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
 

12월 셋째 주 프라임 레터

안녕하세요. 북저널리즘 CCO 신기주입니다. 

“.” 친구의 카톡 대화명입니다. 이젠 세상에 없는 친구입니다. 친구는 2017년 12월 18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언제부터 친구의 카톡 대화명이 마침표였는지 이젠 확실히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생전에도 친구의 카톡 대화명이 마침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스스로 삶에 마침표를 찍을 사람처럼요. 분명 카톡 프로필도 늘 검은색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날 이후 친구의 카톡 대화명이 마침표로 바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친구의 어머님이 바꿔 놓으신 게 아닐까 짐작합니다. 그날 이후 어머님께는 가끔씩 안부를 여쭙니다. 올해는 바빠서 뻔한 안부 인사 조차 못 드렸더군요. 그래도 12월 18일이 되자 어김없이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역시나 어머님은 친구를 만나고 계셨습니다. 대신 친구한테 안부 인사를 전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친구는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됐습니다. 서울추모공원은 산 속 깊숙한 곳에 자리한 정갈하고 엄숙한 곳입니다. 화장 절차의 시작은 봉송의식입니다. 고인이 누운 관을 운구차에서 거관하는 절차입니다. 이때는 다들 덤덤합니다. 3일장을 치른 뒤라 다들 지칠 대로 지친 상태입니다. 다음은 고별의식입니다. 가족들만 참석할 수 있습니다. 고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마주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이 지나면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사진으로 밖에 기억할 수 없습니다. 이때도 현실 같진 않습니다. 아직 눈 앞에 있으니까요. 아직 만질 수 있으니까요. 다음은 화장의식입니다. 고인의 육신은 화장로로 들어갑니다. 이때부터 모두의 억장이 무너집니다. 친구가 한 줌 재로 사라지는 겁니다. 빛나는 영혼을 담았던 아름다운 육신이 이 세상에서 영영 없어져 버리는 겁니다. 모두에게 죽음이 현실이 돼 버리는 순간입니다. 

지나고 보니 친구와의 시간에 마침표가 찍혔던 건 그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영안실에서도 내내 현실 같지가 않았거든요. 카톡엔 아직 친구와 나눈 대화 내용이 남아 있었습니다. 고민도 있었습니다. 농담도 있었습니다. 서울추모공원에서도 지난 카톡 내용을 자꾸 만지작거렸습니다. 꼭 지금이라도 카톡을 보내면 금방이라도 1이 사라질 것만 같았죠. 친구의 육신을 담은 관이 검은 화장로 안으로 사라질 때가 돼서야 이게 끝이라는 현실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매주 만나서 웃으며 얘기하던 시간들이 끝이 난 겁니다. 마침표가 원통해서 말줄임표처럼 울었습니다. 
12월 17일 금요일 자 《조선일보》 1면엔 90초 코로나 사별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코로나 사망자는 화장부터 하고 장례를 치르는 게 현재 정부 지침입니다. 시신 접촉으로 인한 유족의 코로나 감염을 차단하려는 조치입니다. 문제는 죽은 자가 산 자에게 코로나를 전파한다는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코로나는 호흡기 질환입니다. 살아 숨 쉬는 사람이 매개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죽어 숨 멎은 사람은 희생자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코로나 희생자의 유족들은 화장터에서 죽은 가족의 마지막 얼굴조차 보지 못합니다. 봉송식과 고별식과 화장식이 불과 90초입니다. 

“유족 홍모씨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얼굴 못 봐요? 어머니 모습 못 봐요?’라고 했지만, 직원은 ‘이따 유골 받으실 때 볼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홍씨가 재차 ‘얼굴만이라도’라고 했지만, ‘얼굴은 안 된다’는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서울시립승화원을 취재한 《조선일보》 김명진 기자가 쓴 기사의 일부입니다. 멀찌감치에서 관을 향해 절을 올리는 유족들의 사진을 보다가 눈가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 이래선 안 되는 거니까요. “코로나 환자는 생전에도 홀로 격리 치료를 받은 경우가 많다”는 대목을 읽을 땐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사람이 사람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니까요. 오전 15미닛픽퐁 회의에서도 울분을 토했습니다. 북저널리즘 15미닛픽퐁은 위워크 라운지에 있는 탁구대에서 15분 동안 10개가 넘는 이슈를 검토하는 속전속결 밋업입니다. 울분 따위를 토할 틈이 없습니다. 그날은 그랬습니다. 

다음날이 친구의 기일이라서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와 보낸 시간에 마침표가 찍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니까요. 화장터에서 마지막 얼굴과 마지막 인사는 유족에겐 너무 간절합니다. 이게 끝이라는 걸 절감하는 순간 가슴이 에입니다. 더 이상 부여잡을 것도 없는데 뭐라도 부여잡습니다. 마지막 얼굴이라도 마지막 인사라도 간절하게 빌게 됩니다. 마지막 얼굴조차 보지 못한다면 마지막의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못한다면 망자의 죽음은 산 자의 한이 됩니다. 지난 2년 동안 코로나 희생자 4644명 가운데 80%가 이렇게 한스럽게 화장됐습니다. 유족들은 반강제적인 정부의 지침에 따라야만 했습니다. 시신은 수의조차 입지 못한 채 환자복 차림으로 불태워졌습니다. 최근 코로나 사망자가 증가하면서 한스러운 화장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방역 매뉴얼에 따라 눈물도 금지된 코로나 시대의 죽음들입니다. 

친구의 기일이었던 지난 12월 18일 중앙방역대책본부는 선화장 후장례 정부 지침을 선장례 후화장으로 개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유족들의 애통한 호소가 늘어만 가기 때문입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하루 평균 62명이 코로나로 희생되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엔 하루 1명도 안 나왔습니다. 사실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도 정부는 코로나 선화장 후장례 지침을 개정하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변한 건 없었습니다. 사방에서 곡소리가 나고 나서야 겨우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말처럼 쉽진 않습니다. 장례관련단체들이 거듭 반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희생자의 주검을 모시고 병원 영안실에서 3일장을 지내는 감염 공포와 국민 인식 때문에 어렵다는 주장입니다. 시신은 코로나 감염성이 없다는 세계보건기구와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의 입장을 들이대도 요지부동입니다. 과학보다 믿음이 중요하니까요. 장례는 어렵다 하더라도 화장터에서 마지막 얼굴과 마지막 인사 정도는 부디 당장 허락해줘야 합니다. 그게 산 사람이라도 살리는 일입니다. 마침표를 느낌표로 다시 시작점으로 승화시키는 길입니다. 

4년 전 그날도 오늘처럼 눈이 왔던 것 같습니다. 하늘에서 하얀 슬픔이 내렸습니다. 땅 위에 하얀 눈물이 쌓였습니다. 친구는 음악을 사랑했습니다. 매년 오늘이면 친구가 남긴 노래를 한 곡씩 골라서 하루 종일 듣습니다. 친구를 추모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같습니다. 올해는 이걸로 골랐습니다. 따뜻한 겨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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