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왔다
 

12월 둘째 주 프라임 레터

안녕하세요. 북저널리즘 CCO 신기주입니다. 

“그들이 왔다. 그들은 처음엔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다음엔 유태인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다. 나를 위해 항변해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반나치 운동가로 유명한 마틴 니뮐러 목사가 쓴 유명한 시입니다. 

마리아 레사는 필리핀에서 열린 어느 강연회에서 마틴 니뮐러의 시를 인용합니다. 마리아 레사는 2021년 올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필리핀의 저널리스트입니다. 뉴미디어 《래플러》의 창업자이자 편집장입니다. 지금 필리핀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통치하고 있습니다. 두테르테는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전형입니다. 대중영합정책을 악용해서 집권했고 권력을 강화해 왔습니다. 두테르테 같은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만국 공통점 가운데 하나가 언론 혐오입니다. 포퓰리스트 정치인은 쉴 새 없이 국민의 뜻을 말합니다. 정작 국민을 대신해 질문하는 언론은 부정합니다. 

독재자는 총칼로 언론을 탄압합니다. 포퓰리스트는 좌표로 언론을 겨냥합니다. 포퓰리즘에 현혹된 지지자들이 해당 언론을 공격하도록 유도하는 겁니다. 두테르테는 국정연설에서 래플러를 가짜뉴스라고 좌표찍기 한 적도 있습니다. 기자회견을 하다가 래플러의 에디터에게 “비판하는 건 자유지만 범죄를 저지르면 감옥에 가야 한다”고 협박한 적도 있습니다. 마리아 레사는 SNS와 메신저와 이메일을 통해 거의 매일 살해 협박과 성적 모욕에 시달립니다. 수위는 상상 이상입니다. 길거리에서 총으로 쏴 죽여버리겠다는 식입니다. 래플러 사무실에 폭탄을 설치하겠다는 식입니다. 가족을 살해하겠다는 식입니다. 네가 공개적으로 윤간을 당했으면 좋겠다는 식입니다. 

모두 두테르테 화살촉들이 소행입니다. 드라마 〈지옥〉에 나오는 광신도 집단 화살촉과 두테르테의 극렬 지지자들은 닮은꼴입니다. 저널리스트 마리아 레사는 이렇게 사이버 테러의 피해자지만 정작 2020년 사이버 명예훼손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고 투옥됐습니다. 마리아 레사는 투옥되기 직전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어떻게 저널리즘을 질식시키는지를 이야기하는 강연회에서 마틴 니뮐러의 시를 인용했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저널리스트를 잡으러 왔다. 아무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마리아 레사는 지난 12월 10일 열린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어렵게 참석했습니다. 두테르테 정부는 마리아 레사의 노벨평화상 시상식 참여를 조직적으로 방해했습니다. 현재 마리아 레사는 6년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보석으로 겨우 석방된 상태입니다. 필리핀 법무부는 마리아 레사가 도주와 망명 우려가 있다면서 출국을 금지했습니다. 마리아 레사는 필리핀 태생의 미국 이민자입니다. 열 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죠. 두테르테 정권이 레플러가 미국 언론이라고 주장하는 근거죠. 마리아 레사의 동생은 지금도 미국에 사는 미국인입니다. 마리아 레사는 모국 필리핀을 선택했습니다. 마르코스 독재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시작한 필리핀에서 희망을 봤기 때문이었습니다. 필리핀 민주주의가 포퓰리스트 정치인 두테르테한테 현혹돼 합법적으로 권력을 넘겨주는 걸 보면서 절망을 봤습니다. 그래도 필리핀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필리핀으로 돌아오면 체포될 걸 뻔히 알면서도 반드시 돌아왔죠. 저널리즘이 필리핀 민주주의의 희미한 희망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레사가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참여했다가 도망칠 거란 두테르테 정권의 주장은 방해를 넘어 음해입니다.  

두테르테 정권은 국제 사회의 압력에 못 이겨 12월 8일부터 13일까지 단 6일 동안만 오슬로 방문을 허락했습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저널리스트가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한 사례는 1936년 독일이 거의 유일합니다. 나치에 저항했던 독일 저널리스트 카를 폰 오시에츠키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지만 강제수용소에 감금된 탓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카를 폰 오시에츠키는 2년 뒤인 1938년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했습니다. 필리핀 두테르테 정권은 나치 히틀러 정권 수준인 겁니다. 
 
