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은 신의 부재
 

12월 첫째 주 프라임 레터

안녕하세요. 북저널리즘 CCO 신기주입니다. 

〈지옥〉을 봤습니다. 단숨에 봤습니다. 덕분에 마감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마감이 밀리고 밀렸습니다. 따지고 보면 《가디언》 때문입니다. 이렇게 강권했거든요. “미친 듯이 좋은 작품이다. 아직 보지 않았다면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당장 시청하라.” 《가디언》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팔대지옥 가운데 아비지옥 다음으로 무시무시하다는 마감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잘못한 게 진짜 없는데 지옥에 가는 게 정말 가디언의 뜻일까요?

연상호 감독의 〈지옥〉은 가디언의 뜻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신의 뜻 말입니다. 갑자기 천사가 나타납니다. 죽음을 고지합니다. 당신은 몇 년 몇 월 몇 시 몇 분에 죽는다고 알려줍니다. 그리곤 지옥에 간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천사가 말한 시각에 악마들이 나타납니다. 사람을 산채로 불태워서 지옥으로 끌고 갑니다. 이걸 시연이라고 합니다. 시연이 TV로 생중계되면서 세상이 바뀝니다. 카톨릭과 개신교와 이슬람과 불교와 힌두교를 압도하는 신흥 종교가 탄생합니다. 새진리회입니다.

새진리회는 지상에서 시연을 행하는 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해석해 줍니다. “신은 더 이상 인간의 죄를 용납하지 않는다. 인간이 죄를 짓지 않도록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천사가 고지하고 악마가 실행하는 지옥행 급행열차를 만들었다. 정답을 찍어줬는데도 시험 망치는 학생은 지옥에 가도 싸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새진리회는 죄 없는 완전무결한 새 세상이 열렸다고 주장합니다.

새로운 세상인 건 맞습니다. 완전무결하진 않습니다. 오류투성이입니다.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공포가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고지를 받은 자는 죄인으로 낙인찍힙니다. 가족까지 손가락질을 당합니다. 고지를 받은 죄인은 죄인이 틀림없습니다. 신이 실수를 할 리가 없으니까요. 사람들은 고지 당한 사실을 숨기기 시작합니다. 새진리회는 고지 당한 죄인들을 색출해서 공개 처형 시키려고 혈안이 됩니다. 죄인의 죄가 명백할수록 신의 뜻을 새진리회가 참되게 해석한 셈이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누가 처음 고지를 하는 천사를 신의 뜻을 전하는 천사라고 정의했을까요. 누가 처음 시연을 하는 악마를 신의 뜻을 행하는 악마라고 규정했을까요. 누가 처음 사람이 끌려가는 그곳이 우리가 아는 신의 지옥이 맞다고 단정했을까요. 〈지옥〉에선 정진수라는 사람입니다. 정진수는 시연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훨씬 전부터 시연은 신의 의지라고 설파했습니다. 실제로 시연이 일어나자 세상은 정진수의 해석에 의존하게 됩니다. 천사와 악마 그리고 지옥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섭니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두려워합니다. 극도의 공포는 인간이 터무니없는 것도 믿게 만듭니다. 〈지옥〉도 그랬습니다. 패닉 상태였던 세상은 정진수라는 개인의 주관적 해석을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신흥 종교가 탄생합니다.
〈지옥〉은 해석의 권위를 독점한 신흥 종교가 지상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리는 이야기입니다. 정작 신흥 종교에게 해석의 권위를 헌납한 주권자는 다름 아닌 우리 자신입니다. 천사와 악마와 지옥의 시연 앞에서 이성을 버리고 믿음을 선택한 탓입니다. 이제 인간에게 자유 의지란 없습니다. 신의 뜻에 따른 죄와 벌만 있을 뿐이죠. 그렇다면 인간은 신의 뜻에 따라 조종되는 인형에 불과합니다. 인형들의 세상에서 우두머리는 신의 대리자들입니다. 새진리회의 사제들과 화살촉들입니다. 사제가 해석의 권위를 독점한다면 화살촉은 해석의 권위를 수호합니다. 다른 해석을 폭력을 통해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은 머리와 가슴과 팔다리까지 빼앗깁니다.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지옥〉은 테드 창의 소설 《지옥은 신의 부재》와 이어집니다. 우리에겐 영화 〈컨택트〉로 익숙한 당대 최고의 SF 소설가죠. 테드 창은 《지옥은 신의 부재》에서 신의 뜻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질문합니다. 《지옥은 신의 부재》속 세상에서도 천사와 악마가 수시로 출몰합니다. 지옥이 펼쳐집니다. 여기서 지옥은 〈지옥〉의 지옥과 좀 다릅니다. 현실과 닮아 있지만 신의 무관심으로 버려진 세계죠. 대신 지옥에선 현실의 장애인도 정상인이 됩니다. 테드 창은 신의 관심을 받는 현실과 신의 무관심 속 지옥 가운데 어느 쪽이 진짜 지옥인지 묻는 듯합니다. 끊임없이 인간을 시험하면서 천국이라는 합격 통지서로 희망고문하는 신의 뜻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신의 영역 바깥 지옥이 오히려 인간다운 세계가 아닐까요. 신의 부재야말로 인간 세상의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지옥〉도 신의 뜻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신의 뜻엔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의미는 인간이 덧붙인 해석일 뿐이죠. 〈지옥〉은 인간의 이성과 종교의 해석이 벌이는 전쟁입니다. 결국 신을 죽여야 끝나는 싸움입니다. 니체가 그랬던 것처럼요. 대신 신이 죽은 세계에선 인간은 삶의 덧없음과 맞서야 합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생로병사와 희노애락이 거대한 계획이 아니라 무의미한 우연에 의한 사건일 뿐이라는 진실을 받아들여야만 하죠. 우주의 처음과 끝 그리고 인생의 시작과 죽음이 모두 인간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라는 걸 인정해야만 합니다. 동시에 니힐리즘의 심연에서 하루하루 살아갈 의지와 희망도 길어올려야 하죠. 오직 자유 의지라는 한 가지 도구로 말입니다. 《지옥은 신의 부재》에서도 인간 군상의 선택은 다양합니다. 누구는 무작정 신의 완벽함을 맹신합니다. 누구는 신의 뜻과 자신의 인생은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는 신의 실수를 의심하고 누구는 신의 계시를 기다립니다. 마찬가지로 <지옥>에서도 이런 인간 군상들이 등장하죠. 신을 죽이고 자유의지가 쥐어져도 모든 인간이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는 건 아닙니다.

