국내에선 어떤 데이트 폭력 상황에도 격리 조치가 불가능합니다. 2년 이하 징역형 혹은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한다고 하나, 대부분 집행유예나 벌금형으로 풀려나는 경우가 많죠.  가정폭력처벌법이 있지만 데이트 폭력 사건에선 영향이 미미합니다. 해당 법안은 가족 관계를 증명할 수 없는 사람에겐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가족 관계를 증명한다 해서 피해자에게 유리한 법도 아닙니다. 1조 1항에 명시된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가꾸며 피해자와 가족구성원의 인권을 보호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대목이 특히 인상적인데요. 피해자보다 가정에 대한 보호가 선두에 명시된 법안이죠.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그나마 최근 개정돼, 다가오는 10월 21일 시행 예정인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국내 데이트 폭력의 나아진 현주소입니다. 그간 스토킹은 경범죄에 해당되는 ‘지속적 괴롭힘’으로 분류돼 ‘10만원 이하 벌금이나 구류 또는 과료’에 그쳐 왔는데요. 일명 ‘스토킹 처벌법’ 발의 22년 만에, 드디어 3년 이하 징역 혹은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형량을 늘린 법안을 시행합니다. 하지만 해당 법안이 데이트 폭력 범죄를 뾰족하게 겨냥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스토킹을 제외한 나머지 데이트 폭력 사건들은 어떻게 처벌할 수 있을까요. 데이트 폭력은 단순히 ‘지속적 괴롭힘’이 아니라 폭행·상해, 성폭력, 감금, 살인미수와 같은 다양한 유형의 범죄로 번져 왔는데요.
 

데이트 폭력이란 말은 사라져야 하는가?

Why domestic violence victims don't leave ©TED

데이트 폭력의 심각성이 퍼지며, 일각에선 ‘데이트 폭력’이란 용어에도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명칭에 포함된 ‘데이트’라는 단어가 범죄를 연인 간의 관계로 미화할 가능성,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데이트 폭력’이란 표현이 갖는 윤리적 함의뿐 아니라 논리적 오류도 지적됩니다. 범죄가 발생한 시점은 이미 오래 전에 관계가 끝났을 때인데, 왜 유효하지도 않은 ‘데이트’를 명칭에 포함하냐는 논지입니다. 서두에 짚었듯, 데이트 폭력에 대한 공통된 개념을 합의 보기도 어려운데 말이죠. ‘데이트 폭력이 아니라 살인입니다’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하나 둘 보이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해당 범죄가 가진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데이트 폭력 상황을 규정하는 말은 엄연히 존재해야 합니다. 다른 표현으로 대체하더라도요.

피해자・가해자 관계의 특수함에서 배가되는 폭력성 때문입니다. 일반 성범죄, 살인과 달리 데이트 폭력에는 주거 침입, 개인정보 유출, 보복성 폭력 등 추가적인 위험 요소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피해자가 가해자를 두둔하는 현상은 다른 어떤 범죄에서도 볼 수 없는 데이트 폭력의 특수한 지점입니다. 가스라이팅이니 스톡홀름 증후군이니, 수많은 신조어가 통용되지만 피해자가 가해자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기묘한 조항도 감안해야 합니다. 일명 반의사불벌죄입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각 법안에 딸린 ‘이 죄는 피해자의 명시한 의사에 반하여 공소를 제기할 수 없다’는 문구로 흔히 알아볼 수 있는데요. 경범죄에 대해선 당사자들 선에서 유연하게 분쟁을 해결할 수 있으며,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의 신변 노출 등 원치 않는 2차 가해를 방지할 수 있다는 순기능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가해자의 폭력을 수용하는 정도가 일반 범죄보다 높은 데이트 폭력의 경우, 이 조항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까요. 공정한 판결을 위해서라도 데이트 폭력 상황을 대변할 만한 용어가 분명히 존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위장 폭력? 관계 폭력? 파트너 폭력?


이전에는 일반 성범죄의 일환으로, 혹은 폭행 사건 등으로 분류되었으나 현재 우리는 ‘데이트 폭력’이란 신조어가 통용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 데이트 폭력은 주먹구구식 프레임이 아닌, 보다 정확한 함의를 지닌 단어로 재정의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이별범죄, 가스라이팅, 스토킹, 디지털 스토킹과 같은 관련 범죄들을 체계적으로 다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존 표현을 활용하자면 ‘데이트 빙자 폭력’으로 재정의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추리면 ‘위장 폭력’도 가능합니다. 혹은 영미권의 ‘domestic abuse’에서 차용해, 관계를 남용할 때  더 큰 위험을 지닌다는 의미에서 ‘관계 폭력’으로 정의할 수도 있겠죠. 현재의 연인, 과거의 연인 구분 없이 적용될 수 있는 ‘파트너 폭력’도 한 선택지입니다. 핵심은 특수한 상황의 피해자를 보호할 특수한 법안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보편적으로 납득 가능한 용어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추가로 다소 이른 논의를 꺼내 봅니다. 현재 ‘데이트 폭력’은 특정 성이 가진 물리적 힘과 폭력이라는 단어가 만나, 마치 하나의 이미지로 굳어져 있습니다. 주로 남성 가해자와 여성 피해자의 구도에 세간이 주목합니다. 데이트 폭력 강력 범죄에서 해당 구도가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남성 피해자나 동성 커플 등 다른 구도의 폭력, 또는 폭력과 정당 방위의 구체적인 기준점에 대한 논의까지 나아가길 기대합니다. 논의가 예민해질수록, 우리는 안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데일리 북저널리즘에서는 '데이트 폭력'이라는 표현에 담긴 함의들을 살펴봤습니다. 읽으시면서 들었던 생각을 댓글로 남겨 주세요. 서로 다른 의견을 말하고 토론하면서 사고의 폭을 확장해 가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댓글이 북저널리즘의 콘텐츠를 완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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