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운동과 페미니즘의 균열
완결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의 균열

미투가 촉발한 페미니즘 진영 간의 갈등은 사회적 페미니즘과 개인주의적 페미니즘 사이의 오랜 논쟁이 드러난 것이었다.

일러스트레이션 ⓒEleanor Shakespeare
2017년 10월 초에 미투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많은 여성이 희망적인 기운을 받았지만, 어떤 여성들은 불편함을 느꼈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서 학대와 괴롭힘에 관한 이야기들이 쌓이면서, 남성들은 그간 자신들이 여성을 대했던 태도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일자리를 잃고, 어떤 이들은 위상이 추락하는 등 많은 이들이 공개적으로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할리우드의 제작자이자 강간 혐의자인 하비 와인스타인(Harvey Weinstein), 여성들 앞에서 자위행위를 한 코미디언 루이스 C. K.(Louis C. K.),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했던 배우 케빈 스페이시(Kevin Spacey)를 비롯해 많은 남성들이 경력에 사망 선고를 받았다. 그 외에 여성들의 몸을 더듬었던 셰프 마리오 바탈리(Mario Batali) 같은 이들은 공식 석상에서 잠시 “뒤로 물러났다.” 사회적인 심판을 받은 것이지만, 많은 여성은 그것이 이미 한참 늦었다고 생각했다.

미디어는 물론 각 개인의 일상에서도 합의하의 관계, 적대적인 환경, 권력 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전혀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성적으로 접근해 오는 남성들의 행동이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위력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인식이 점차 확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러한 논의는 보수적인 칼럼니스트인 앤드류 설리번(Andrew Sullivan)에서부터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남성의 격한 반응과 분노에 의해 중단되었다. 그들은 미투 운동이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었음에도 그것이 너무 멀리 나아갔다고 주장했다. 그런 가운데 페미니즘 진영 내부에서도 예상치 못했던 분열이 일어났다.

 

페미니즘의 충돌과 세대 갈등 논쟁


어떤 이들은 심판이 더욱 진행되기를 원했던 반면,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주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미투 운동에 대한 가장 흔한 불만은 이 모든 움직임이 너무도 빨리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었다.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는 《뉴욕타임스》의 대프니 머킨(Daphne Merkin)과 바리 와이스(Bari Weiss), 《하퍼스 매거진》의 케이티 로이프(Katie Roiphe), 《시드니 모닝 헤럴드》의 저메인 그리어(Germaine Greer), 그리고 《르 몽드》에 공개서한을 게재한 100명의 프랑스 여성 등은 미투 운동으로 제기된 성희롱 사건 중에서 상당수가 비교적 경미한 수준이라서 대중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할 거라고 말했다. 그들은 미투 운동이 광범위한 성적 비위들을 모두 하나의 범주로 묶어버림으로써 애초의 취지가 모호해졌다고 말한다. 그들은 여성들에게 더욱 냉정해질 것을 촉구했다. 전혀 비상식적이지만은 않은 비판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라고 말했다. 대프니 머킨은 성적 괴롭힘과 폭력에 대한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빅토리아 시대의 가정주부처럼 연약한 존재로 여긴다”고 썼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여성들은 성적 괴롭힘과 폭력 문제로 인한 고통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뛰어난 유머와 강인한 인내심, 높은 아량으로 그것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미디어는 이러한 의견 차이를 세대 간의 갈등으로 특징지었다. 40살이 넘은 나이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미투 운동에 악의적으로 연루되어 있다거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구식이라거나, 아니면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럽게 행동한다는 말을 들었다. 좀 더 젊은 여성들은, 누구에게 묻느냐에 따라서 다르긴 했지만, 정의로울 정도로 열정적이라거나, 순진할 정도로 이상주의적이라거나, 아니면 살기등등하다는 말을 들었다.

