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쳐 버린 초강대국
2화

미국의 지배력은 유지될 수 있을까?

진주만 이후 서구가 구축한 세계 질서에 최근 금이 가고 있다. 미국의 미온적 태도 때문이다.

진주만을 따라 하얗게 페인트칠한 계류장이 늘어서 있다. 전함 열(battleship row)이라고도 불렀던 이곳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의 궤적을 보여 준다. 한쪽 끝으로 가면,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기습 공격으로 파괴된 전함 애리조나호의 침수된 잔해 위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배 위에서 전사한 1177명의 선원 대부분이 부서진 배 안에 그대로 안치되어 있다. 반대편 끝에는, 인상적인 16인치 함포를 장착한 미주리호의 거대한 모습이 나무 뒤로 보인다. 그 배 위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일본 제국의 공식적인 항복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전쟁은 끝이 났다.

“저 함선들이 전쟁의 시작이며 끝이다.” 진주만 해군 기지의 공식 역사학자 제임스 노이만의 말이다. “그들의 유산이 매일 우리와 함께한다.” 참전 용사의 유가족들은 바다에 용사의 유골을 뿌리기 위해 지금도 이곳을 방문한다. 이번 주에 열린 진주만 공습 80주년 기념식에는 30명의 생존자가 참석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말한 ‘치욕으로 기억될 날’이 세계 속에서 미국의 지위를 바꾸어 놓았다. 미국은 고립주의를 포기하고 ‘정의로운 힘’으로 무장한 후 태평양에서 벌어진 전쟁에 뛰어들었다. 나흘 후 히틀러가 미국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에도 참전하게 됐다. 미국은 일본에 핵무기를 사용함으로써 세계 대전에서 앞당겨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 승리를 통해 국제 무대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자리 잡았고, 냉전에서 소련을 굴복시키기까지 지배력을 잃지 않았다.

 

새로운 무질서


최근 미국과 우방들이 수십 년에 걸쳐 건설한 자유주의 세계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미국 대통령들이 연이어 원칙에 대한 신뢰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는 시리아의 화학 무기 사용에 레드 라인(금지선)을 설정하기는 했지만 강제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2011년에 그는 이라크 철군을 결정했으나 지하드가 미국의 공백을 메우며 득세하자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도널드 트럼프는 독재자들을 끌어안았고 우방국을 저버리겠다고 위협했으며, 국제기구 해체를 시도하고, 미국이 오랫동안 발전시켜온 규범마저 파괴하려 들었다. 조 바이든은 “미국이 돌아왔다.”라고 선언했지만, 그 후 우방의 자문을 구하지도 않은 채 혼돈 속에서 아프가니스탄을 떠났다. 그의 ‘중산층을 위한 외교 정책’은 보호주의 측면에서 트럼프를 닮았다. 게다가, 트럼프는 여전히 공화당을 지배하고 있고 2025년에는 백악관으로 돌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한때 국제적으로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무슬림 국가를 민주화하려 노력하던 미국은 이제 관련 비용을 줄이거나, 국내로 눈을 돌리고 있다.

두 차례 세계 대전 사이의 위기를 연상케 하는 불길한 메아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많은 나라가 전염병과 경제 위기, 정치적 불만으로 고통받고 있다. 유럽에서는 나치 독일이 아니라 러시아가 실지회복주의 국가로서 병력을 집결해 이웃 나라, 즉 우크라이나를 위협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제국이 아닌 중국이 떠오르는 강대국으로서 곧 실행에 옮길 수도 있는 침공을 위해 무장하고 있다. 침공의 대상은 대만이다. 중국은 ‘아시아를 아시아인에게’라는 명목을 내세워 미국을 몰아내려 한다. 군비 축소를 강요해 평화를 유지한다는 발상은 이미 1930년대에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입증되었고, 이란과 북한이 핵 프로그램 통제를 거부하는 현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과거를 연상케 하는 또 다른 메아리는 외교 정책에서 ‘자제’를 지지하는 미국 학파의 등장이다. 1930년대식의 고립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자제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과거 미국이 추축국에 맞서 싸운 것은 정당했다고 인정하지만, 세계의 패권을 추구하는 것은 이제 멈추라고 주장한다.

