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적 성평등을 실험하다

12월 10일 - FORECAST

독일이 동수 내각을 발표했다. 정치권의 기계적 성평등은 제대로 작동할까?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현지 시각 12월 8일 독일 연방 총리에 취임한 올라프 숄츠는 장관직 성비를 똑같이 맞춘 동수 내각 인선안을 발표했다. 이는 숄츠 총리의 총선 공약이기도 했다. 성평등은 사회 모든 분야에서 요구되지만 정치권은 특별하다. 모든 국민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기계적 성평등은 공정한 것일까? 여성의 대표성을 제대로 반영하고 실질적 성평등을 이루는 열쇠일까?
WHY_ 지금 독일의 동수 내각을 읽어야 하는 이유

동수 내각 구성은 독일 역사상 최초다. 문재인 대통령의 비전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는 내각 30퍼센트 여성 할당제를 시행했지만 일부 장관이 논란 속에 사퇴하며 30퍼센트를 밑돈다. 동수 내각 구성은 한국에서 먼 이야기일까? 일부 2030 남성의 폭발적 지지를 받았던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의 할당제 폐지 주장은 공정이 무엇인지 묻는다. 기계적 성평등을 논의해야 불필요한 젠더 갈등을 줄일 수 있다.
NUMBER_ 16

동수 내각을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숄츠 총리의 답변은 “남성과 여성이 각각 독일 인구의 절반이므로 여성도 절반의 힘을 얻어야 한다”이다. 독일은 16년을 메르켈 전 총리와 함께했고 숄츠 내각의 장관은 16명이다. 입지전적 인물인 메르켈의 유산은 8명의 여성 리더와 8명의 남성 리더를 탄생시켰다.
KEYMAN_ 앙겔라메르켈

일터의 여성들에겐 롤모델이 부족하다.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뉴욕타임스》는 이 점을 짚었다. 메르켈 전 총리는 중도 우파이자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하는 것을 피해왔지만 그의 존재가 차기 내각의 성평등에 도움이 됐다고 봤다. 메르켈은 단지 여성 정치인에게만 롤모델이 된 것이 아니다. 독일은 ‘무티(엄마)’ 리더십과 작별하면서도 그가 보였던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오래된 정치인 숄츠를 선택했다. 소용돌이 속에 승리했지만 숄츠 총리는 그 자리에 걸린 기대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보란 듯이 동수 내각을 출범시켰다. 특히 핵심 요직인 외무장관과 내무장관, 국방장관에 여성 장관을 포진시키며 “안보가 강한 여성의 손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메르켈은 총리로서, 여성 정치인으로서 숄츠와 여성 장관들에게 롤모델이 되어줬다.
REFERENCE_ 무지개 내각

동수 내각은 캐나다가 최초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2015년 11월 성별 15명씩으로 이뤄진 동수 내각을 출범시켰다. 연령대도 3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하고 출신 배경도 제각각이다. 캐나다의 다문화 정책은 모자이크 이론을 따른다. 원주민, 우주 비행사, 난민 등이 포함될 수 있던 이유다. 이러한 내각 구성 이유에 대해 트뤼도는 “지금은 2015년이니까요.”라고 답했다. 미국 역시 오바마 정부 시절 인종과 성별, 성 정체성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인재를 기용했다. 미국은 다름은 인정하지만 동화주의를 표방하는 샐러드볼 이론을 따른다. 남녀동수법(la parité) 제정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도 2017년 남녀 동수 내각을 출범했다. 정치 노선의 다양화도 고려했다. 이념적 균형과 대표성은 각국 무지개 내각의 핵심이다.
DEFINITION_ 어퍼머티브액션?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X〉는 ‘적극적 우대 조치’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던졌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소방관 시험에서 백인을 떨어트리고 점수가 낮은 흑인을 붙이는 게 맞는지 물었다. 정치권에 여성을 충원하는 것은 다양한 의미가 있다. 이제까지 받아왔던 사회적 차별에 대한 교정이 이유의 전부라면 여성 할당제는 적극적 우대 조치의 딜레마를 갖게 될 수도 있다. 독일의 사례는 다르다. 메르켈과 같은 여성적 리더십에 대한 기대가 반영됐다. 단순한 교정의 의미 이상이다. 독일의 기본법 제3조 2항은 프랑스의 남녀동수법과 유사한 남녀동권의 규정이 있다. 대의 민주주의의 기본인 대표성 제고의 의미도 더해진다. 동수 내각은 어퍼머티브 액션인가? 동수 내각 구성 이유에 대한 숄츠 총리의 대답은 가볍고 단순한 말이 아니다. 숄츠는 공정하게 독일 절반의 대표성을 제고했고 그들의 역할을 기대한다.
CONFLICT_ 능력주의

능력주의 논쟁은 할당제를 흔든다. 이준석 돌풍이 압축해서 보여준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일부 여성 장관들의 능력에 의문을 표하며 할당제의 수혜자로 표현했다. 논란이 많은 여가부는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은 맞는 말이다. 인선의 실패로 볼 수 있다. 기계적 성평등에선 능력자가 배제될 수 있다. 이준석 대표의 해당 발언에 강민진 청년정의당 대표는 반문한다. “문재인 정부의 국무위원 인선 문제는 ‘내 사람’ 바운더리 안에서 인사를 찾느라 전반적으로 적절한 인사를 배치하지 않았던 것이지 여성을 기용해서 벌어진 문제가 아니다.” 단순 할당제로 실질적 성평등은 곧바로 오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숱하게 인선 실패가 일어날 것이다. 할당제가 없던 시절에도 실패한 정치인은 많다. 메르켈의 16년이 바꾼 독일은 녹색당 안나레나 배어복 대표가 유력 총선 주자가 되고 외무부 장관에 오르는 나라다. 독일 정치의 국민적 아젠다는 ‘기후 위기’다. 다양성의 힘은 씨앗을 뿌려야 나온다.
MONEY_ 1조 2325억 원

