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쇼크
6화

다문화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글로벌 자본주의의 충돌

이민 반대는 인종 차별인가


이민 혹은 다문화를 반대하는 것은 인종 차별(racism)일까? 혹은 최소한 외국인 혐오 (xenophobia)일까? 미디어에서 인종주의자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이 하켄크로이츠(Hakenkreuz[1]) 피켓을 들고 화난 얼굴을 한 신나치(Neo-Nazi) 백인만은 아니다. 한국 다문화 반대 그룹도 그렇다. 물론 그들 주장과 행동에서 감정적 배타성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엄연한 시민 사회의 목소리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이민과 다문화라는, 전세계적으로 불가피하고 비가역적인 현상을 거부하는 듯한 이들은 시대 흐름에 뒤처진 이기적 집단으로 종종 거론된다.

박영범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중앙일보》에 한국은 ‘외국인 근로자 없이 버틸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고 논평했다. 말마따나 이민을 반대하는 것은 나라 경제를 생각하지 않는 철없는 짓으로 보일지 모른다. 뉴질랜드의 경제학자 아서 그라임스(Arthur Grimes)는 “이민을 반대하는 것은 외국인 혐오증이다(Anti-immigration is being xenophobic).”라고 단언한다. 이 둘의 공통점은 소위 경제학자라는 점, 따라서 이민을 생산에 필수 요소인 노동력의 수입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이들에게 이민을 반대하는 것은 경제를 반대하는 것이며, 경제를 반대하는 것은 비도덕적 차원으로까지 승화된다. 경제학자 입에서 외국인 혐오증이란 단어가 나오는 경위는 이런 것이다. 이 대목이 우리가 인종 차별 혹은 외국인 혐오증을 경제 시스템인 자본주의와 연관 지어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21세기에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인종 차별 그리고 그 대척점에 서 있는 반인종 차별 이데올로기는 모두 한 주체가 만든 것이다. 바로 자본주의다. 이는 유명 대륙 철학(continental philosophy)자인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이 잘 지적했다. 과거 제국주의 시절 자본주의는 식민 정책 정당화를 위해 식민지 국가의 주민들을 열등하게 인종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다국적 기업이 국경을 초월하며 이익을 실현하는 현재와 같은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는 이 인종 차별 이데올로기가 오히려 이익 실현에 걸림돌이 된다. 과거의 식민지 주민은 이제 자본가와 동등한 입장에서 노동 매매 계약서에 서명할 계약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들은 자신들의 생산품을 구매해 줄 소중한 고객이기도 하다. 이런 왕 같은 고객을 열등 인종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에 따라 글로벌 자본주의는 다문화 그리고 반인종 차별 이데올로기를 옹호하고 나선다.[2] 이 이데올로기를 통해 이민과 다문화를 반대하는 집단에 인종 차별주의라는 낙인을 찍는다.

현재와 같은 인종화된 개념으로서의 ‘인종(race)’이란 용어는 18세기 말 미국 자본주의가 세계 시스템 속에서 흑인 노예 수입과 그들에 대한 노동 착취를 정당화하고 고착화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3] 신대륙 백인 자본가들은 안정적 착취가 가능한 노동 계급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이 필요에 띠라 흑인을 영구적 노동 계급으로 고착화하기 위한 프로젝트로 흑인의 인종화를 진행했다. 이 인종화 프로젝트에 따라 흑인은 백인 자본가들이 기대하는 면화 따기와 같은 노동에 적합한 인종이 되었다. 이 인종화 과정을 통해 63개의 기본 인종이 탄생했고, 이들 인종에 각각 어울리는 노동이 정해지기까지 했다.[4]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사회적 관계는 이제 우월 인종 백인과 열등 인종 흑인이라는 자연적 관계로 전환되었다. 자본주의가 글로벌화하면서 재편된 노동 계급과 소비 계층을 겨냥해 다문화와 반인종 차별을 내세우지만, 본질적인 자본주의의 속성은 변하지 않았다. 착취적 계급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다른 방편을 모색할 뿐이다.