80년 전과 비교해 많은 것이 달라졌다. 핵무기의 확산으로 강대국 간 충돌이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반면, 현실성은 줄어들었다. 국제 동맹의 구도 또한 바뀌었다. 일본과 독일은 미국과 단단하게 진영을 형성하고 있으며, 중국과 러시아는 간격을 좁혀가고 있다. 세계화가 진행되고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세계는 경제적으로 더욱 상호 의존하게 되었다. 그렇다 해도, 미국의 자기 회의, 세계화에 대한 의심, 극단적인 당파 정치, 예측 불가능한 정책 결정은 동맹국들로 하여금 미국의 힘에 의지해도 될 것인지 의문을 품게 한다. 그렇다면 지금, 미국은 무엇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가?

 

대대적인 조직 내 문제


에티오피아 내전에서부터 이주민들을 남쪽 국경으로 내몰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의 불안한 정세에 이르기까지, 강대국으로서 미국은 세계 각지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중국, 러시아, 이란에서 고조되고 있는 갈등이 바이든의 패기를 시험하는 장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곳의 갈등 상황이 미국 쇠퇴의 징후라는 생각은 꽤 그럴싸해 보인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대실패를 목격한 세 나라가 미국의 결의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까? 물론 백악관의 고위 인사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세 나라 모두 바이든 당선 전에 형성된 ‘기본적인 역학 관계’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실지회복주의에 따라 움직인다. 그들은 각각 대만과 우크라이나가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것을 두려워한다. 이란은 2018년 트럼프가 오바마의 핵 합의를 파기함으로써 협정 위반이 된 상황을 이용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외교를 통해 상황을 진정시키려 노력해 왔다. 12월 7일에 열린 화상 정상회의에서 그는 러시아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우크라이나 침공에 반대한다는 경고를 보냈다. 지난달, 유사한 상황에서 중국의 시진핑 주석을 만났을 때는 “우리 사이의 경쟁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갈등으로 비화하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빈에서는, 미국과 이란의 외교관들이 5개월간 중단되었던 핵 협상을 재개했다.

그러나 미국이 길고 지루한 논의를 진행할 능력이 있는지는 이 길고 지루한 전쟁을 미국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 미국은 한 번에 한 건이 아니라 동시에 여러 건의 분쟁에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다는 것이 매파 전략가들의 오랜 신념이었다. 그러나 현재 주류의 외교 정책 사상가 중에는 미국이 더 이상은 모든 곳에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없으며, 정치적 관심과 유한한 자원을 어디에 쏟을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자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곧 닥쳐올 것 같은 세 가지 위기 중 어느 것도 전쟁을 불사할 정도는 아니며, 오히려 위기를 막으려 군사력을 강화한다면 실제로는 분쟁의 가능성을 키우는 일이 될 것이라고 대부분의 자제론자는 생각한다. 