동수 내각 구성은 다양성 내각으로 가는 과정이다. 여성의 목소리가 정치권에서 작아질 경우 간과하는 것들이 생긴다. 1조 2325억 원은 여성가족부 2021년 예산이다. 누구에겐 많고 누구에겐 적다. 독일 연방정부의 2020년 가족·노인·여성·청소년부 예산은 15조 6202억 상당이다. 여가부는 여성 및 청소년, 다문화 가족 지원이 주요 업무다. 오독되는 페미니즘 논리에 따라 젠더 갈등의 격전지가 됐을 뿐이다. 부처 이름의 ‘여성’은 여성 정책 기획 및 인력 개발을 ‘가족’은 사회적 재생산인 돌봄 노동을 포괄한다. 여성가족부는 필요해서 만들어진 부처다. 논란이 많고 가시적 성과가 부족하다고 폐지론을 꺼내는 건 이등병 문제가 많으니 이등병 계급을 없애자는 말과 같다.
RECIPE_ 임원지위동권법

동수 내각 구성이 허울은 아닐까? 실질적 성평등은 사회 모든 분야의 논제다. 독일엔 ‘FührposGleichberG’가 있다. 민간 및 공공 부문 관리직에 대한 여성과 남성의 동등 참여를 위한 법률이다. 약칭 임원 지위 동권법이다. 키워드는 민간이다. 기존 연방 동등 지위법(Bundesgleichstellungsgesetz)을 2016년에 개정하여 사경제 영역에도 할당제를 적용하도록 했다. 이는 일반적 동등 처우법(AGG)와 함께 독일에서 실질적 성평등에 기여하고 있다. 한국은 어떤가. 공직에선 공직선거법의 여성 할당제와 양성평등 채용 목표제가 있다. 후자는 오히려 최근 남성이 혜택을 보고 있다. 민간 영역에는 여성임원할당제가 내년 8월부터 실행될 예정이다. 자산총액 2조 원 이상의 상장 법인을 대상으로 한다.
RISK_ 프레카리아트

사회 저변은 어떤가? 2017년 아시아미래포럼에선 한 글로벌 노동 계급의 문제가 떠올랐다. 가이 스탠딩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 공동 대표는 지대 자본주의와 양극화 심화 속에서 프레카리아트(precariat) 문제를 언급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에서 일상적인 불안정 고용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저숙련·비정규직 노동자 및 실업자다. 이들은 포퓰리즘으로 향하기도 하지만 극우, 극좌주의로 쉽게 빠진다. 극단적 정치 이념은 사회적 약자 간 분열을 조장한다. 경쟁 과잉 속에서 사회적 약자를 표적하고 하위 계급의 지지를 얻는다. 프레카리아트의 상황은 한국에도 적용된다. 어떠한 우대 조치에도 반발할 가능성이 높은 이들 집단은 실질적 성평등, 다양성의 숨은 위협이다.
INSIGHT_ 대상화

유리 천장은 있을까? 보이지 않으니 유리다. 차별은 민주주의 발전과 함께 해체됐다. 상당 부분 사라졌지만 교묘하게 파편화되어 사회 곳곳에 파고들었다. 꼭 필요하지만 수익성이 낮은 분야에 대한 대상화가 일어난다. 대표적인 게 3D 노동과 돌봄 노동이다. 전자는 이주 노동자가, 후자는 여성이 일할 것으로 기대되며 이들은 하위 계급으로 자기도 모르게 내몰린다. 인종화, 대상화는 특정 산업 분야나 계급의 탈을 쓴다. 동일 노동 임금 격차는 교정 대상이지만 거시적 소득 격차는 산업별 특수성을 들어 무시된다. 롤모델의 부재, 적은 수요는 잔존하는 차별의 프레이밍을 돕는다. 3D나 재생산의 가치를 역설하지 않으면 사회는 부러진다. 사회적 보상이 꼭 필요한 필수 직군이다. 고위직 진출만이 답이 아니다. 비워지면 그 자리는 누군가로 채워진다. 정치권은 이런 구조적 문제를 직시해야 하고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대표성을 부여해야 한다. 동수 내각은 여성 리더에 대한 적극적 우대 조치가 아닌 사회 기능을 위한 조건에 가깝다. 공정의 정의는 단순한 능력주의가 아니다. 민주 국가는 성과만 좇는 기업이 아니고 민주주의의 가치가 작동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어린 아이는 숄츠 총리를 보고 남성도 총리를 할 수 있는 것이었냐 묻는다. 롤모델은 대상화를 푸는 열쇠일지 모른다.
FORESIGHT_ 사경제영역

할당제에 있어 민간과 공직은 결이 다르다. 기업엔 민주주의의 대표성 논리를 붙일 수 없다. 여성임원할당제부터 시작해 앞으로 다양한 사경제 영역에서의 적극적 우대 조치가 법제화될 가능성이 크다. 여성의 사회 진출 기회 보장만을 목적으로 보면 역차별로 보일 것이고 한쪽 성의 과도한 편중으로 기업 문화가 곪지 않게 하는 목적이라면 수긍될 것이다. 물론 특정 성별이 두각을 드러내는 산업 분야는 많다. 유통에선 여성이 엔지니어링은 남성이 뛰어날 수 있다. 그러나 성별 특수성이 작동하지 않는 사경제 영역에서 많은 여성 인재는 아직도 성과주의 편견과 씨름 중이다. 인력 다양성이 성과와 연결되는 사례는 많이 있다. 선택은 기업에 달렸다. 가보지 않은 길은 가보기 전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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