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씨는 권력을 쓸 줄 모르는 걸 넘어서 권력을 지킬 줄도 모르는 정치인이었습니다. 국정농단 사태는 박근혜 씨가 주권자인 국민이 위임한 대통령 권력을 비선실세 최순실한테 초법적으로 일임하면서 초래된 일입니다. 국민은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대통령 박근혜의 무능력에 실망했습니다. 국민은 최순실 사태에서 드러난 대통령 박근혜의 무책임에 분노했습니다. 2016년부터 2017년 겨울 동안 이어진 촛불혁명은 실망과 분노의 도가니였습니다. 한편으론 박근혜 씨에 대한 실망과 분노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론 박근혜 같은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뽑은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분노였습니다. 우리가 좀 더 유능한 대통령을 뽑았다면 세월호의 아이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수장되지는 않았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좀 더 책임감 있는 대통령을 선택했다면 최순실 같은 비선실세가 청와대에서 기생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우리의 선택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오점을 남겼습니다.
권력을 쓸 줄도 모르면서 권력을 갖고만 싶어했던 박근혜 씨가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하고 청와대에서 퇴거당하고 특검에 기소당하고 감옥에 수감당한 건 사필귀정이었습니다. 박근혜 씨는 2021년 1월 국정농단과 국정원 특활비 상납 등의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20년에 벌금 180억 원에 추징금 35억 원을 확정 받았습니다. 정작 박근혜 씨는 4년 9개월의 수감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국민에게 자신의 무능과 무책임에 대해 사과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최근 발간된 옥중 서신 모음집 《
그리움은 아무에게나 생기지 않습니다》에선 이렇게 밝혔습니다. “믿었던 주변 인물의 일탈로 인해 혼심의 힘을 다했던 모든 일들이 적폐로 낙인찍혔다. 무엇보다 정치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함께 했던 이들이 모든 짐을 제게 지우는 것을 보면서 삶의 무상함도 느꼈다.” 전가의 보도인 배신의 정치 논리입니다. 정말 배신당한 건 대통령 박근혜에게 국정을 맡겼던 국민입니다. 이번만큼은 국민도 속았고 저도 속은 게 아닙니다. 제가 국민을 속였다고 사죄해야 맞습니다. 살려달라고 대통령 앞에 국민이 무릎 꿇는 민주정치의 대참사를 연출했던 박근혜 씨는 탄핵까지 당하고서도 국민 앞에 잘못했다고 고개조차 숙이지 않았습니다. 여전한 박근혜식 유체이탈 정치입니다.
전직 대통령 박근혜 씨는 2021년 12월 31일 0시에 석방됐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사면으로 박근혜 씨는 15년여의 남은 형기와 150여억 원의 벌금을 면제받게 됐습니다. 정치공학적 해석이야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박근혜를 풀어준 문재인과 박근혜를 잡아넣은 윤석열의 대칭 구도가 만들어졌습니다. 윤석열 후보와 야권은 자칫 탄핵의 강에 다시 빠질 수도 있습니다. 윤석열 후보가 연말 연초에 대구경북 지역에서 집중 유세를 펼치고 있는 배경입니다. 이재명 후보는 사면의 책임은 회피하면서 대구경북의 표심에는 어필하는 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대선 정국에 전직 대통령 박근혜 씨라는 정치적 변수가 등장한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려됩니다. 박근혜 씨는 권력을 국민을 위해 쓸 줄은 모르지만 권력을 자신을 위해 쓸 줄은 아주 잘 아는 정치인이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박근혜 씨의 정치적 영향력이 가장 강했던 시기는 최고권력책임자인 대통령이었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대통령이 아니면서도 대통령에게 필적하는 영향력을 가졌던 때였습니다. 그건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물려받은 지역적 기반과 권력을 쓰지 않음으로써 권력을 극대화하는 박근혜식 유체이탈 정치술이 결합된 결과였습니다. 대구경북과 유체이탈이라는 박근혜 정치의 두 가지 요소는 아직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여야 대선주자들이 박근혜 변수에 기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건 박근혜 씨가 국정농단사태에 관해 사과하지 않은 채 사면됐기 때문입니다. 전직 대통령을 4년 9개월 동안 가둬놓는 것도 민주주의의 수치입니다. 4년 9개월이나 수감되고도 사과조차 받지 못하고 용서해줘야 하는 것도 민주주의의 수치입니다. 덕분에 박근혜 씨는 비록 훼손되고 축소됐지만 정치적 기반을 그나마 유지한 채 자유의 몸이 됐습니다. 《그리움은 아무에게나 생기지 않습니다》에선 이렇게 밝혔습니다. “거짓말은 일부 사람을 잠시 속일 수는 있어도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박근혜 씨에게 촛불혁명은 거짓혁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