워싱턴에 있는 정책 연구소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소속의 스테판 베르트하임은 자신의 저서 《내일, 세계》에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즉 1940년의 프랑스 몰락과 진주만 공격 사이에는 이미 미국의 전략적 사고에 변화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전에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중립적인 자세가 필요하고, ‘열린 세계 질서’는 국제기구를 통해 보존하면 된다고 믿었던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이후에는 군사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지금은 그 반대가 진실이라고 베르트하임은 주장한다. 그는 “일인자의 지위는 미국의 안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인자 지위는 적을 만들고, 적은 미국을 공격하고, 미국은 그 적을 다시 공격하게 된다.”고 말한다. 1980년에 선언한 카터 독트린이 적절한 사례이다. 석유가 매장된 페르시아만을 장악하려는 외부 세력의 시도는 미국의 중대한 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이라는 방침이 독트린에 담겨 있다. 이후 미국은 중동 지역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골치 아픈 문제에 말려들게 되었다. 베르트하임은 미국이 너무 자주 이스라엘과 아랍 우방국들의 요청에 응해 왔다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를 펼칠 최적의 장소는 워싱턴에 있는 민간 연구 단체인 ‘책임 있는 국정운영을 위한 퀸시 연구소’이다. 이 연구소는 우파의 큰손 찰스 코크와 자유 국제주의 지지자인 조지 소로스 양측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2019년에 설립되었다. 퀸시 연구소는 아프가니스탄 철수 결정에 환호성을 올렸다. 연구소 소장인 앤드루 바세비치는 “우리는 바이든의 결정에 무척 고무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중동을 떠나야 한다고 촉구한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 나토에서도 탈퇴하고 전 세계에 퍼져 있는 750여 개의 군사 기지와 병참 기지를 폐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그 뿌리가 깊다. 연구소의 이름은 미국의 6대 대통령인 존 퀸시 애덤스를 따라 지은 것이다. “미국은 쳐부술 괴물을 찾아 해외로 나서지 않는다”고 선언한 바 있는 인물이다. 조지 워싱턴은 1796년에 행한 고별 연설에서 신생 국가 미국에 “외부 세계의 어느 지역과도 항구적인 동맹을 피하라”는 조언을 남겼다.
2021년 미군 해외 주둔 현황/ 소규모 군사시설, 미군 기지✝, 25개소 이상의 기지가 소재한 국가/ *: 미국령, ✝: 사용 협정 체결 시설을 포함한 숫자/ 푸에르토리코* 34, 영국 25, 이탈리아 44, 독일 119, 대한민국 73, 일본 120, 괌* 54 ©데이비드 바인, 〈미군 해외 주둔 기지 현황, 1776~2021〉
그런데 대부분의 정치인이 보기에 퀸시 연구소의 처방은 지나치게 강경하다. 시사 평론가들은 그 처방이 세계의 안정과 미국의 안보를 위태롭게 하고, 중국의 인권 침해에 관대해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비난한다. 대중은 호불호가 불명확하다. 시카고 국제문제협의회가 지난여름에 실시한 여론 조사를 보면 미국인들은 아프가니스탄 철수에는 찬성했지만, 일등 국가로서 미국의 지위를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처음으로, 대만을 보호하는 것에 찬성하는 사람이 과반을 차지했다.

신미국안보센터 출신의 몇몇 인물이 바이든 행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센터 소장 리처드 폰테인은 외교 정책 전문가들의 의견이 세대별로 확연히 갈린다고 말한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인 수년간의 무익한 전쟁에 실망한 젊은 학자들이 ‘자제해야 한다’는 생각에 대체로 공감하며, 민주주의를 전파하겠다는 열의는 약화한 것이다. 폰테인은 젊은 학자들이 미국의 전도자 역할에 엄청난 환멸을 느끼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말했다. “그들은 ‘트럼프와 의회에서의 폭동, 코로나 사태를 겪고도 진정으로 우리의 체제를 권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이러한 견해가 워싱턴의 담론에도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 전 세계에 걸친 미국의 헌신을 줄이고 싶은 비둘기파와 미국이 중동과 유럽에 대한 관여를 줄이고 그 관심과 자원을 아시아와 태평양으로 돌리기를 바라는 대중국 매파 양측 모두에게 서서히 퍼지고 있다. 바이든 자신은 어떤가? 바세비치는 말한다. “한편으로 그도 우리와 생각이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방위비가 특별한 이유 없이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는 중국과의 냉전이라는 발상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당장은 바이든 정부가 혼란스러운 상태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몇 가지 중요한 국가 안보 정책은 구상 단계에 있다. 아직 국가 안보 전략을 발표하지 않았고, 핵 문제에 관한 태세는 ‘검토 중’이다. 국가 안보와 외교 관련 단체에 중요한 자리가 공석으로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 않다.
바이든 대통령이 3월에 발표한 잠정 국가 안보 전략 지침에서는 미국이 해외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국내 경제를 재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침에는 국제적 위협이 길게 나열되어 있다. 전염병, 기후 변화, 사이버 위협 등을 “심대하고 일부의 경우, 실존하는 위험”으로 간주하고 있다. 민주 국가와 독재 국가 사이에 패권 경쟁이 있으며 미국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할 능력이 있는 유일한 강대국이라고 보는 중국과 훼방꾼 역할을 하는 러시아가 이를 주도하고 있다는 인식이 지침에 담겨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의 동맹 및 동반자 관계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노력해 왔다. 그는 100여 개국 정상이 참석하는 대규모 화상회의를 열기로 했다.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미국의 우방국을 한자리에 결집하려는 것이었다. 의제는 명확하지 않았다. 활동은 대부분 내년에 열릴 후속 회담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 이벤트를 민주 국가들‘의’ 회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한’ 정상 회담이라고 명명한 것이 회담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었다.