세대 차이라는 개념은 쉽게 말해서 페미니스트 진영 내부에서 미투 운동을 반대하는 사람과 지지하는 사람 사이를 구분 짓는 말이다. 케이티 로이프는 미투 운동을 “트위터 페미니즘”이라고 비웃으면서, 그것이 자기애적이며 소셜 미디어에 집착하는 밀레니얼 세대만이 성폭력에 대한 심판을 원하고 있다는 인상을 줬다. 바리 와이스는 미투 운동의 방향성을 비판하는 글에서 코미디언 아지즈 안사리(Aziz Ansari)에게 성폭력 혐의를 제기한 한 익명 여성의 젊음과 순진함을 지적했다. 한편 필진과 독자 모두 젊은 세대인 페미니스트 웹사이트 제저벨(Jezebel)은 “미투 운동을 비판하는 이들은 2세대 페미니즘(second-wave feminism)[1] 그룹이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행했다. 그들은 나이 든 페미니스트 사상가들이 미투 운동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한편으로 그러한 사상가들이 실제로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언급하지 않았다. 양쪽 모두 서로를 비판하며 나이에 대한 정형화된 이미지를 사용했다. 나이 든 여성들은 쉽게 짜증을 내고 현실 인식이 부족하다고, 또는 젊은 여성들은 이기적이며 버릇없는 아이들이라는 등의 다앙한 수준의 냉소적인 표현들로 말이다. 그러나 성폭력을 당한 뒤에 용감하게 앞으로 나서는 이들 중에는 젊은 여성도 있었고, 나이 든 여성도 있었지만 그러한 사실에는 모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또한 미투 운동을 폄하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나이 역시 다양하다. 32세의 바이스는 나이로 따지면 머킨의 딸이나 그리어의 손녀뻘에 해당한다.

미투 운동과 그에 대한 반발로 인해서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실제로 분열이 일어났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그러한 분열을 전하는 양상은 마치 여자들끼리의 싸움이나, 피곤한 엄마와 십대 딸 사이에 벌어지는 말싸움처럼 묘사되었다. 그것은 미투 운동을 둘러싼 페미니스트들 사이의 논쟁이 우리가 익숙하게 봐왔던 일종의 일일 드라마처럼 보였다는 의미를 내포했다.

이것은 잘못이다. 이들 두 진영이 주장하는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적인 면에서 더욱 깊고도 심각한 균열이 드러난다. 실제로 이러한 논쟁이 벌어지는 원인은 페미니즘 내부에 성차별에 대하여 서로 뚜렷하게 구분되는 두 가지의 이해 방식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는 극도로 다르며, 때로는 성차별 문제의 해결 방식에 대해서 서로 공존할 수 없을 정도로 대립하는 경우도 많았다. 첫 번째 이해 방식은 실용주의, 현실주의, 자립 의식이라는 관념에 기반을 둔 단호하며 개인주의적인 입장이다. 두 번째의 접근 방식은 공통의 이익과 연대라는 관념에 기반을 둔 포괄적이고, 공동체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입장이다. 이처럼 두 가지 유형의 페미니즘 사이에 벌어진 충돌은 미투 운동에 의해 극명하게 드러났지만 이러한 갈등은 페미니즘 사상이 지난 수십 년 동안 변화하고 발전하면서 나타난 결과다.

 