계급 문제를 에스닉 정체성 문제로 바꿔치기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수면 위로 부상시켜 계급 의식을 감추는 것이다. 유서 깊은 이 ‘분리해서 지배하라(divide and rule)’ 전략은 신자유주의 자본가들에 의해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일례로, 뉴질랜드 저임금 분야 노동자들은 대부분 이민자들인데, 이들은 가뜩이나 노조가 쇠약한데도 서로 다른 에스닉 정체성 탓에 단합된 노동 운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의 저임금 산업 분야 역시 원주민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 간 연대보다는 경쟁 관계 혹은 서로 경계하는 양상이 보편화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에스니시티 혹은 인종으로 노동 계급이 구성되어 있다면 이들의 노동 조건 향상을 위한 투쟁은 계급 전선으로만 좁혀질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나와 같은 인종·민족이 차별 혹은 불공평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다른 사회 구성원의 지지를 얻는 데도 유리할 것이다.

하지만 자기와 다른 인종·에스닉 그룹이 특정 계급 혹은 직종·업종에 집중되어 있을 경우, 원주민 사회 구성원들에게 이들에 대한 차별은 많은 경우 계급 차별(classism)이 아닌 인종 차별로 비친다. 자본주의 정치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liberalism)에 기반을 둔 인권 단체 등은 이 인종 차별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지만 본질적 계급 차별은 외면한다. 한국 원주민 사회 구성원도 이주 노동자의 노동 조건을 향상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나와 다른 ‘그 인종’의 목소리이기에 한 다리 건너의 문제로 여길 수 있다. 이주 노동자에 대한 인종 차별은 많은 경우, 본질에 있어 계급 차별이다. 21세기 부르주아는 이 이질적 인종의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에 감사하고 있을 것이다.

계급 문제를 인종 문제로 치환, 왜곡하는 것은 다문화주의라는 이름을 가진 새로운 인종 차별 형식의 등장으로 강화된다.[5] 후기 자본주의의 변화된 이익 창출 방식과 보편적 의미의 리버럴리즘이 가하는 압력으로 자본주의는 과거와 같은 노골적 인종 차별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이주 노동자를 이주 국가의 노동 계급 최하부에 위치시켜 착취하려 한다. 반면 보편적 리버럴리즘은 내국인과 같은 보편적 인권의 부여를 요구한다. 이에 글로벌 자본주의는 다문화주의라는 카드를 꺼냈다. 인종을 수직적 계급 구조에 끼워 넣는 대신, 수평적 문화 다양성에 끼워 넣는 작업이다. 그러나 인종 차별은 문화적 차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뿐 사실상 그 본질은 변함이 없다. 탈식민주의 철학의 대가이자 위대한 지성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의 책 제목 《검은 피부 하얀 가면》처럼 인종 차별이란 실체에 문화 차이라는 가면을 씌웠다. 다문화주의의 이 인종적 실체와 문화적 가면의 모순은 오늘날 이민과 다문화를 반대하는 서구 수용 국가 사회 구성원의 민족주의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같은 이민 반대, 다른 민족주의


