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슈퍼맨, 세상이 바꾼 슈퍼맨

11월 9일 - FORECAST

슈퍼맨이 양성애자로 커밍아웃한다. 우리들의 롤모델이 달라지고 있다.

오는 11월 16일 DC 코믹스 《슈퍼맨: 칼-엘의 아들》 5편에서 슈퍼맨이 양성애자로 커밍아웃 예정이다. 세계관 최강의 히어로가 전면적인 커밍아웃을 하는 건 처음이다. 우리들의 롤모델이 달라지고 있다. 잘 나가던 슈퍼맨은 왜 갑자기 커밍아웃을 할까? 슈퍼맨은 대중문화 시장을 넘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일까?
WHY_ 슈퍼맨의 커밍아웃을 지금 읽어야 할 이유

우리의 꿈은 대통령이기 이전에 슈퍼맨이었다. 오랜 추억의 한 부분을 차지한 우상이다. 그랬던 슈퍼맨이 갑자기 성 소수자로 돌변한다. 이건 슈퍼맨 한 명의 결정이 아니다. 슈퍼맨을 그리는 톰 테일러 한 명의 결정도 아니다. 슈퍼맨은 시대 문화적 상징이다. 지금 슈퍼맨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단지 어린 시절의 추억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도 모른 채 수십 년 전 낙인된 대중문화의 고정 관념일 수 있기 때문이다.
MONEY_ 52억

슈퍼맨은 1938년 DC 코믹스사의 《액션 코믹스》 1권에서 처음 등장했다. DC 코믹스는 슈퍼맨을 세상에 처음 소개한 만화 잡지이자 다음 주 커밍아웃할 슈퍼맨을 제작 중인 회사다. 마지막으로 거래된 액션 코믹스 1권의 값은 52억 4800만 원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만화책이다. 배트맨의 등장으로 2위를 차지한 《디텍티브 코믹스》 27권의 가격인 28억 원에 비해 두 배 가까이 차이 난다. 슈퍼맨 시리즈는 누적 판매 부수 6억 부로 추정된다. 코믹스 역사상 부동의 1위다. 슈퍼맨은 지난 80년간 파란 슈트와 붉은 ‘S’ 마크로 미국 만화 산업의 거대 파이를 이끌어 온 문화적 상징이다.
KEYMAN_ Jay

제이 나카무라(Jay Nakamura)는 이번에 출시하는 《슈퍼맨: 칼-엘의 아들》에서 뉴 슈퍼맨 존 켄트(Jon Kent)와의 연인 관계로 비칠 예정이다. 핑크색 머리에 안경을 쓰며 직업은 학생이자 저널리스트다. 그리고 포스트휴먼이다. 위기 상황에서 슈퍼맨이 제이를 구하려 하지만 그의 손은 제이의 몸을 통과한다. 제이는 그만큼 위기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초능력을 갖고 있다. 슈퍼맨의 오랜 여자친구이자 평범한 지구인이었던 로이스 레인과 다르다. 슈퍼맨 스토리는 점점 히어로가 인류를 구하는 우상의 신화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이번 시리즈에서 제이가 중요한 것은 LGBTQ의 관계를 보여 주기 때문만이 아니다. 히어로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모양에서 수평적이고 역동적인 모양으로 나아감을 보여주는 핵심 인물이기 때문이다.
CONFLICT_ 두퍼맨