하드 파워에 관해서는 “군사력의 사용은 최우선이 아니라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외교, 개발 및 경제에 관한 국정 운영 기술이 미국의 주된 외교 정책이 되어야 한다”고 지침에서 명백히 선언하고 있다. 루스벨트는 진주만 공습 이후에조차 전쟁 노력의 우선순위를 아시아가 아닌 유럽에 두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이든 대통령은 아시아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데, 이는 유럽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줄이고 중동, 그리고 그 ‘영원한 전쟁’에서 빠져나오고자 하는 그의 열망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원칙을 정책으로 바꾸기가 쉽지는 않다. 펜타곤은 군대 배치에 대한 검토를 지난달 마쳤는데, 미군이 세계 지도에서 차지하는 공간은 크게 보아 변함이 없다. 자제론자와 대중국 매파 양측 모두가 기회를 놓친 셈이다.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는 이란의 핵 프로그램 문제를 마무리하지 못한 탓에 중동에서 발을 빼기가 어렵게 되었다. 선거 운동 기간에 바이든 대통령은 2015년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하였으나 3년 후 트럼프 대통령이 파기한 이란 핵 협상을 복원하고 진전을 이루겠다고 약속했다. 일부 제재를 풀어주는 것을 대가로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10년 이상 제한하고 그 후에는 강력한 감시 아래 두는 것이 협정의 내용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에 ‘최대한의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 부과한 제재들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란 정부는 핵 프로그램을 가속화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핵무기의 원료가 되는 핵분열성 물질 제조 기간을 1년에서 한 달 정도로 단축한 것이다. 

미국과 이란 간 간접 대화 방식의 협상이 11월 말경 빈에서 재개되었다. 그러나 미국 측 관리들이 이란이 협상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면서 벌써부터 진행이 불안해지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중에 이란이 핵무기를 손에 넣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 바 있으나 미국 당국자는 곧 ‘다른 선택들’을 고려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선택지에 핵 시설을 파괴하는 군사 행동도 포함되어 있을까? 이스라엘과는 달리 미국은 지금까지 공개적으로 그런 위협을 가하지 않았다. “군사 행동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이란은 판단한다.” 싱크탱크인 국제위기그룹의 알리 바에스는 말한다. “미국의 제재 수단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이란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는 것을 이미 목격했다. 미국이 더는 군사적으로 얽히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란은 이제 안다.”

미국의 의지를 회의적으로 보는 이란의 판단이 옳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이 독자적으로 행동에 나설 수도 있기 때문에 미국은 언제든 전쟁에 불려 나갈 가능성을 안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중동을 스스로의 운명에 맡기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외교 정책에 있어서는 이방인이 지지를 받는 경우도 있다. 이방인의 손을 이끄는 것이 미국에 최악의 적일 수도, 최선의 친구일 수도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유럽의 우방국들이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 책임을 더 나누어지기를 원할 테지만, 유럽에서도 점점 깊은 수렁에 빠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러시아는 수만 명의 군대를 우크라이나 국경 근처로 집결시켰다. 구소련 공화국인 우크라이나는 2014년 크림반도 합병으로 이미 영토의 일부를 러시아에 빼앗겼고, 러시아의 대리인인 분리주의자들이 동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한입 더 집어삼킬 준비를 하고 있다고 미국의 관리는 전하지만 그 계획을 실행할지 여부는 미정이다.