진짜 문제는 괴벨스의 노골적인 선전선동술에 의존했던 히틀러 정권과 달리 두테르테 정권은 은밀한 소셜 미디어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활용해서 저널리즘을 탄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저널리즘의 앞이 아니라 등을 노리는 셈입니다. 지난 12월 10일 노벨상 시상식에서도 마리아 레사는 수상 소감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저널리즘과 민주주의를 망치고 있는 소셜미디어 빅테크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필리핀에선 “모든 저널리스트는 썩었다”는 주장이 소셜미디어에서 판을 칩니다. 저널리즘과 독자의 사이를 갈라놓는 주장이죠. 래플러는 이런 주장들이 어디에서부터 흘러나오는지를 추적했습니다. 소수의 블로거나 인플루언서들이 수백만 명과 소셜 네트워킹을 이루면서 대중의 여론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죠. 

사람은 사실이 아니라 사람을 믿습니다. 사람의 본능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유인원이던 시절부터 무리의 여론을 믿고 동태를 따라야 생존에 유리했던 탓인지도 모릅니다. 저널리즘에 등장하는 사실과 정보와 분석과 통찰과 전망들은 우리의 본능에 위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보고 믿던 정보들과 다를 수 있으니까요. SNS는 저널리즘과는 정반대입니다. 친구들이 믿고 보는 걸 우리도 믿고 보게 해주니까요. 만일 SNS가 포퓰리스트 정치인에 의해 악용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포퓰리스트는 쉴 새 없이 국민을 찾는 대중영합형 정치인입니다. 권력은 인기에서 나온다는 걸 아니까요. 그래서 포퓰리즘과 SNS의 결합은 악몽입니다. 

포퓰리스트는 SNS를 활용해서 자신을 지지하는 유권자가 자신에 반대하는 정치인을 미워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인을 증오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직접 손도 안 대고 말입니다.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포퓰리즘이 봉사하게 만드는 것이죠. 지금 필리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마리아 레사는 노벨상 수상 소감에서 SNS를 민주주의의 독극물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페이스북이야말로 글로벌 지식정보 시스템의 적이라고 규정합니다. “페이스북은 사람들이 사실을 거부하고 저널리스트를 오해하게 만든다. 우리를 설계하고 분열시키고 극단화시킨다.”

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는 프린스턴 대학교 정치학과 얀 베르너 뮐러 교수가 쓴 책입니다. 뮐러 교수는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공통점으로 반엘리트주의와 편가르기를 꼽습니다. 반엘리트주의의 대표적인 통치 기법이 안티저널리즘입니다. 두테르테 정권이 “모든 저널리스트는 썩었다”는 독극물을 소셜네트워크에서 끊임없이 퍼트리는 게 대표적입니다. 부패한 언론도 있습니다. 비겁한 언론도 있습니다. 두테르테 정권의 진짜 목적은 대중이 부패한 언론이든 성실한 언론이든 모든 언론을 모조리 불신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야 두테르테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니까요. 두테르테의 편가르기는 마약과의 전쟁입니다. 마약과의 전쟁은 필리핀 사회를 갈가리 찢어놨습니다. 2016년 두테르테 집권 이후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이 마약범으로 몰려서 재판도 없이 길거리에서 사살당했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실제로 마약 조직의 일원이었는지는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마리아 레사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천 개의 상흔〉에는 마약과의 전쟁 현장을 목격한 《래플러》 기자의 이런 증언이 나옵니다. “죽은 아들의 시체를 안고 우는 엄마의 절규를 들었다.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엄마에게 소리쳐 물었다. 아들이 마약범이었습니까? 아들이 마약범이었냐고요? 엄마가 겨우 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아들은 착한 애예요.” 《래플러》의 기자는 말을 잇지 못합니다. 말 없이 흐느낍니다. 두테르테는 백주대낮에 사람이 경찰의 총에 맞아 죽어도 범죄자면 괜찮다고 넘어가는 선택적 정의의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면 애국자가 아니며 범죄자와 한통속이 되는 겁니다. 필리핀은 죽은 아들의 엄마에게 “죽은 아들이 범죄자냐”부터 묻는 나라입니다. 포퓰리스트가 엘리트를 바보로 만들고 사람들을 편가르기 했기 때문입니다. 《래플러》는 두테르테가 일으킨 전쟁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몇 안 되는 언론입니다. 덕분에 마약 조직을 두둔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죠. 반역자라고 매도당합니다. 두테르테 정권한테만이 아닙니다. 필리핀 국민들로부터 말입니다. 