전통적 페미니즘과 미투 운동


미투 운동을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주된 비판 가운데 하나는 이 운동이 여성들 개개인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고, 섹스를 즐기고 추구할 수 있으며,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는 도덕적인 주체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성적 괴롭힘이나 폭력을 당한 경험을 증언하며 앞으로 나서는 여성들은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 미투 진영의 논리에 따를 때보다 더욱 많은 책임을 져야만 한다. 이러한 사고는 개인의 책임과 독립성을 강조하고 고난에 저항하는 의지를 매우 가치 있는 덕목으로 여기는, 그래서 어찌 보면 자본주의와도 매우 잘 어울리는 오랜 도덕적인 전통을 따르고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는 것을 중시하는 정신이다. 가난에서 번영으로, 또는 미투를 반대하는 페미니스트 진영의 논리에 의하면 “여자 같은(feminine)” 피해 의식을 떨치고 “남자 같은(masculine)” 강인함으로 일어서야 한다는 관념이다. 그들은 성희롱이 만연해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그것이 불가피한 것일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래서 최선의 대응은 분노가 아니라 그것을 원만하게 해결하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이란 여성 개개인이 성차별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을 줄일 수 있으며 피할 수 없는 성차별이라면,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감당할 용기가 있다면 그것을 감내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미투 운동 진영의 입장은 다르다. 물론 미투 운동이 전체적으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목소리를 낸다고 주장하는 것, 그리고 수많은 업계와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일어난 일련의 부정행위에 문제를 제기하는 문화적 흐름이 하나의 의제로 통일될 수 있을 만큼 일관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의 사회적 운동이자 개인적 입장으로서 미투 운동은 지금까지 발전해온 주류 페미니즘의 지적인 전통과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몇 가지 특별한 가정을 하고 있다. “나도 그렇다(me too)”라고 말함으로써 한 명의 여성은 자신을 더욱 넓은 집단의 일원으로 속하게 한다. 괴롭힘을 당하거나, 폭력을 당하거나, 성폭행을 당한 다른 사람과 함께 하기로 선택한다. 이러한 연대는 강력하다. 거대한 규모의 여성들이 자신의 고통을 여성의 고통으로 규정하고, 그들도 똑같은 종류의 성차별 세력에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하며, 그러한 세력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척 보기 드문 사례이다.
2017년 12월, 뉴욕에서 열린 미투 시위. ⓒZuma Wire/Rex/Shutterstock

이런 측면에서 보면, 미투 운동의 넓은 폭과 다양성은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강점이다. 결국 삶의 유형이나 배경과 관계없이 수많은 여성이 남성들로부터 동일한 성차별적 행동을 경험했다면, 그 문제는 개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며, 오히려 더욱 넓은 문화적 조건들과 관계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성희롱이 만연하다는 것은 그 문제가 그저 한 명의 개인이 올바른 선택을 한다거나 확고한 의지로 자신을 단련한다고 해서 회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성들에게 그런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불합리해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그것을 “개인주의적 페미니즘”과 “사회적 페미니즘” 사이의 갈등이라고 표현하겠다. 부분적으로 이러한 균열은 페미니즘 운동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힘을 키울 것인지, 아니면 집단적인 해방을 추구할 것인지에 대한 차이이다. 그러나 두 부류의 생각 사이에는 도덕적으로 훨씬 더 큰 차이가 있는데, 그 이유는 미투 운동 진영과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성적 학대의 책임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쪽은 사회에서 직면하는 여성 혐오를 견디고 극복하는 것이 여성 개인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쪽은 성차별을 없애는 것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애초에 여성들이 그러한 상황을 마주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미투 운동의 사회적 페미니즘 경향


개인주의적 페미니즘과 사회적 페미니즘 사이의 긴장은, 20세기 중반 이후에 페미니즘이 부활한 이후로 여성주의 운동 진영을 계속해서 따라다닌 사안이다. 페미니즘의 개인주의적 모델에 의하면, 개인의 자유와 책임 그리고 심리적 적응(psychological adjustment)[2] 물리적인 여건과 사회적인 환경에 대하여 심리적으로 조화로운 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여성에게 가부장제가 강요하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남성들과 평등해질 수 있는 유의미한 경로를 제공한다. 서구의 가장 유명한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전통에서 흐름을 이어왔다.

예를 들어서, 1960년대에 출간되어 거대한 영향을 준 《여성성의 신화(The Feminine Mystique)》의 저자인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은 성차별적인 문화 코드가 여성들이 개인적인 행복을 성취하는 걸 방해한다고 주장했다. 심리학을 전공한 프리던은 20세기 중반 미국의 백인 중산층 여성들 내면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보다 최근으로 와서, 개인주의적인 페미니즘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페이스북의 최고운영책임자(COO)이며 2013년에 일종의 회고록이자 선언서이기도 한 《린 인(Lean In)》을 출간한 셰릴 샌드버그(Sheryl Sandberg)가 있다. 샌드버그는 사회의 지도적인 위치에 여성들이 없는 것을 한탄한다. 그녀의 책은 기업에서 높은 위치에 오르고자 하는 야망이 있는 여성들을 위한 일종의 안내서이기도 하다.

