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의 블랙박스
7화

북저널리즘 인사이드; 인간을 닮은 기술

유튜브를 장기간 소비하다 보면 다음 동영상이 자동 재생되어도 의식하지 못하는 수준에 이른다. 습관적으로 홈 화면에서 스크롤을 내리다 취향에 맞게 정렬된 동영상 중 하나를 선택한다. 원하지 않는 동영상은 추천하지 않도록 손쉽게 설정할 수 있지만, 새롭게 보고 싶은 영상이 있다면 찾아서 봐야 한다. 비슷한 영상이 추천 목록에 뜨도록 만들려면 관련 영상을 일정 기간에 걸쳐 여러 개 봐야 한다. 간혹 추천 경로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동영상이 나왔을 때 너무 재미있거나 유익하다면 우리는 ‘킹고리즘’을 외친다. 요컨대 알고리즘에 감탄하는 것은 계량화할 수 없는 취향을 저격 당했거나 새로이 즐길 무언가를 제시했을 때다.

추천은 양가적이다. 옷 가게 점원의 판매 방법을 생각해보자. 보통 고객의 스타일을 파악하여 유사한 옷을 꺼낸 뒤 “이것도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라는 말과 함께 제시한다. 한편 고객이 시도해보지 않았을 법하지만, 점원이 추구하는 감각에 맞거나 유행인 옷을 꺼내며 “이런 건 어때요?”라고 할 수도 있다.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의 차이다. 알고리즘은 미디어 영역에서 명목상 두 종류의 추천을 모두 수행하지만 후자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추천을 기대하는 심리에서 후자가 차지하는 영역은 적지 않다. 춤에 하나도 관심 없던 시청자가 우연히 댄스 경연 TV 프로그램을 보고 댄서 출연자의 팬이 되어 “이 프로가 아니었다면 당신을 영영 몰랐을 것”이라고 반응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기술 발전은 개인주의를 수월하게 했다. 인간은 기술이 세분화된 사적 취향을 일정 수준 고려해 준다는 이유로 커뮤니케이션의 단절과 고립을 용인했다. 세밀한 취향이 맞는 친구는 온라인에서 더 쉽게 사귈 수 있지만 현실 세계는 그 커뮤니티의 구성원으로만 채울 수 없다. 실재는 갈등의 연속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마주치고 갈등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성숙이 이루어진다. 편향된 정보로 구축한 세계관은 건강한 파편화가 아닌 부족주의를 낳는다. 이미 일상의 상당 부분이 미디어에 종속된 현대인에게, 모사된 표상은 실재에 버금간다. 자동화된 미디어 기술이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맞닥뜨려야 하는 정보를 선제적으로 배제하는 것이 무서운 이유다.

알고리즘이라는 거대한 지식 논리의 작동을 위해 우리가 제공한 정보는 차갑게 계량화된다. 수치화할 수 없는 숱한 가치가 우악스럽게 숫자로 해부되어 불편한 범주화가 이루어진다. 인간은 장기 조각과 신체 조직을 사후 조합하여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의 엄청난 발전으로 거기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한들 한 사람의 가치는 그간의 기억과 언행, 남들 기억 속의 모습일 것이다. 알고리즘이 구현한 표상은 적당히 그럴듯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메스껍다. 알고리즘은 알면서 덮어두는 일이 없이 우리 몸속의 장기를, 인간 사회의 편향과 과오를 천진하게 꺼내 보인다.

적당히 비슷한 옷을 추천해주는 점원 혹은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오는 불편한 파파라치는 인간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나름의 순기능을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미래를 보여주진 않는다. 알고리즘이 구현한 가상 세계는 우리가 고민하고 씨름해야 할 문제를 던지는 저널리즘의 영역에서는 구분될 필요가 있다. 기계적 분석이 내놓은 결과는 통찰과 전망이라 부를 수 없다. 인간을 닮은 기술이지만 결코 인간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현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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