서구 민족주의 전통은 간략히 두 갈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에스니시티에 기반을 둔 폐쇄적 혈연 민족주의(ethno-nationalism), 다른 하나는 자유, 평등과 같은 리버럴 가치 공유에 기반을 둔 포용적 시민 민족주의(civic nationalism)다. 시민 민족주의는 혈연이나 인종이 아닌 사회 문화적 핵심 가치의 공유로 국민적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특징이 있다. 다인종 국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참고로 한국 사회는 혈연 민족주의 카테고리에 큰 이의 없이 속할 것이다.[6]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혈연 민족주의는 자본주의 경기 부침과 맞물려 세계 무대 전면으로 등장과 후퇴를 반복하고 있다. 신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쟁탈을 놓고 벌인 제1차 세계 대전은 각 민족 국가의 애국심 고취를 위해 혈연 민족주의를 자극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본격적 산업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하며 노동력 부족을 겪던 서구는 이전의 식민지 주민을 포함해 이질적 인종의 외국인 노동자를 수용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인종 차별적인 혈연 민족주의는 장애물로 작용해 뒤편으로 밀려났다. 자본주의 황금기인 1950~1973년 즈음엔 서구 사회 구성원은 자기 배가 부르고 등이 따습기에 이주 노동자에 대해 “응, 그래. 너도 먹고살아야지”라는 식으로 너그러워진다. 산업 자본주의 종료와 더불어 자본주의 황금기가 끝나자, 이들 이주 노동자는 짐이 된다. 설상가상으로 세계화 덕분에 국경을 넘어오는 이주 노동자가 증가하자 혈연 민족주의는 다시 발흥하게 된다.[7]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자신의 사회·경제적 공간을 이민자가 점유해오자 시민 민족주의도 혈연 민족주의와 같이 이 침투에 저항한다. 두 진영 모두 이민자 유입의 배후에 글로벌 자본주의가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저항 표출 방식은 다르다. 혈연 민족주의는 이민자가 에스닉 동질성(ethnic homogeneity)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이주 노동자를 직접적 희생양으로 삼는다. 반면, 국제주의와 반제국주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시민 민족주의는 민족 국가 내 경제적 불평등과 빈곤을 악화시키는 자본주의의 세계화를 정조준한다. 따라서 이민자를 향한 인종 차별은 혈연 민족주의에서만 발견된다. 이처럼 글로벌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두 민족주의는 각기 다른 동기와 저항 형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들 간 차이는 많은 경우 모호하다. EU 소속 국가들의 유권자 투표 행태를 분석한 이주 연구가 제임스 데니슨과 앤드류 게디스(James Dennison and Andrew Geddes)의 연구[8]는 이 경계의 모호성을 보여 준다.

이 연구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EU 국가 내 반이민을 내세운 정당들에 대한 지지율이 상승했지만, 이것이 곧 EU 유권자들의 반이민 정서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EU 집행부는 대중에 영합하는 반이민 정당의 약진이 이민에 대한 부정적 정서 탓이며, 이는 인종 차별과 외국인 혐오로 이어진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EU 국가의 유권자들이 반이민 정당에 투표한 이유는 그들이 인종주의자여서도, 외국인 혐오주의자여서도, 심지어 이민을 반대해서도 아니라고 연구 결과는 밝힌다. 이들 유권자는 단지 이민이 중요한(salient) 이슈라고 생각하기에 이를 어젠다로 내세운 정당에 투표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4년과 2018년 사이에 출신과 관계없이 모든 EU 국가의 이민자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이 모순되어 보이는 조사 결과는 이민 수용 국가 사회 구성원의 이민 관련 민족주의 정서에 관해 혈연 민족주의 혹은 시민 민족주의로 이분법적 접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원주민들이 이민자들에 대해 사회적 요소를 고려해 균형 잡힌 시각을 가졌음에도 이민을 반대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이분법적 적용의 한계는 2016년 영국 브렉시트(Brexit) 국민 투표에서도 발견된다.[9]

예상과 달리 찬성표가 과반을 차지한 브렉시트 국민 투표 결과의 주역은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노동 계급이었다. 반대 측은 이들 노동 계급이 브렉시트의 부정적 파급 효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인종 차별과 외국인 혐오증에 기반을 두어 투표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40여 년에 걸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국가가 자신들에게 사회 안전망과 삶의 조건 향상을 제공해 주지 못한 것을 확인한 노동 계급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신자유주의는 케인스주의[10] 정책의 자본 수익률 저하 위기를 2000년까지는 잘 극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때 발생한 수익 대부분이 부동산과 금융 분야에 집중되면서 제조업 수익률은 오히려 역대 최저로 떨어졌다.[11] 당연히 제조업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은 더욱 열악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이민자들 때문에 자신이 받을 피해, 가령 취업 경쟁, 공중 서비스 및 주택 시장의 접근 어려움 가중 등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자구책을 선택한 그들에게 인종주의자 혹은 혈연 민족주의자라는 굴레가 씌워진 것이다.

시민 민족주의와 혈연 민족주의 간 구분의 어려움은 다문화주의가 개입되면서 가중된다. 다문화 연구로 널리 알려진 윌 킴리카(Will Kymlicka)가 핵심을 찌른다.[12] 그는 “사람들은 에스닉 혹은 인종적 다양성을 싫어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인종주의자 혹은 외국인 혐오자로 비치길 싫어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민으로 야기된 다문화주의를 반대하기 위해 보다 ‘수용 가능한(acceptable)’ 이유를 찾으려 한다”고 말한다. 그 수용 가능한 이유는 비자유주의적(illiberal) 행동 혹은 범죄 등 안전 위협, 경제적 부담, 난민 신청 남용 등이다.