사회적 페미니즘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프리단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직후, 레오폴디나 포르투나티(Leopoldina Fortunati),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와 같은 이탈리아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이 마주하는 문제를 바라보는 다른 방식을 고안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그들은 계급으로서의 남성들이 계급으로서의 여성들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분석하고자 했다. 그들은 개인의 역량이나 자아실현이라는 아이디어보다는, 노동, 생활 조건, 돈의 관점에서 여성들을 파악하는데 더욱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바닥을 닦는 일에서부터 상처에 붕대를 감는 작업, 모유 수유, 요리, 성매매, 빨래, 노인 돌보기에 이르기까지, 소위 말하는 “여성들의 일”이 단지 하나의 일거리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임금-노동 체제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만약 남성들이 가정에서 스스로 이러한 기능들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일터에 돌아가서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터에서 남성들이 하는 일은 가정에서 여성들이 하는 일에 의존하고 있었다.

1972년에 페데리치가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Wages for Housework)’ 캠페인을 시작했을 때, 이는 대중적으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벌어졌고, 페데리치가 뉴욕으로 이주하여 브루클린에서 이 캠페인을 위한 사무실을 개소한 이후에는 미국에서도 논쟁이 일어났다. 주류 정치권은 페데리치의 생각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정말로 여성들이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 집의 바닥을 닦는 것에 대해서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런데 이 운동은 임금이라는 것이 노동을 노동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는 필수적인 요소라는 이해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임금은 노동을 수행한 사람들이 존엄하며 그들이 보호받을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는 수단이었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요구라기보다는 좀 더 수사적인 장치에 가까웠다.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의 요구는 여성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노동자 계급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었다. 따라서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여성들도 공통된 이해관계를 대변하여 조직적으로 행동에 나설 수 있는 집단이었다.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운동은 흐지부지되었지만, 그 영향력은 인종 평등, 동성애자 권리, 주거권, 성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캠페인에서 명맥을 잇고 있다.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캠페인의 이면에는, 여성에 대한 억압이 만연하고, 심지어 그것이 서로 매우 다른 환경에서 생활하는 여성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며, 그래서 개인적인 경험을 넘어서는 정치적인 현상이라는 인식이 존재했다. 성차별은 수많은 사람을 쓰러뜨린다. 바로 그렇기에 서로를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여성들의 공동체가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젠더에 의한 억압을 경험한 사람들도 그것을 끝내기 위해 서로 뭉칠 수 있다.

《여성성의 신화》를 쓴 베티 프리단. 1986년. ⓒBettmann Archive
미투 진영에도 비슷한 주장이 있다. 성적 괴롭힘과 폭력이 시스템과 관련된 것이며, 여성들은 그것의 종식을 요구하기 위해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리단이나 샌드버그 같은 개인주의적인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심리와 태도를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성차별 문제에 접근했던 반면,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을 주장했던 이들은 좀 더 넓은 차원에서 자본주의의 경제적 영향력이 여성을 어떻게 억압하는지를 연구했다. 미투 운동은 가부장제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이데올로기적인 측면보다는 좀 더 즉각적인 대응에서 나온 접근법이었다. 그들의 입장은 여성에 대한 혐오가 구조적이며, 여성들은 그것에 맞서 싸우기 위한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다는 가정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이는 미투 운동이 모든 여성의 경험을 동일하게 취급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운동에는 여러 다양한 인종, 출신, 종교적인 배경을 가진 여성들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부유한 여성과 가난한 여성, 건강한 여성과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여성, 시스젠더(cisgender)[3]와 트랜스젠더, 유명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의 증언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 덕분에 여성 혐오가 실제로는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모든 여성이 성차별을 피할 수 있는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점점 더 널리 퍼졌다.

