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직업의 무게

11월 26일 - FORECAST

경찰은 흉기를 든 가해자를 놔두고 현장을 이탈했다. 무엇이 그들을 도망치게 했나?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지난 11월 15일 인천 남동구 서창동의 한 빌라에서 층간 소음 갈등을 위시한 흉기 난동이 있었다. 현장 출동한 경찰관 둘은 조사 과정 중 습격이 발생하자 흉기로 무장한 가해자를 제압하지 않고 도망쳤다. 피해자 가족은 흉기에 맨손으로 맞섰고 크게 다쳤다. 무엇이 한국 경찰의 무능에 일조하는가?
WHY_ 지금 경찰의 부실 대응을 읽어야 하는 이유

경찰은 세금으로 운영되는 조직이고 납세자는 경찰에 권리를 갖는다. 경찰법 제3조가 규정한 경찰의 임무 중 위에 있는 세 가지는 국민의 생명·신체 및 재산의 보호, 범죄의 예방·진압 및 수사, 범죄피해자 보호다. 불 앞에서 도망가는 소방관은 없다. 당연한 일들이 이뤄지지 않았고 국민은 마땅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DEFINITION_ 직업의식

젠더 갈등은 본질의 호도다. 이 사건은 직업의식에 관한 문제다. 현장 지휘 및 임무 수행의 총체적 실패다. 순경은 가해자를 막지 않은 채 현장을 이탈해 도주했고 경위는 피해자의 온 가족이 몸을 던져 가해자를 제압할 때까지 대치 상황을 방치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 미흡, 자상을 입은 피해자 방치, 순경의 트라우마 발언 등 국가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이라곤 믿기 어려운 일투성이다.
KEYMAN_ 시보 순경

도주한 순경은 시보 신분의 초임이다. 공무원의 수습 기간을 의미하며 경찰 시보 기간은 1년이다. 그는 중앙경찰학교에서 신임 순경 교육 4개월, 현장 실습 4개월을 마치고 인천 논현경찰서에 배치된 지 7개월 정도 됐다. 물리력 대응 훈련도 받지 못했다. 정식 경찰관은 아니지만 국민에겐 다 같은 경찰이다. 함께 출동한 경위는 19년 차 베테랑이지만 지휘 책임은 고사하고 시보 순경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였다.
NUMBER_ 2400

외근 경찰은 2인 1조 근무를 원칙으로 한다. 1인은 권총, 다른 1인은 테이저 건 혹은 가스 분사기를 분리 휴대한다. 2019년 경찰의 물리력 사용 기준 도입 이후 폭력적 공격엔 경찰봉이나 테이저 건, 사망이나 심각한 부상을 유발하는 치명적 공격엔 권총 사용이 가능하게 됐다. 막상 현장에서는 매뉴얼이 유명무실했다. 문제는 중앙경찰학교에서 해당 순경이 속한 기수가 총 2400명이며 상당수는 테이저 건 사격 훈련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국민 불안이 높을 수밖에 없다.
CONFLICT_ 국민청원

피해자 가족은 청와대 국민 청원으로 해당 경찰서를 고발했다. 청원에 따르면 이는 층간 소음 사건이 아닌 살인 미수 사건에 가깝다. 가해자가 이전에도 피해자 가정의 딸에게 살해 협박, 성추행, 성희롱을 일삼았다고 한다. 사건 발생 전 네 차례의 신고에도 경찰은 피해자 안전을 보장하지 않았다. 막을 수 있던 의도적 범행이었다. 피해자 가족은 언론 인터뷰에서 수사팀을 절대 용서하지도 사과를 받지도 않겠다고 했다. 국민적 분노에 해당 경찰서장과 출동 경찰관 두 명은 직위해제됐다.
REFERENCE_ 스토킹살인

또 하나의 청원이 있다. 지난 11월 19일 발생한 김병찬 스토킹 살인 사건의 피해자 유족의 청원이다. 사건 당일 스마트워치 오작동으로 경찰의 출동이 늦어졌다. 사건 발생 전에도 피해자가 자신의 직장을 찾아온 가해자를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같이 있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증거로 요구했다. 대응 체계 부실 및 피해자 보호 미흡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현장 출동 경찰관만이 아닌 조직 전반의 문제다.
RECIPE_ K-경찰