필리핀 대선은 2022년 5월입니다. 두테르테 대통령의 딸 사라 두테르테가 부통령으로 출마한 상태입니다. 두테르테가 퇴임해도 두테르테 정권이 끝나는 건 아니란 뜻입니다. 다음 대선에선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의 대통령 당선이 유력합니다. 필리핀의 악명 높은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아들입니다. 필리핀 민주화 운동인 피플파워 혁명으로 1986년 하와이로 축출됐죠. 사실 2016년 두테르테가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도 마르코스 2세의 지지가 결정적이었습니다. 지금 필리핀 정치는 차라리 봉건영주제에 가깝습니다. 북부의 수도 마닐라에 기반한 전통 마르코스 가문과 남부의 항구 도시 다바오에 기반한 신흥 두테르테 가문이 권력을 양분하고 있죠. 이념적으론 마르코스는 우파고 두테르테는 좌파지만 그건 허울일 따름입니다. 권력놀음일 뿐이죠. 이번엔 마르코스 가문이 말라카냥 대통령궁을 차지할 차례가 됐을 뿐입니다. 

여기엔 전임자인 아키노 3세 대통령의 사망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르코스를 축출하고 11대 대통령으로 집권했던 어머니 코라손 아키노의 뒤를 이어 15대 대통령으로 집권했던 아키노 3세는 퇴임 5년만인 2021년 6월에 서거했습니다. 아내도 자식도 없었습니다. 민주화를 상징했던 아키노 가문이 쇠퇴하면서 남부의 포퓰리스트 가문 두테르테와 북부의 독재자 가문 마르코스의 야합이 가능해졌죠. 사라 두테르테는 현직 다바오 시장입니다. 아버지한테 다바오 시장직을 물려받다시피 했죠. 부통령으로서 중앙 정치를 경험하고 나면 아마도 대통령직에 도전할 겁니다. 두테르테 2기입니다. 

이런 필리핀식 족벌 정치는 두테르테의 트레이드 마크인 마약과의 전쟁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마르코스 가문도 두테르테 가문도 사병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두테르테의 사병은 다바오 척살대라고 불립니다. 현실의 화살촉들이죠. 두테르테 대통령은 다바오 시장 시절부터 다바오 척살대로 범죄 조직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시장 시절의 정책을 고스란히 대통령 정책으로 가져온 것이죠. 문제는 필리핀의 다른 지역에선 지역 호족과 지역 갱단이 깊이 유착돼 있다는 겁니다. 결국 두테르테 정권은 몸통은 놔두고 깃털만 건드리는 전쟁을 벌였죠. 길바닥에서 수시로 사살되는 젊은 갱단은 거대 조직의 진짜 몸통과는 무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래플러》는 이런 맥락을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트롤링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트롤링은 사이버 테러 행위를 뜻합니다. 악플을 달거나 폭력문자를 융단폭격하는 행위죠. 트롤링은 두테르테 사이버 척살대가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자행하는 테러입니다. 마리아 레사는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온라인 폭력이야말로 현실 세계의 폭력이다.” 
 
21세기 민주주의의 가장 큰 위협은 포퓰리즘입니다. 미국 민주주의조차 아직도 트럼프한테 시달리고 있습니다. 소셜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저널리즘을 매도한다는 것만 봐도 트럼프는 너무 전형적인 포퓰리스트입니다. 포퓰리스트 정치인에게 저널리즘은 자신의 말만 믿고 들어야 하는 대중에게 합리적 의심을 심어주는 불편한 존재입니다. 소셜미디어는 자신의 선동을 직접 대중의 귓가에 속삭일 수 있는 편리한 혁신 기술이죠. 