솔직히 〈지옥〉의 고지와 시연은 종합병원에선 일상 풍경입니다. 암 진단 고지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수술대 위에서 마취 당한 채 오장육부가 꺼내지는 시연을 당할 수도 있죠. 죽음 이후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에 지옥에 간다는 공포로 영혼이 타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찾아오는 죽음은 〈지옥〉의 그것처럼 볼만하진 않을지 몰라도 누구에게나 가장 극적인 마지막 순간입니다. 불치병을 고지 받고 시한부 인생을 시연 당하면 해석의 권위에 의존하고 싶어지는 게 당연합니다. 내세에 대한 믿음을 현실의 모르핀으로 삼죠. 어찌 보면 〈지옥〉이 던지는 질문은 이처럼 조촐할 수도 있습니다. 거창한 신과 인간의 종교 전쟁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느냐의 근본적 질문인 것이죠.
《가디언》의 뜻에 따라 〈지옥〉을 정주행하다가 비보를 접했습니다. 천재 디자이너 버질 아블로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2018년 버질 아블로가 흑인 최초로 루이비통 남성복 디자이너로 데뷔할 때 파리에 있었습니다. 버질 아블로는 쇼가 끝난 뒤 런웨이에서 카니예 웨스트한테 안겨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죠. 패션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한 장면입니다. 버질이 세상에 존재했던 경계 중 하나를 허물었던 순간이었죠.

《뉴욕타임즈》는 버질 아블로의 부고 기사에서 그를 “장벽을 부순 자”라고 추모했습니다. 버질은 2019년에 희귀암인 심장혈관 육종 진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도 마지막 순간까지 패션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런웨이에서 삶을 마감했습니다. 버질의 마지막 순간은 어쩌면 〈지옥〉이 던지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버질 아블로는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사랑하는 삶을 계속 살다 가는 선택을 했습니다. 신의 뜻은 알 도리가 없지만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이것뿐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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