DC 코믹스가 슈퍼 보이의 커밍아웃을 예고하자 전 세계 여론이 술렁거렸다. 정치적 올바름을 이용해 이익을 얻으려 한다는 비판을 한 몸에 받았다. 미국 애리조나 상원의원 웬디 로저스는 트위터에서 “슈퍼맨은 게이가 아닌데 할리우드는 그를 게이로 만들려 하고 있다. (게이 캐릭터가 필요하면) 차라리 '두퍼맨(Thooperman)'이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라. 그래야 모두가 미리 알고 그걸 안 볼 수 있으니 말이다”라고 발언해 화제가 되었다. 1990년대를 뜨겁게 달군 슈퍼맨의 TV 시리즈물 〈로이스 앤 클락〉에서 슈퍼맨 역을 맡았던 배우 딘 케인 또한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로이스 앤 클락〉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슈퍼맨 클라크 켄트와 연인 로이스의 사랑 이야기에 주안점을 둔 시리즈였다. 30년 전 연기했던 캐릭터가 완전히 다른 정체성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배우 입장에서 달가울 리 없다. 그는 DC 코믹스가 “용감하지도 대담하지도 않으며 시류에 편승한다”고 평했다.
REFERENCE_ 마블

성 소수자 캐릭터는 슈퍼맨이 처음이 아니다. DC 코믹스의 경쟁사 마블 코믹스는 여러 차례 LGBTQ 캐릭터들을 등장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1954년 “배트맨은 게이다”라는 정신과 의사 프레더릭 웨덤의 주장으로 배트맨 시리즈는 직격탄을 맞은 바 있다. 배트맨의 조수 팀 드레이크는 최근 공식적인 양성애자로 드러났다. 마블 코믹스의 청소년 슈퍼 히어로 팀 ‘영 어벤져스’의 허클링과 위칸은 연애를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6월 캡틴 아메리카 80주년을 맞아 마블이 만든 《캡틴 아메리카의 미국》 시리즈에 등장하는 아론 피셔 또한 게이다. 이번 슈퍼맨의 커밍아웃은 갑작스레 정치적 올바름에 편승하는 게 아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마블의 실험을 지켜본 후 터뜨리는 결정적인 한 방이다.
RISK_ 라푼젤

디즈니는 라푼젤과 엘사를 탄생시켰다. 라푼젤은 스스로 성을 탈출했고 엘사는 가족과 왕국을 구했다. 둘 다 이전엔 볼 수 없던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사람들은 사랑스러운 공주의 틀을 깬 여성 캐릭터에 환호했다. 엘사와 안나의 관계를 동성애로 보는 여론까지 존재한다. 그러나 왜 남성 캐릭터에선 이런 시도가 미미했을까? 마블 코믹스는 2009년에 디즈니에 인수된 자회사다. 디즈니가 지난 12년간 마블에선 엘사나 라푼젤 같은 파격적인 시도를 하지 않은 이유는 젠더 관념을 깬 남성 캐릭터는 인기가 없으리라는 상업적 판단 때문이다. 디즈니는 가족들이 상영관에 함께 보러오기 좋은 영화들을 만든다. 남성 성 소수자는 아직 대중의 호감을 살 히어로가 아니다. 슈퍼맨의 이번 커밍아웃이 과한 설정이라는 건 표면적인 비난이다. 그 속엔 게이가 레즈비언보다 미움받는 우리 사회의 단면이 숨어 있다.
RECIPE_ 이터널스

디즈니 공주들만큼의 변화는 아니더라도, 마블 영화에서도 이전과 다른 변화가 보이긴 한다. 바로 최근 개봉한 영화 〈이터널스〉다. 비록 주연 배우들의 연기는 아니지만〈이터널스〉는 동성 간 키스신이 등장하는 최초의 마블 영화다. 그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일부 중동권 국가에서 상영 금지가 내려졌다. 마블 측이 해당 장면을 삭제하고 정부에 상영을 재요청했다면 히어로물의 감수성은 제자리걸음이었을 것이다. 삭제를 거부하고 상영 금지에 수긍함으로써 마블은 제2의 〈이터널스〉가 탄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었다.
NUMBER_ 26년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한국 최초의 공식 퀴어 영화는 1995년 박재호 감독이 제작한 〈내일로 흐르는 강〉이다. 한국 퀴어 영화사는 올해로 26주년이다. 한국 영화사가 공식 101주년을 맞이한 것에 비하면 턱없이 어린 나이다. 이뤄낸 성과보단 이뤄야 할 과제가 많다. 그런데 이루기도 전에 외면받고 있다. 한국 퀴어 영화는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이 대다수다. 자극적이지 않으면 관객을 사로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야간비행〉의 이송희일 감독은 배급사로부터 ‘퀴어 영화는 더이상 팔리지 않으니 키치한 해피엔딩의 달달한 로코물로 만들어 보라’는 말을 들었다. 박상영의 소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동성애를 훈장처럼 전시하지도, 대상화해 신파로 소모해버리지도 않는 순도 백 퍼센트의 퀴어 영화를 만들리라” 다짐하지만 이내 대차게 패하는 퀴어 감독의 실패담이다. 작년 출간된 국내 유일의 퀴어 영화 연구 서적 《한국퀴어영화사》 책임편집자 이동윤은 한국은 퀴어 영화에 대한 연구도 연구자도 부족하다고 평했다. 그러나 지난 26년간 한국 퀴어 영화에 무엇보다 부족했던 것은 관객의 관심이었다.
INSIGHT_ 대중문화