북저널리즘이 최근에 퍼플리싱한 종이책 《알고리즘의 블랙박스》의 오세욱 저자가 지적하는 문제도 이것입니다. 오세욱 저자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책임연구위원입니다. 북저널리즘의 이현구 에디터가 만든 책입니다. 《알고리즘의 블랙박스》에서 오세욱 저자는 말합니다. “저널리스트와 알고리즘적 객관성은 전혀 같지 않다. 저널리스트의 객관성은 제도적 약속에 의존하며 규범과 현장 훈련을 통해 키워진다. 알고리즘적 객관성은 제도적 규범과 훈련보다는 기술적, 상업적으로 오염된 기계적 중립성이라는 약속이다.” 한마디로 소셜미디어의 뉴스 알고리즘은 사실이나 정의가 아니라 자극성이나 상업성에 따라 작동될 가능성이 높단 의미입니다. 증오를 담은 편가르기와 혐오를 담은 반엘리트처럼 자극적이고 상업적인 메시지를 주무기로 삼는 포퓰리스트들에겐 저널리즘은 까다롭지만 소셜미디어는 손쉽습니다.  

필리핀 민주주의를 망가뜨리고 있는 두테르테도 이런 포퓰리즘의 통치 알고리즘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합니다. 포퓰리스트 정치인은 사람들이 사실을 의심하고 진실에 분노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포퓰리즘의 해독약 가운데 하나가 저널리즘입니다. 저널리즘은 우리가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해줍니다. 어려운 사실을 이해하게 해줍니다. 마리아 레사가 202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유입니다. 저널리즘을 무력화하고 소셜네트워크로 퍼지는 포퓰리즘은 필리핀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문제니까요. 대한민국 민주주의도 예외가 아닙니다. 

저널리즘이 포퓰리즘과 싸울 때 겪는 어려움은 독재와 싸울 때보다 더 복잡한 양상을 띕니다. 일종의 비대칭 게릴라전과 같습니다. 독재와의 싸움에선 맞서 싸울 적이 독재 정권입니다. 포퓰리즘과 싸울 때는 맞서 싸울 적이 포퓰리스트 정치인과 그 지지자인 일부 국민입니다. 저널리즘은 포위되기 십상입니다. 마리아 레사가 필리핀에서 처한 상황이 그렇습니다. 마리아 레사가 설득해야 하는 대상은 필리핀 국민이지만 필리핀 국민들은 레사의 사실과 의심보단 두테르테의 분노와 맹신에 더 열광하니까요. 포퓰리스트 정치인은 언론의 공격을 받으면 대중들 뒤로 숨습니다. 얀 베르너 뮐러 교수는 《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에서 이걸 정의로운 소수자 행세라고 지적합니다. 정치 권력을 쥐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대중이 지켜줘야 하는 약자처럼 포장하는 겁니다. 결국엔 포퓰리스트는 우리편 빼고 모두를 적으로 돌립니다. 이제부터 저널리스트는 자신을 적으로 여기는 독자들을 설득해야만 합니다. 포퓰리스트가 만든 구도 속에서 저널리스트는 절대적으로 불리합니다. 포퓰리스트는 대중을 이용하지만 저널리스트는 대중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독자의 합리성을 믿지 않으면 저널리즘은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마리아 레사는 노벨상을 받고 필리핀으로 돌아가도 6년형을 피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마르코스와 두테르테의 연정이 집권하면 레사의 앞날은 더 가시밭길이 될 겁니다. 필리핀 저널리즘과 필리핀 민주주의의 운명도 풍전등화가 되겠죠. 그래서 마리아 레사가 마틴 니뮐러를 인용해서 뼈있는 한 마디를 했었나 봅니다. 풀어보면 이런 얘기입니다. “포퓰리스트가 왔습니다. 맨 먼저 자신을 공격했던 나쁜 저널리스트부터 잡아갔습니다. 처음엔 모두가 박수를 쳤습니다. 나중엔 아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결국엔 아무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게 됐습니다.” 
프라임 레터는 매주 금요일 오후 5시 프라임 멤버분들에게 보내 드리는 위클리 레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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