미투 운동 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러한 사회적 페미니즘의 경향은 킴벨레 크렌쇼(Kimberlé Crenshaw)와 같은 미국의 흑인 페미니스트 학자들로부터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크렌쇼는 흑인 여성들의 삶에서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결합된 본질을 파헤치고자 했으며, 인종차별과 성차별 모두를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현상이 어찌하여 전혀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지를 분석하려고 노력했다. 크렌쇼는 1989년에 발표한 〈인종과 성의 교차점을 주변부에서 끌어내기(Demarginalizing the Intersection of Race and Sex)〉라는 제목의 법학 논문에서 “교차성(intersectionality)”이라고 부르는 억압을 새롭게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억압이라는 것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서로 다르게 나타날 수 있으며, 각 개인이 동시에 여러 맥락에서 경험하는 억압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크렌쇼의 접근법을 자세히 살펴보면, 만약 가부장적 억압에 대한 효과적인 운동 방식이 있다면, 그것은 수많은 여성의 성차별에 대한 경험을 더욱 강하게 억압하고 있는 다른 유형의 시스템적인 불평등에 맞설 때도 효과가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교차성이라는 개념은 미투 운동 진영이 이해하고 있던 성적 괴롭힘과 폭력에 대한 의미를 한층 확장해 주었다. “나도 그렇다”라고 말하는 행동은 일차적으로는 그런 경험을 했던 모든 여성과의 연대를 의미하지만, 이러한 운동의 방식은 좀 더 특별한 형태의 개인적 선언이 될 수 있었고, 각양각색의 상황에서 겪은 다양한 증언들이 알려질 수 있게 해주었다. 반-미투 성향의 페미니스트들은 “그 자리를 왜 그냥 떠나지 않았어?”라며 경멸적으로 묻기도 한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수많은 여성은 그들의 삶에서는 그러한 가능성이 사실상 닫혀 있었다고 증언한다. 자칫하면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손버릇 나쁜 상사나 동료에게 단호하면서도 강한 어조로 “노(No)”라고 말한다는 것은 슬프지만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모든 여성이 비상시에 택시를 호출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여성이 개인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것은 아니다.

미투 운동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어마어마한 양의 증언들은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이 단일한 형태의 폭력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다. 여성이라면 누구든 겪을 수 있는 일이지만 각각의 여성이 그것을 경험하는 방식은 모두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투 운동은 연대 속에서, 성적인 괴롭힘과 폭력의 종식을 요구하는 공개적인 행동을 통해서, 여성들이 제도적 불의에 맞서기 위해서 계급의식, 단결이 필요하다는 전통을 잇고 있다. 이를 미투(me too) 운동의 “투(too, 동일한 속성)”라고 부르자. 여성들이 함께 힘을 합쳐서 구조적, 문화적, 제도적 차원에서부터 변화를 일으켜야만 여성 혐오의 문화를 진정으로 떨쳐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페미니즘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사회적 페미니즘에서는 소수의 여성이 가부장적 시스템 내에서 권력을 가진 위치에 오르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이란 여성들에게 “테이블 석상에 자리 하나”를 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그 테이블을 해체한 다음, 모두가 함께 앉을 수 있는 새로운 테이블을 만들자는 것이다.

 