갤럽이 작년 미국 성인 1만 5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성적 성향에 대한 설문 조사에서 약 13퍼센트가 본인을 양성애자, 게이, 레즈비언 혹은 기타 성 소수자라 밝혔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성 소수자 인구에 대한 제대로 된 통계는 한 건도 없다. 기껏 해야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가치관 실태조사에 ‘동성애’ 관련 항목이 있을 뿐이다. 퀴어에 대한 논의 자체를 불편해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4년 전 문재인 대통령은 “동성애는 찬성하나 동성애 합법화는 반대한다”는 발언으로 논란이 됐었다. 해당 이슈는 결국 정치적 소란으로 이어지다 흐지부지됐다. 경험과 지식의 간극을 좁힐 논의가 필요하다. 그 시작점은 대중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인식을 바꾸는 것은 학자의 논문이나 정치인의 발언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친숙하게 지내 온 엘사, 라푼젤, 슈퍼맨 같은 캐릭터들이다. 대중문화의 낙인 효과는 곧 사회적 시선으로 자리 잡는다. 퀴어 이슈에 관한 어떤 지식인의 말과 글보다도 슈퍼맨의 커밍아웃 한 번이 더 주목받는 게 그 증거다.
FORESIGHT_ 롤모델

현 슈퍼맨 코믹스 작가 톰 테일러가 말했다. “세계 최강자가 LGBTQ 커뮤니티의 일원일 때 미래가 어떨지 상상할 수 있을 거다.” 슈퍼맨은 수많은 히어로 중에서도 무소불위의 최강자다. 이번 슈퍼맨의 커밍아웃은 단지 세상엔 다양한 취향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의 롤모델이 새로운 롤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제2, 제3의 슈퍼맨들이 탄생하도록 만드는 시발점이다. 2010년 칸 영화제에 퀴어종려상이 생기기 전까지 퀴어 영화는 떳떳한 장르로 주목받지도 못했다. 한국에선 여전히 극장 문을 두드리기도 어렵다. 그렇기에 DC 코믹스가 다른 누구도 아닌 가장 위대한 슈퍼맨을 건드린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퀴어를 다루는 수많은 영화들이 제도권에 들지조차 못하지만 슈퍼맨은 이미 제도권 내 최강자다. 지난 80년간 수많은 사람들의 선망을 받아온 롤모델과 함께라면, 퀴어 영화도 한 발 나아갈 수 있다. 비단 영화의 문제가 아니다. 만화 속 슈퍼맨에 이어 현실판 슈퍼맨이 나와야 한다. 우리가 확장된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게끔 하는 롤모델이 필요하다. 미국엔 라파엘 보스틱이 있다. 대만엔 오드리 탕이 있다. 한국의 첫 번째 슈퍼맨은 누가 될 것인가. 슈퍼맨이 말했다. “진실, 정의, 그리고 더 나은 내일을 만드는 게 나의 미션이다.” 이번 슈퍼맨의 커밍아웃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세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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