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은 사람들

11월 25일 - FORECAST

조력자살에 대해 논의가 필요하다. 죽음은 신의 뜻인가 인간의 선택인가?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가톨릭 국가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조력자살을 허용했다. 2019년 이탈리아 헌법재판소에서 자살을 돕는 행위가 항상 범죄는 아니라는 결정을 내린 이후 첫 번째 사례다. 전신 마비로 10년간 투병해온 청원자는 “비로소 자유로워졌다”며 소감을 말했다. 서구 사회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해온 이탈리아 법정의 판결이라는 점에서, 오늘날 전 세계의 조력자살 찬반론자 사이의 논쟁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WHY_ 지금 조력자살 합법화에 대해 알아야 하는 이유

조력자살은 의사 등 타인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사례처럼 특정 사례에 대한 허용을 비롯한 국가적인 차원에서 조력자살을 합법화하는 나라도 늘고 있다. 우리나라도 1세대 베이비부머들이 고령으로 접어들면서 더 다양한 죽음의 방식, 존엄한 죽음의 권리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죽음의 권리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거의 아무런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DEFINITION_ 자기결정권

안락사는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로 나뉜다. 적극적 안락사는 의사가 약물을 투여해 직접 환자의 목숨을 끊는 것이다. 소극적 안락사는 연명 처치를 하지 않아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존엄사는 소극적 안락사에 속하지만 이와 또 다르다. 존엄사는 연명치료는 중단하지만 물, 산소, 진통제 등은 계속 공급한다. 사실상 환자가 서서히 죽어갈 때까지 기다리는 가장 소극적인 유형의 안락사다. 조력자살은 의사 또는 타인의 도움을 받지만 약을 먹는 것은 본인이 해야 한다. 인간이 지닌 자기결정권, 자유의지의 가치를 가장 중요시하는 안락사의 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MONEY_ 50유로

네덜란드에서는 심리학자 빔 판데이크가 지금까지 100여 명의 사람에게 자살할 수 있는 약물을 제공해왔다고 스스로 밝혔다. 약물의 가격은 50유로였다. 그는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의 존중을 주장하는 사설 단체의 회원으로, 조력자살에 대한 공론화를 위해 자신의 범행을 언론에 공개했다. 그는 자신이 중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며 “사법부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조력자살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네덜란드는 2002년에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법제화한, 이러한 논의에 있어서 가장 개방적인 나라지만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더 많은 권한을 요구하고 있다.
NUMBER_ 12

현재 조력자살법이 합법인 나라는 12개국이다.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미국(5개 주), 포르투갈, 그리고 올해 법안이 통과된 스페인, 오스트리아다. 영국도 법안이 발의되어 논쟁 속에 공청회를 진행하고 있으며, 합법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이번 이탈리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서구권 전반에서 조력자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어어지고 있으며, 입법되지 않은 나라의 시민사회에서도 조력자살 합법화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KEYMAN_ 김할머니

우리나라에서는 김할머니 사건이 존엄사 논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008년 김할머니는 수술 중 과다출혈로 심폐 정지 상태에 빠졌고, 가족들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했다. 병원 측은 연명의료 중단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다며 거절했고, 사건은 소송으로 이어졌다. 2009년 대법원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에 기초하여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는 연명치료 중단을 허용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김할머니 사건은 우리 사회에 존업사법 논의를 촉발시켰고, 2018년 연명치료결정법이 제정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RISK_ 신의 뜻 

종교계를 비롯한 반대자들은 조력자살이 생명 경시 풍조를 조장할 거라고 말한다. 조력자살이 합법화하면 ‘치료될 수 없는’ 환자들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쉽게 죽음을 선택하게 될 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재 법을 시행 중인 나라들은 조력자살의 허가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으며, 과도한 자살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표면화된 사례는 찾기 어렵다. 오히려 여러 법적 규제 때문에 죽을 권리는 얻지 못한 사람들의 불만이 크다. 네덜란드의 빔 판데이크의 사례가 그러한 경우다. 
CONFLICT_ 객관적 기준

조력자살이 합법인 나라에서도 집행 과정에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환자에 대한 조력자살 허가의 기준 때문이다. 현재 조력자살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은 다음과 같다. ‘환자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으며, 치료가 불가능하고, 온전한 의식 상태에서 의사를 전달해야 한다.’ 하지만 환자가 겪고 있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저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객관적인 판단이 어려운 영역이다. 또한 중증 치매에 걸린 환자는 의식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아무리 극심한 고통을 겪더라도 죽는 날까지 죽을 권리를 인정받을 수 없다.
REFERENCE_ 마르타 세풀베다

마르타 세풀베다는 콜롬비아에 사는 50대 여성이다. 콜롬비아는 중남미에서 유일하게 조력자살이 합법인 나라다.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그녀는 올해 7월 법원에 안락사를 허가해달라고 신청했고, 8월에 허가를 받았지만 집행을 하루 앞두고 취소 통보를 받았다. 치료가 불가능해 보였던 그녀의 질병에 차도가 보인다는 게 이유였다. 그녀는 투쟁에 나섰고, 가족들도 그녀를 응원했다. 결국 마르타는 올해 10월 28일 두 번째 안락사 날짜를 받았다. 그녀는 콜롬비아에서 말기 환자 이외에 첫 번째로 안락사 허가를 받은 인물이 되었다.
RECIPE_ 당사자주의   

생명 경시의 극단적 형태는 독단적 자살이다. 죽음에 대한 권리가 보장되지 않은 나라에서는 개인의 자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멈추고, 인간으로서 삶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생명윤리, 종교적 관점에서는 옳은 선택이 아니지만 삶과 영혼이 황폐해진 개인으로선 다른 도리가 없다. 어느 쪽이 생명을 더욱 존중하는 것일까. 답은 각자의 가치관에 달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죽음의 당사자에게는 존엄한 죽음을 고민하고 더 나은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선택지가 주어져야 한다.
INSIGHT_ 착한 존엄사법

우리나라는 죽음에 대한 논의의 공론화가 터부시되는 나라다. 잘 죽을 권리에 대해서는 더욱더 그렇다. 그 증거는 안락사, 존엄사와 관련된 어떤 법률도 제정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존엄사법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론이 연명치료결정법에 붙인 별칭이다. 연명치료결정법은 연명치료에 대한 결정을 환자 본인이 할 수 있다는 것인데, 법적 절차상의 이유로 제대로 시행되고 있지 않다. 병원 및 요양병원에서 연명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의 90퍼센트 이상은 여전히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과 다름없는 생을 이어가고 있다. 죽음에 대한 논의를 거부하는 것은 지금 고통받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누군가의 가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고, 또 아직은 안전한, 나와 내 가족에게 닥치게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내 삶의 존엄과 우리 사회의 건강을 위해 조력자살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다.
FORESIGHT_ 포스트 초고령사회 

우리나라에서도 조력자살과 관련된 논의가 조금씩 시작되고 있다. 2020년 사단법인 ‘착한법만드는사람들’은 의사가 환자에게 약물을 주입하는 적극적 안락사를 법제화하기 위한 세미나를 열었다. 세미나는 조용히 끝났고,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물론 법안 발의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조력자살이 지금 같은 속도로 여러 나라에서 합법화하고, 이에 대한 다양한 논쟁이 이어진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이 사안에 대한 논의가 촉진될 것이다. 존엄한 죽음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늙고 있는 우리 사회가 이미 직접 대면하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안락사, 조력자살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다면 〈최후의 선택: 내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추천합니다.
조력자살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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