새로운 페미니즘을 위한 제안


이것은 간단한 제안이 아니다. 하나의 접근법 방식으로서 사회적 페미니즘은 심각한 결함이 있다. 그러나 미투 운동을 비판하는 페미니즘 진영에서도 그것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사회적 페미니즘의 진정한 약점은 여성들이 그들의 불편함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너무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여성의 연대에 대한 촉구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유형의 고통과 갈등을 간과하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말하는 “여성”이란 어떤 의미인가? 우리가 모든 여성에게 있어서 공통적이라고 파악하는 경험이나 조건들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그렇게도 많은 사람에 대한 특성을 한꺼번에 일반화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불의와 불평등, 특권처럼 보편적인 질문들을 던진다면, 중대한 차이점들을 간과할 수도 있다. 여성들은 (단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집단이며, 그들은 가부장제만의 전유물이 아닌 인종차별, 계급차별, 능력주의, 성적 취향 등 수많은 요소가 교차하여 나타나는 억압을 마주하게 된다. 때로는 이러한 억압을 다른 여성이 강제하는 경우도 많다. 인종과 부의 격차, 식민주의의 영향, 심각한 편견, 역사적 경험, 단순한 분노, 방어의식, 무시, 상처 등 여성들을 서로 갈라놓는 요소들은 실로 방대하다. 그러한 영향들이 서로 교차하는 것을 발견한다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투 운동은 여성들 간의 연대가 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여기에서는 “여성”이라는 개념을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여성 혐오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미투 운동이 그러한 규정을 가능하게 했다. 미투 운동은 이러한 고통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어찌 보면 절망적인 연대다. 그러나 미투 운동은 그러한 비통한 인식을 훨씬 더 희망적인 움직임으로 바꾸어냈다. 미투 운동은 여성들이 공통된 슬픔과 분노로 여성 혐오적인 행태에 초점을 맞추도록 자극했다. 또한 그것은 많은 여성들이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비전과 더불어 우리가 함께 가진 힘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미투 진영 내의 사회적 페미니스트들은 성적 괴롭힘과 폭력, 수많은 형태의 여성 혐오를 없앨 수 있는 실질적인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바로 그러한 집단적 상상이 그런 세상에 대한 가능성을 더욱 높여준다. 우리가 변화를 요구하며 더욱 연대할수록 인간에 대한 존중이 보편적인 것이 되고, 잔혹함은 사라지고, 다른 사람의 삶에 더욱 공감하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키지 않는 세상을 상상하기가 더욱 수월해질 것이다.
미국의 법학자인 킴벨레 크렌쇼. ⓒFelix Clay/Guardian
그러나 미투 운동이 세대 간의 갈등이라는 프레임을 쓰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미투에 반대하는 개인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의 태도가 지혜롭고 현실적이며, 무엇보다도 성숙한 의식에 근거하고 있다는 프레임을 직접 씌웠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을 다시 창조하고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논의가 한심할 정도로 순진하게 들릴 뿐이다. 대프니 머킨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반미투 평가의 취지에 대한 글에서 여성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일괄했다. “철 좀 드세요, 여기는 현실 세계입니다.”

개인의 능력 및 성숙함의 전형인 그들은 상당히 흔하면서도 매우 이상한 믿음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지금보다 더 좋을 수 없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지금보다 더 친절하게 대할 수 없으며, 남성들의 권위와 어리석음과 여성들을 마치 먹잇감처럼 보는 태도는 영구적이고 변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 분명하다는 체념적인 태도이다. 더 나은 세상을 요구하고, 언젠가는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어린애 같은 연약함으로 일축하는 이러한 태도를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소 기이하다. 세상에는 반미투 페미니스트들의 이러한 접근을 마치 강인하며 실용적인 태도처럼 보이게 만드는 사고방식이 존재한다. 물론 이러한 태도를 매우 안타깝게 바라보는 사고방식도 존재한다.

성폭행 피해자들을 비롯해서 끔찍한 학대를 겪은 정신 질환 환자들의 치료법에 대하여 《트라우마와 회복(Trauma and Recovery)》[4]이라는 책을 쓴 하버드대학교의 임상심리학자 주디스 허먼(Judith Herman)은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에게 공감하려는 듯한 태도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가해자의 편에 서고자 하는 것은 매우 강력한 유혹이다. 가해자는 방관자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그들은 사악한 것을 보지 않으려 하고, 듣지 않으려 하고, 말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욕망에 속삭이는 것이다. 반면에 피해자는 방관자들에게 가해자를 비판하거나 공격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느끼는 고통의 부담을 나눠 달라고 요청한다.”

반미투 진영의 개인주의적인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사고방식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성폭력을 저지른 가해자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겪은 여성들이 선택한 행동에 더욱 커다란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태도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연루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려는 시도이자, 고통의 부담을 나누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미투 운동과 그것이 촉발한 심판은 우리가 애써 외면해왔던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것은 끔찍한 일들이 얼마나 일상화된 것인지, 우리 중에서 그렇게 고통받아 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 것은 반미투 진영의 페미니스트들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1]
1960년대 초부터 대략 20년 동안 흐름을 주도했던 페미니즘 운동
[2]
물리적인 여건과 사회적인 환경에 대하여 심리적으로 조화로운 관계를 수립하는 것
[3]
성 정체성과 생물학적인 성이 일치하는 사람
[4]
한국어판 제목은 《트라우마: 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2012, 열린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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