호주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캐나다와 더불어 1970년대부터 다문화주의를 국책으로 도입한 호주는 이론적으로 백인 원주민과 다른 에스닉 이민자 그룹의 평화로운 공존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무슬림 이민자 그룹을 배척하려는 움직임이 끊이지 않는다. 이 경우 배척 사유는 무슬림이 호주 자유 민주주의 가치와 법을 공유 혹은 존중하지 않는다는 시민 민족주의 언어를 빌린다.[13]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호주 시민 사회의 가치는 백인 원주민의 문화이며 이 문화는 ‘인종화된 문화’이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와 배타적 혈연 민족주의로 귀결된다. 시민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다문화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제는 혈연 민족주의와 다문화주의의 어색한 공존과 긴장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혈연 민족주의와 시민 민족주의는 구분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고, 어떤 형식으로든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릴 것이다. 민족주의는 왜 이토록 집요하게 우리 곁에 머무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대부분 민족 국가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 국가가 존재하는 한 ‘우리’와 ‘타자’를 구분 짓는 경계는 있을 수밖에 없다.[14] 인종 차별, 외국인 혐오, 혈연 민족주의 등은 이민자라는 이름의 타자로부터 민족 국가 안에 사는 우리를 지키기 위한 공격적 방어 기제들이다. 이 타자를 우리의 사회적 공간으로 자꾸 들이미는 것은 글로벌 자본주의이다. 지금 이 순간도 이민을 둘러싸고 세계 곳곳에서 글로벌 자본주의의 전방위적 공성과 민족 국가 사회 구성원의 수성을 위한 저항이 진행 중이다. 이어지는 글은 이 글로벌 자본주의와 민족 국가 간 역학 관계에 대한 전 세계적 차원의 조감도다.

 

글로벌 자본주의와 민족 국가의 충돌


글로벌 자본주의와 민족 국가의 역할에 대한 정치 경제학적 이해는 한국 사회의 이민 현상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한국 학계는 많은 경우 ‘어떻게 새로운 타자와 공존할 것인가?’라는 국가가 짜 놓은 틀 안의 어젠다에 집중한다. 지젝에 의하면 이는 정확히 글로벌 자본주의가 의도한 바이다.[15] 그는 “모든 사람이 자본주의가 우리 옆에 머물고 있음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인다. 비판의 에너지는, 자본주의 세계 시스템의 단일성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 채, 대신 문화적 다양성을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라고 역설한다.

우리가 이민과 다문화에 대한 정치 경제학적 이해를 도모하는 것은 이민과 다문화로 인한 사회적 파열음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그에 기초한 근본적 해결책을 찾기 위함이다. 한국 정부와 주류 학계의 처방이 근본적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민과 다문화에 대한 미시적 접근과 이해에 근거한 일시적 처방 혹은 특정 계층의 이익을 반영한 정책과 제안들이기 때문이다. 현재 이주 노동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이민과 다문화 현상은 전 세계적 차원에서 관철되는 자본주의식 이익 실현 논리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한다. 윌리엄 로빈슨과 쉬안 산투스(William Robinson and Xuan Santos[16])가 이를 잘 요약해 준다.



과거 제국주의 시절부터 자본주의 세계 시스템 구축의 핵심은 ‘노동 시장의 세계화’였다. 지난 500여 년간 자본주의는 이 노동 시장의 세계화를 폭력적이고 잔인한 방식으로 구현했다. 2000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 흑인을 강제 이주시켜 신대륙 자본주의의 노동력으로 활용한 것이 대표적이다. 2019년 기준, 전 세계 노동자의 4.9퍼센트에 해당하는 1억 6900만 명이 이주 노동자로 알려져 있다. 현재의 글로벌 자본주의는 세계적 차원에서의 원활한 노동력 공급을 위해 각 국가 노동자에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이동성(mobility)을 부여했다. 하지만 노동에 부여된 이 이동성은 자본에 부여된 이동성과는 본질에서 차이가 있다. 자본은 자신이 원하는 국가로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지만, 노동은 자신을 원하는 자본의 부름이 있을 때만 그 국가로 이동할 수 있다. 자본은 자신의 이동 과정에선 국가를 개의치 않지만, 자신을 위한 노동의 국제적 이동을 위해서는 국가의 이민 통제 기능을 적절하게 활용한다.