경찰 무능엔 구조적 문제도 있다. 지난 10년간 112신고 건수는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이에 맞춰 증원된 지역 경찰은 24퍼센트에 불과하다. 자치경찰제로 지역 경찰이 600명가량 줄기도 했고 의무 경찰 폐지로 인력난은 가속화될 전망이다. 개인 역량과 별개로 치안을 위협하는 요소다. 부족한 건 인력만이 아니다. 테이저 건 카트리지 가격은 개당 2만 5000원꼴로 충분한 훈련이 어렵다. 1년에 한 발씩만 훈련이 가능하다. 순직 비율이 가장 높은 공무원이지만 개인 화기 사용시 사용 경위를 조사 받게 되므로 무력 사용에 소극적이다. 한국 경찰의 열악한 현실과 약한 공권력은 사건 하나하나에 총력을 다하기 어렵게 만든다.
RISK_ 불신

처우 개선이 필요한 것과 별개로 경찰 내부의 폐쇄성과 부정부패는 늘 거론되던 문제였다. 디지털 성범죄와 스토킹 범죄 등은 늘어나는데 정작 조직은 외부 변화에 둔감하다.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주먹구구식 수사로 2차 피해 양산 혹은 가해를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드러난다. 이는 사법 불신으로 이어진다. 직업의식을 발휘할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경찰이 먼저 인식 개선에 앞장서야 하지만 조직 스스로 평판을 깎고 있다. 벌써 온라인에서는 자력 구제나 민간인 총기 소지와 같은 키워드가 나온다.
MONEY_ 157만 1233원

일반 국민이 아닌 취준생 입장으로 경찰을 보면 취업 유인 요소가 많다. 2019년 기준 순경으로 들어가 30년 근속 후 받을 연금액은 대략 월 157만 1233원이다. 높다고 볼 수 없으나 안정적이다. 근무 20년 미만은 퇴직 일시금으로 지급되고 연급은 20년 차 이상부터 지급된다. 중·고등학생 자녀 학자금이 전액 보조되고 주거 안정 차원에서 공무원 임대 주택도 보장된다. 경쟁률이 높은 건 당연하다. 체력 시험이 변별력이 없다 보니 사실상 시험 점수에서 갈린다. 체력이 조금만 좋아도 순경 공채나 경채를 통해 누구나 경찰이 될 수 있다. 국민을 지키는 경찰은 취업난과 시험 제도의 산물이다.
INSIGHT_ 경찰 공무원

어느샌가 경찰보다 경찰 공무원이라는 말이 더 많이 보인다. 시민을 위해 봉사하는 명예로운 경찰보다 높은 공무원 시험 합격률을 자랑하는 학원가에서 탄생한 경찰 공무원을 국민은 마주하고 있다. 경찰 시험 역시 직업의식에 대한 평가 항목조차 없다. 과거 노동의 가치를 중시하며 봉급으로 생계 유지가 가능하던 자본주의 단계를 넘어 본격적인 금융 자본주의가 도래한 지 몇십 년이 지났다. 지금의 청년은 영끌과 투자의 세대다. 영원한 직장도 없고 오히려 직업의식이 투철하면 바보가 되는 세상이다. 이는 공무원이라는 특징을 가진 경찰에도 예외 없이 나타난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인 블라인드에 올라와 화제가 된 ‘경찰도 직장인’이라는 표현이 단적으로 보여준다. 피습 상황에서 구호 요청을 먼저 생각하고 트라우마에 시달린다는 순경의 말은 해당 상황을 마주한 일반 시민이 해야 할 말이다. 인간으로서 위험 상황에 지극히 합리적 판단을 했지만 경찰은 달랐어야 한다. 직업의식을 넘어 소명의식을 기대하는 직업인 경찰, 소방관, 정치인, 직업 군인 등의 특징은 국가와 사회 유지에 필수적인 인력이라는 점이다. 지금의 논란은 경찰에 소명의식을 기대하는 국민의 인식과 공무원의 한 직종으로 인식하고 근무하는 일부 경찰 간의 간극이 만든 갈등이다.
FORESIGHT_ 딜레마

냉담한 여론은 간극의 크기를 드러낸다. 소명의식을 갖기 위해선 사회적 존경이 필요하고 이는 강한 공권력으로 이어진다. 경찰에 대한 사회의 우호 여론을 만들려면 경찰이 잘해야 한다. 권력과 언론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을 지켜야 하며 내부적으로 청렴해야 한다. 현 경찰 조직의 상황을 고려하면 요원한 일이지만 경찰 혁신의 필요성은 계속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딜레마에 봉착할 것이다. 자치경찰제로 일반 경찰은 생활 안전보다는 수사에 중점을 둔 직업이 되고 업무 위험도는 높아질 가능성이 큰데 소명의식에 상응하는 보상은 적고 공권력도 약하기 때문이다. 인력난에도 그나마 연금을 보고 근무하는 월급 경찰 공무원이 양산되는 현 시스템은 자본주의의 가속화와 맞물려 한국에서 해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경찰 제도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다면 《법 위의 질서》를 추천합니다.
강한 공권력과 인종주의로 논란이 된 미국의 사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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