이번 주에 열린 화상회의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을 향해 준엄한 경고를 보냈다. 만약 러시아가 실제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다면, 꼼짝없이 긴 분쟁에 발목을 잡히게 될 것이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가혹한 제재를 가할 것이며 나토는 러시아 국경 쪽에 군대를 증가 배치할 것이다. 또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을 늘릴 것이다. 그러나 만약 러시아가 군사적 긴장을 점차 완화 시켜 나간다면 미국과 유럽 동맹국은 유럽에서의 안보에 관해 푸틴 대통령과 광범위한 대화를 할 용의가 있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불허 보장 등을 요구하는 푸틴의 기대에는 못 미치겠지만 말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보호하려고 군대를 파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싱크탱크 유럽정책분석센터의 커트 볼커는, 우크라이나처럼 한때 소련 연방에 속했던 발트 3국을 포함해 유럽의 나토 동맹국들을 보호하기 위한 미국의 헌신을 바이든이 유지하리라는 점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푸틴이 노리는 것은 우크라이나를 계속 괴롭혀서 대응의 강도를 두고 나토 회원국들 사이에 이견이 생기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나토의 영향력을 줄이는 것이다. 러시아가 새로운 도발을 감행할 때마다 러시아 국경 인근의 나토 회원국들 사이에는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위기감이 상승한다. 미국의 다른 경쟁국들이 바이든의 대응을 지켜볼 것이라고 볼커는 생각한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대만이다. 우크라이나를 내준다면, 대만에 관해 잘못된 신호를 중국에 보내는 것이다.”

 

방 안의 용


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치열한 경쟁’은 시대의 외교 정책을 규정하는 도전으로 인식되고 있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서로 동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주제이기도 하다.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에 부과한 제재와 관세를 대부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진주만 위쪽 언덕에 미합중국 인도태평양 사령부가 위치한다. 언덕 근처의 풍경은 편안하고 위로를 주는 느낌조차 든다.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몰디브에 이르기까지 지구의 절반에 이르는 지역의 군사 작전을 감독하는 제독과 장군들이 관광객의 천국 너머를 바라본다. 호놀룰루로 휴가객을 실어 나르는 여객기 뒤로 F-22 스텔스기가 허공에 긴 줄무늬를 새기고, 바다에 떠 있는 구축함의 검은 윤곽이 다음 파도를 기다리는 와이키키 해변 서퍼들의 배경이 되어 준다.

그러나 연이은 사령관들의 연설과 보고서는 암울한 상황을 전한다. 그들에 따르면, 중국은 모두의 예측보다 빠르게 무장하고 있으며 미 해군보다 많은 전함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은 자기네 영토라고 여기는 대만을 침공하기 위한 능력을 키우고 있다. 또한, 혹여 미군이 대만을 방어하러 오더라도 그를 물리치기 위한 능력을 키우고 있다. 정상 회담에서 시진핑 주석은 바이든 대통령에게 대만 문제에 간섭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누구든 불장난을 하면 타죽게 된다.”라고 말이다. 중국 항공기는 빈번하게 대만의 대공 방위력을 시험한다. 인공위성이 타클라마칸 사막의 철길 위로 움직이는 미국 항공 모함의 모형을 발견했는데, 이는 중국이 타격 훈련용으로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중국의 군사력에 관한 펜타곤 보고서가 나왔다. 보고서는 중국이 2020년대 말까지 핵무기 비축량을 다섯 배까지 늘려 1000개 이상의 탄두를 보유하게 될 것으로 추정했다(현재 미국과 러시아는 각각 약 4000개의 탄두를 보유하고 있다). 중국의 장거리 극초음속 무기 시험에 대해서도 미군 장성들은 우려를 나타냈다.