이처럼 국가의 도움으로 자본은 필요할 때 언제든지 불러 쓸 수 있는 ‘이주 노동자 예비군(reserve army of migrant workers)’을 세계 도처에 갖게 된다. 국제노동기구(ILO)의 리포트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전 세계 실업자는 약 2억 명 그리고 불안정 고용 상태에 있는 노동자가 14억 명이다. 자본은 저임금 노동력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 필요하면 이들 예비군을 수시로 동원할 수 있다. 여기에 한국 자본은 국내 예비군도 가지고 있다. 불법 체류자라는 이름의 40만에 가까운 대군이다. 언제든지 손쉽게 사용하고 버릴 수 있는 초착취(super-exploitation) 대상인 이 그룹은 존재만으로도 기존 노동자의 임금 억제 효과를 가져다주는 효자이다. 불법 체류자에 대해 국가가 강력한 추방 정책을 펼치지 못하는 것에는 이 초착취를 즐기는 자본가의 입김이 작용하는 탓도 있다. 이처럼 21세기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가들의 착취 대상은 원주민 노동자보다 더 쉽고 더 많이 착취가 가능한 이주 노동자로 그 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자본가의 요청으로 이주 노동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국가는 두 가지 기술적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하나는 자본가를 위해 자국 내 노동 시장에 저임금 이주 노동자를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원주민을 위해 이들이 선을 넘지 않도록 밀착 관리함과 동시에 언제든지 제거할 수 있는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국가는 ‘분리해서 지배하라’ 전략을 또다시 활용한다. 이 전략은 이주 노동자에 대한 인종화 형식으로 진행된다. 먼저 국가는 노동 계급을 원주민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로 분리한다. 그리고 이주 노동자를 인종화 시킴으로써 전통적 단일 노동 계급을 쪼개어 이주 노동자라는 새로운 노동 계급을 탄생시킨다. 이 새로운 계급은 ‘인종화된 이주 노동자 노동 계급’으로 원주민 노동자 노동 계급의 하위 계급으로 자리매김한다.[17]

노동 계급 내 이 새로운 카스트 제도는 자본가와 국가에 여러모로 이득을 가져다준다. 자본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경제적 생산에 노동자를 동원하지만 동원된 이주 노동자의 사회적 재생산에 이전 원주민 노동자에게 했던 것과 같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가령 아파서 일할 수 없는 상태와 같이 사회적 재생산에 실패한 이주 노동자와는 계약 관계를 종료하고 건강한 새 이주 노동자를 고용하면 된다. 고장 난 부품은 수리할 필요 없이 새 부품으로 갈아 끼우면 되는 것이다. 국가도 원주민 노동자에게 시행했던 사회적 임금 형태의 부의 재분배를 이들 이주 노동자에게는 시행하지 않아도 된다. 이처럼 이주 노동자를 인종화된 이주 노동자 계급에 고착시키는 형식으로 국가는 저임금 노동자의 안정적 공급과 밀착 관리라는 두 과제를 수행한다.

이주 노동자에 대한 정부와 자본가의 이런 접근은 노동의 상품화를 넘어 ‘인간의 상품화(commodification of human beings)’로 이어진다. 원주민 노동자는 근무 시간 동안 자본가에게 상품으로서의 노동을 팔지만, 근무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순간 노동 상품을 파는 경제적 생산 활동을 멈추고 사회적 재생산 과정에 자유롭게 참여하며 인간임을 느끼고 삶을 즐기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주 노동자는 자신의 근무가 끝나도 이 상품화 상태를 종료시키지 못한 채, 여전히 상품으로 존재한다. 이들에 대한 제도적 배척, 사회의 비우호적 시선, 인종 차별, 외국인 혐오로 근무 이후에도 인간으로서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정상적 휴식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원자재처럼 밤새 불 꺼진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다음날 생산 라인에 다시 투입되는 사이클이 반복된다.

