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쇼크
1화

프롤로그; 위드 코로나 그리고 위드 이주자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코로나19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던 2021년 여름, 한 농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방울토마토를 재배하던 농부는 데리고 있던 이주 노동자가 갑자기 잠적하면서, 수확해야 할 토마토가 비닐하우스에서 썩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코로나 사태 장기화로 인력이 부족해져 이들의 몸값이 높아지자 인력 중개 업체에서 고용허가제를 통해 입국한 외국인들마저 빼간 것이다. 이렇게 야반도주한 이주 노동자들은 불법 체류자가 되는 것을 감안하고서라도 더 높은 임금을 주는 곳으로 떠났다. 심지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농부의 죽음은 판데믹 탓에 급감한 이주 노동자들을 확보하려는 한국 농가와 브로커 간 경쟁이 불러온 비극이다.

한국 정부는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듯, 지난 2021년 4월 국내 체류 이주 노동자 체류 기간을 2021년 말까지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더불어 중장기적 대책으로 백신 접종 추이를 봐 가면서 단계적 일상 회복으로 방역 체계를 전환한다고 발표했다. ‘위드 코로나’ 시대의 도래이다. 코로나는 이처럼 한국 사회에 자신과의 공존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이주 노동자가 한국 사회의 상수가 되어 있음을 잊지 말라고 대신 경고했다. ‘위드 이주자’ 시대의 도래이다.

더 나아가 코로나는 한국 내 이주 노동자의 계층성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한국 정부의 차별성을 드러내 보였다. 지난 2021년 3월, 서울시와 경기도는 지역 내 외국인 노동자를 상대로 코로나 검사 의무화 행정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주한 영국 대사관, 독일 대사관 그리고 유럽 연합(EU) 대표부의 항의를 받고 서울시는 이틀 만에 행정 명령을 철회했다. 반면, 경기도는 도내 34만 8000여 명 이주 노동자를 대상으로 검사를 강행했다. 두 지방 정부 간 이러한 차이는 왜, 어떻게 발생했고 또 가능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어렵지 않게 경기도 이주 노동자 중 영국과 독일을 포함한 EU 국가 출신의 ‘백인 노동자’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선진국과 저개발국 간 국력의 계층성, 백인과 유색인 간 인종의 계층성 그리고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간 노동의 계층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듯하다. 여의도 고층 빌딩 사무실에서 뉴욕 증시 현황을 보고 있을 백인 노동자는 비자 카테고리도 경기도 공장에서 일하는 유색 인종 노동자와 다르다. 이들은 전문 인력 카테고리에 속하지만 경기도 유색 인종 노동자는 단순기능 인력에 속한다. 이들을 향한 호칭도 다르다. 경기도 유색 인종 노동자는 외국인 근로자(foreign worker) 혹은 외국인 노동자라고 불리지만, 서울의 백인 노동자는 자신들이 엑스팻(expatriates)으로 불리길 원한다.

용어의 차이에서 알 수 있듯, 여전히 한국 사회는 외국인으로서 서구의 백인을 선호한다. 사실, 한국 사회의 백인 외국인 페티시즘은 코로나 이전부터 존재하는 현상이다. 이는 미디어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2015년, KBS는 출연자 대부분이 동남아 출신 결혼 이주 여성으로, 그들의 한국 정착 과정을 보여 주던 프로그램 〈러브 인 아시아〉를 폐지했다. 대신 그 자리를 〈이웃집 찰스〉라는 제목을 가진 프로그램으로 대체했다. ‘응우옌’이 이사 가고 ‘차알스’가 옆집에 온 것이다. 하지만 우리 옆집에 찰스가 이사 올 확률은 응우옌이 이사 올 확률보다 훨씬 적다.

2021년 4월 기준, 한국에 체류 혹은 거주 중인 외국인 199만 228명 가운데 조선족을 포함한 중국, 베트남, 태국 출신 이주자들이 전체의 63퍼센트를 차지하는 반면, 미국 출신은 7.3퍼센트에 불과하다. 결혼 이주자만을 보아도 2020년 기준, 총 16만 8594명 중 베트남이 4만 4058명인데 반해 미국은 4312명에 불과하다.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한국의 다문화·다인종화를 좀 더 긍정적으로 그리고 싶은 국영 방송 KBS의 고심이 읽히는 대목이다.

한국 정부의 이런 고심은 2021년 8월 아프간 난민 수용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이번에 입국한 아프간인들은 ‘전화(戰禍) 따위를 피하여 다른 나라나 지방으로 가는 피난민 또는 망명자’를 의미하는 난민의 정의에 일치하는 그룹이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이들을 위해 ‘특별 기여자’라는 호칭을 만듦과 더불어,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출입국관리법 시행령까지 개정하였다. 난민·망명을 포함한 저소득 국가 출신 이민자, 특히 무슬림에 대한 한국 원주민의 수용성(receptiveness)을 의식한 행보다.

이들을 난민으로 규정할 경우 정부는 원주민의 관용에 호소하는 수세적 전략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특별 기여자로 규정하면 우리를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보답이라는 ‘도덕적 책무’ 형식이 되어 원주민을 상대로 선제적이고 공세적 전략을 취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들 수용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파열음을 사전 예방 혹은 최소화하려는 전략적 기대가 그 배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사례들은 2021년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 이주자를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 중 일부이다. 한 농부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을 정도로 이주 노동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한국 농촌의 현실, 단순기능 인력 카테고리에 속하는 비非백인 이주 노동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차별적 대우, 그리고 이민자의 실체를 가능한 한 잘 포장하여 원주민 사회 구성원들이 딴죽 걸지 않기를 기도하는 한국 정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불안한 상태다. 게다가 기어이 이 불편한 상황들이 뭔가 엇박자가 나며 내부적 파열음이 감지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엇박자가 한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이주자를 받아들이는 모든 국가에서 발생하는 세계적 현상이란 점이다. 마찬가지로, 내부적 파열음의 근원은 국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전 세계에 걸쳐 작동하는 글로벌 시스템이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된 사례들을 우리가 사회적 문제의 징후로 인식하고 그 해결을 모색할 경우, 그 과정은 어쩌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세계적 차원의 근본적 변혁’이 될 수도 있다. 다문화 교육을 통해서 이주민·다문화에 대한 국민 수용성을 개선하려는 한국 정부의 현 해결책은 숲 전체를 보지 못한 처사다. 이는 필연적으로 일부 나무에 대한 미봉적 치료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글은 한국 사회의 다문화라는 숲에 대한 조감도적 이해, 그리고 그 이해에 기반하여 파열음의 근본적 해결책을 탐구하고자 한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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