 

직설가


군사력의 유형에서 다음과 같은 추정이 가능하다. 시 주석은 이미 대만 강제 수복 결심을 굳혔지만, 아직 자국 무력에 대한 확신은 부족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시간이 부족하다는 느낌, 즉 중국은 2020년대 후반이 되어야 비로소 전쟁을 감수할 정도의 전력을 구축하게 된다는 판단이 섰을 법하다. 하지만 중국 정치 분석가들은 시 주석이 더 조심스러울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시 주석이 위험 부담이 큰 수륙 합동 작전에 중국 개혁이나 자신의 권력을 걸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싱크탱크인 미국기업연구소의 에리 세이어는 “만약 시 주석이 대만을 수복하지 못한다면, 그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과의 정상 회담에서 시 주석은 중국이 대만 문제에 있어 ‘인내심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입장 역시 애매하다. 미국은 1979년 중국과 국교 수립 이래, 중국의 대만 침공 시 방어에 나설 것인지 여부에 대해 확실한 언급을 피하면서 ‘전략적 모호성’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이 정책에는 중국의 대만 침공 의지를 꺾으면서, 동시에 대만이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해 중국을 자극하는 일을 막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다만, 근래에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은 좀 더 강경해지고 있다. 그는 최근 한 행사에서 미국은 대만을 방어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으며, 또 다른 행사에서는 대만이 ‘독립’되어 있다고 말했다. 정책상 변화는 없다는 대변인 발언이 매번 뒤따랐다. “바이든 대통령의 말은 더없이 좋아요. 완벽합니다. 모호하거든요”라고 트럼프 행정부에서 중국 정책 관련 업무를 맡았던 데이비드 스틸웰은 말했다. 일각에서 원하는 대로 대만 방어에 대해서 더 분명하게 공언한다면 역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레드 라인을 그으면 중국은 시험해볼 겁니다. 레드 라인은 보복과 배상의 위험이 확실할 때만 효과가 있습니다.” 

대만은 모범적인 민주주의 국가이고, 고급 기술 반도체의 주요 생산국이며 일본과 인도네시아를 따라 중국 대륙을 둘러싸고 있는 동남 중국해의 제1 열도선의 주요 연결 고리이다. 대부분의 전문가들과 당국자들은 대만이 공격받는다면 바이든 대통령이 방어에 나설 것이라고 보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중국이 전면적인 침략이 아닌 다른 작전을 선호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사이버 공격을 하거나, 본토 밖의 섬들을 점령하거나, 해상 봉쇄 전략이어도 좋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전쟁을 확대해서 핵무기 사용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전쟁까지 불사할 것인지를 두고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다.

동서양 센터의 데니 로이는 말한다. “아시아 지역에 전방 주둔군을 배치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미국의 관심 사항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유지하려면 비용도 많이 들고 위험할 것이다. 재정 긴축의 대가가 무엇일지 최소한 생각은 해봐야 하지 않겠나?” 일부 자제론자들은 중국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인도태평양에 군대를 유지하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퀸시 연구소의 마이클 스웨인은 전쟁의 비용이 막대할 것이라고 말한다. 안정성 유지라는 미국의 희망을 이루게 해주는 최선의 방법은 중국과의 군비 경쟁이 아니라, 대만의 독립을 불허하겠다는 약속을 근거로 중국과 협상을 추진하는 것이다. 그는 “어느 정도 안심시켜줘야 전쟁 억제력이 생긴다”라고 말했다.