이주 노동자 수입을 둘러싼 민족 국가 역할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해석을 내놓았지만 국가가 자본의 사냥개 역할에만 충실하다는 결론으로 직행하는 것은 위험하다. 한국은 리버럴 정부를 가진 자본주의 민족 국가이다. 이 정의에는 세 가지 큰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리버럴리즘, 자본주의 그리고 민족 국가. 자본주의를 국가 기본 경제 시스템으로 인정하여, 자본가의 이익 실현이 원활하게 구현될 수 있는 사회적 환경 조성과 사회 구성원 관리에 초점을 맞춘 정책을 시행하는 한국 정부는 리버럴리즘과 자본주의를 동시에 구현해야 하는 처지다.

전자는 정치 이데올로기로, 후자는 경제 시스템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사실 이 둘은 개인주의라는 같은 아버지를 가진 이복형제이자 서구 근대화의 두 주역이기도 하다. 이주 노동자를 둘러싸고 정치적으로나마 수평적 평등을 추구하는 리버럴리즘은 수직적 계급 질서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와 지속해서 부딪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원주민의 혈연 민족주의 성향은 정부가 추가로 신경 써야 하는 대상이다. 한국 원주민의 강한 민족주의는 때론 이민자 유입을 둘러싸고 리버럴리즘의 기대와 자본주의 압력을 압도하기도 한다. 이처럼 자본주의 민족 국가인 한국의 리버럴 정부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압력, 명분상 외면할 수 없는 리버럴의 목소리 그리고 유권자 원주민의 볼멘소리 사이에서 줄타기와 같은 이민·이민자 정책을 펼쳐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렇다면 이 샌드위치 신세의 한국 정부는 이민 및 다문화와 관련하여 어떤 모습의 미래를 그리고 있을까? 언제까지 40만 명에 가까운 불법 체류자를 끌어안은 상태에서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누더기식 혹은 원주민 눈치보기식 처방으로 버틸 수 있을까? 또 한국 원주민은 이민과 관련하여 한국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길 원할까? 어쩌면 가장 노골적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이 지금일지 모른다. “한국은 다문화 국가가 될까?”

 

한국은 다문화 국가가 될까


미국 정치학자 티머시 림(Timothy Lim)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한국은 다문화 국가가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18] 그의 이런 확신은 1970년대 이후 서독 내 이주 노동자의 이주 정착 과정(migration process)을 한국이 답습하고 있다는 관찰에 기반을 둔다. 이주 노동자의 최초 이주 동기는 경제적 요인이었지만, 이후 여러 이유로 애초 계획보다 더 오래 이주 국가에 체류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변화는 임시 체류자들이 영구 정착하기 직전에 목격되는 현상을 야기한다. 그들만의 집단 거주지(ethnic enclaves), 그들만의 식품점(ethnic groceries) 그리고 그들을 겨냥한 각종 편의 시설의 등장이다. 한국에서도 같은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서울 대림2동과 안산시 원곡동은 이주자들의 집단 거주지와 더불어 그들만의 집단 상권(ethnic precincts)이 형성된 대표적 장소이다. 한국의 주류 비즈니스도 이주자들을 둘러싸고 형성된 이 이민 산업(immigration industry)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주자들의 본국 송금 시장을 선점하려는 은행들이다.

일단 이런 이주 정착 과정이 시작되면 체류 기간이 다 된 이주자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려는 이주국 정부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서독이 1955년부터 1973년까지 시행한 게스트 워커(guest worker) 프로그램을 종료하면서 이주 노동자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려 시도했을 때 겪은 일이다. 같은 현상이 현재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비자 체류 기간을 넘겨 불법으로 체류하는 이주자들에 대한 국가의 추방 시도는 왜 실패할까? 그 이유 중 하나는 만인의 평등 인권을 옹호하는 리버럴리즘의 민주적 규범과 절차이다. 국가는 실정법에 따라 불법 체류자를 추방할 명분과 권력을 가졌으나, 그 실행은 법원 판결로 종종 제한받는다. 법원은 단순히 국내 실정법만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사회적 권리와 인권 그리고 관련 국제 규약도 참조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크리스찬 조프케(Christian Joppke)의 표현을 빌리자면, 국가는 ‘자기 제한적 통치권(self-limited sovereignty)’만 행사할 수 있다.[19] 더불어 이주 노동자, 친이주자 시민 단체 그리고 인권 활동가들의 공동 저항도 정부로서는 정치적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주 정착 과정이 개시되지 않도록 사전 예방 조치를 하면 이들의 정주를 막을 수 있을까?

정부에 유감스럽게도 이주 노동자의 정주를 막지 못하는 보다 근본적 이유는 리버럴리즘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때문이다. 서독 정부가 체류 기간이 만료된 이주 노동자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려 시도했을 때 가장 크게 반발한 집단은 이들을 고용했던 자본가 혹은 고용주들이었다. 고용주들의 저항에 부딪힌 서독 정부는 결국 불법 체류자 송환 계획을 포기하기에 이른다.[20] 고용주들이 극력으로 반대한 이유는 첫째, 훈련해서 쓸만하니까 이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신입 노동자를 다시 받아들여 훈련해야 하는 비용과 신규 채용에 따른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둘째, 외국인 노동자가 일하는 곳이 대부분 저임금 3D 업종과 같은 특정 업종에 집중된 까닭에 서독 원주민 노동자는 이 업종을 꺼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업종은 계속 구인난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21]

서독 게스트 워커 프로그램을 타산지석 삼아 단순기능 인력 이주 노동자의 정주화를 예방하기 위해 순환 원칙을 도입하고 실행한 한국 정부이지만, 역시 실패를 눈앞에 두고 있다. 저생산성 산업 분야는 저임금 노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었다. 결국, 이주 노동자에 의지하게 된다. 이런 직종·업종은 인종화가 이루어지면서 저임금, 3D 노동 조건으로 한국 원주민 노동자가 외면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단순기능 인력 이주 노동자의 순환 원칙은 무너진 지 오래다.[22]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저생산성 분야의 저임금 구조에 대해서 자본주의 국가 한국의 리버럴 정권은 구조적 개혁을 시도할 계획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 즉, 이주 노동자의 지속적 공급을 통해 저생산성 섹터의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는 정책을 앞으로도 고수할 것이다.[23] 따라서 ‘구조적’으로 이주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한국 자본주의 사회가 이주 노동자의 정주를 ‘구조적’으로 막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단순기능 인력 이주 노동자의 정주화 가능성은 다른 측면에서도 높아지고 있다. 전문 인력만 영주권을 받을 자격이 있고 단순기능 인력 이주 노동자에게는 영주권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전통적 인식과 프레임이 무너지고 있음이 감지된다. 대표적인 직종이 요양원 노인 돌봄 서비스이다. 캐나다 라이어슨대학(Ryerson University)의 연구가 말해 주듯, 영주권 부여의 기준이 이제는 신청자의 지식이나 기술에서 직종·업종의 사회적 필요성으로 옮겨가고 있다. 원주민 노동자가 관심을 두지 않는 상황에서, 단순기능직이라는 이유로 사회 필수 직종·업종을 언제까지 순환형 이주 노동자로 채울 수 없다는 사회적 동의가 이루어지는 듯하다. 필수 단순기능 직종·업종을 구조적으로 이주 노동자에게 의존하는 한국은 시간문제일 뿐, 이들에게 정주의 길을 열어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정주를 허락받은 이주 노동자들은 한국에 가정을 꾸릴 가능성이 높다.

이주 노동자들과 이들 가족의 한국 사회 정주가 시작되면 지금과는 다른 양상이 전개될 것이다. 지금까지 결혼 이주자의 한국 사회 수용은 이들의 한국인 배우자 덕분에 당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한편 이주 노동자는 경제적 필요성이 인정되지만, 이들 직종과 계급의 인종화를 통해 같은 한국 사회에서도 선을 넘어오지 않도록 감시되고 관리 당했다. 하지만 이주 노동자 출신 영주권자와 그 가족들은 이제 이주 노동자로서도, 배우자로서도 아닌 ‘인간’으로서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다. 이주 노동자가 비닐하우스 농장에서의 근무를 통해 영주권을 받았으니까 그 이후에도 같은 직종에서 일할 것을 기대할 수도, 강요할 수도 없다.