신냉전이라고들 하지만, 중국과의 경쟁에는 소련과의 경쟁에서 특징적이었던 극심한 이데올로기 대립이 없다. 경쟁은 다른 방식으로 훨씬 치열해졌다. 중국은 소련보다 경제력이 훨씬 강한 국가이다. 많은 나라가 안보 문제에서 미국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싶어 하지만 중국과의 무역을 포기하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
낙관론이 우세할 때 미국 고위 관리들은 미국의 인프라와 기술에 대한 바이든 대통령의 투자, 국가 부채와 고령화라는 중국의 내부 문제가 한 5년쯤 뒤에 미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작동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들은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소련과 중국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 것처럼 러시아와 중국의 사이를 갈라놓고자 하는 희망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푸틴 대통령이 미국을 친구보다는 적으로 두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한편, 바이든 대통령은 우방, 파트너, 동맹과의 네트워크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으려 하고 있다. 당국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의 외교 상황은 바이든 대통령의 지원에 힘입어 트럼프 시절보다 훨씬 개선되었다. 10억 회분 이상의 코로나19 백신을 조건 없이 제공하기로 약속함으로써 미국이 세계의 ‘백신 무기고’가 되었다고 루스벨트의 표현을 인용해 그들은 강조한다. 또 글로벌 최저 법인세에 대한 합의를 이루었으며, 기후 변화 억제를 위해 분투하며 소정의 성과도 거두었다.

EU와의 무역 분쟁은 일단 미뤄둔 상태이다. 지난 6월 나토 정상들은 중국의 처신이 동맹국 전체에 대한 ‘구조적 도전’이라고 말했다. EU는 미국이 외치는 구호를 따라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을 요구해왔다. 이번 달에 EU는 세계 인프라에 거액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스스로 인정하듯 설익은 시도라는 평가가 있기는 하지만, 앞서 미국은 중국의 ‘일대일로’에 맞대응하기 위한 투자 계획을 제시한 바 있다.

오커스(AUKUS)라고 알려진 3자 협의체를 통해 미국과 영국은 핵잠수함 기술을 호주에 제공하기로 합의했으며, 이에 따라 호주는 대만을 두고 전쟁이 벌어질 경우, 미국을 지원하겠다고 천명했다. 평화주의의 내력이 있는 일본조차 참전 의사를 내비쳤다. 이렇게 미국, 호주, 일본 3국에 인도까지 참여하여 ‘쿼드’를 결성하고 지정학적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그러나 동맹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국제주의를 신봉하는 정부라도 마찬가지다. 오커스 결성에 프랑스는 분노했다. 이미 예정되어 있던 잠수함 공급 계약이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핵 태세 검토 보고서’ 발표를 앞두고 미국과 가까운 동맹국들은 불안을 느끼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과거에 미국 핵 사용 정책의 ‘단일 목적’은 핵 공격을 저지하거나, 핵 공격에 대해 보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동맹국들은 이런 태세 전환 때문에 미국의 ‘확장 억제’ 전략이 손상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확장 억제 전략은 동맹국들을 핵우산 아래 둠으로써 재래식 무기의 위협으로부터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일부 국가는 스스로 핵무기를 개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될 수도 있다. 또 다른 문제는 바이든 대통령이 자유 무역, 특히나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TPP)을 아주 싫어한다는 점이다. TPP는 11개국이 창립한 협력체로서 오바마 대통령이 협상에 참여했으나 트럼프 대통령이 파기한 바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개정된 협정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고, 이로써 미국은 중국과의 경쟁에 필수적인 경제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 러시아, 이란이 공격성을 더해가는 상황을 고려하면, 요동치는 정책을 펼침에도 미국은 여전히 매력적인 우방이다. 이코노미스트 특파원이 진주만을 방문한 날, 한 쌍의 영국 초계정이 이 지역에 반영구적으로 새로 배치된 미국 전함들과 함께 나란히 정박되어 있었다. 일본 잠수함은 항구 밖에서 항해하고 있었으며, 선원들이 의례용 하얀 제복을 입고 갑판에 도열해 있었다. 미국이 세계에 대한 지배력을 계속 유지한다면, 그것은 과거의 원수와 오래된 친구를 똑같이 결집할 수 있는 능력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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