한국이 다문화 국가가 되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면, 한국 원주민은 새로운 사회 구성원을 자신과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할 자세가 되어 있는지를 스스로 물어볼 때다. 조선족 이모는 더는 음식점 홀서빙만 하지 않을 것이며, 〈오징어 게임〉의 알리도 더는 선반에 손가락이 잘릴 위험을 안고 3D 업종에서 일하지 않을 것이다. 원주민은 조선족 여사장님이 운영하는 식당 주방에서 일하는 것도, 알리가 운영하는 중고차 수출 회사에서 세차하는 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조선 시대에 데리고 있던 머슴이 갑자기 출세하여 돌아온 것처럼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문제가 된다.

한편, 이주 노동자는 영주권을 통해 인종화된 계급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원주민의 인식 변화가 없다면 이주 노동자 출신 ‘2등 시민’이라는 인종화로부터는 해방될 수 없다. 이것이 터키 이민자들이 현재 독일에서 경험하는 현실이다. 터키 이주 노동자 출신들은 1세대는 물론 외질 같은 3세대도 비공식적 인종화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다른 업종과 직종을 선택할 자유와 권리가 있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저임금 3D 업종에 머물고 있다. 독일 원주민 사회의 보이지 않는 ‘밀어내기’는 분명히 작동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알리의 자녀가 계급의 사다리를 오르려 할 때, 누군가 “감히, 너 따위가?”를 외치며 그 사다리 윗부분을 자르려 할 것이다.

누군가 저임금 노동을 안정적으로 제공해 주기를 바라는 자본주의 국가 한국은 이주 노동자와 그 후손들이 이 인종화된 노동 계급에 계속 남아 주길 원할 것이다. 이런 바람은 원주민과 같은 사회적 권리를 만끽하며 살고 싶어하는 이주자와 그 후손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럴 경우 사회적 긴장은 높아지고 외국에서나 보았던 폭력적 인종 갈등이 한국에서도 재현될 수 있다. 너무 디스토피아적인가?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는 이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리버럴 정부와 학계가 주장하는 다문화 교육 같은 것으로 막을 수는 없다.

누차 강조했지만, 이주 노동자에 대한 인종화는 인종과 입을 맞춘 자본주의의 구조적 결과물이다. 계급 간 불평등 구조에 인종을 삽입한 모양새다. 계급 간 불평등이 없어진다면 혹은 유의미하게 줄어든다면 사회 구성원의 인식은 자연스럽게 변한다. 새로운 이민자가 들어와도 여전히 내 배가 부르고 등이 따습다면 친절한 원주민으로 남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빈부 격차 없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다문화 국가 한국을 맞이하는 기본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은 구조적 문제다


이민을 경제적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의 수입으로 이해하는 자본가와 리버럴 경제학자들에 의해 이민·다문화를 반대하는 그룹은 종종 인종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힌다. 그러나 인종 차별은 반인종 차별 혹은 다문화주의와 더불어 자본주의 노동력 착취의 역사적 방식에 따라 수단처럼 동원된 이데올로기이다. 21세기, 세계 곳곳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착취하고 싶은 글로벌 자본가는 다문화주의와 반인종 차별 이데올로기를 앞세운다. 동시에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계급 관계의 본질을 호도하고 노동 계급을 분리하여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에스니시티를 중심으로 한 정체성 정치를 내세운다. 이 에스닉 정체성 정치는 다문화주의로 이어져 실체에서 위계적 인종 차별을 수평적 문화 차이로 포장한다. 이 인종 차별과 문화 차이는 많은 경우 혼재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민을 반대하는 민족주의 운동에서도 이 인종 차별과 문화 차이 간 모호성이 발견된다. 앞에서 살펴봤듯 이민자 유입에 대해 혈연 민족주의와 시민 민족주의의 태도는 다른 듯 비슷하다. 유럽의 사례는 오히려 글로벌 자본주의로부터 국가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구책의 성격에 가까웠다. 다문화주의가 국책인 호주 사회의 무슬림 이민자 배척은 리버럴 가치의 공유라는 시민 민족주의 언어를 빌리지만, 백인 문화의 수용이라는 배타적 혈연 민족주의 실체를 가지고 있었다. 이민에 관한 한 민족주의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민을 야기하는 것은 국경을 초월하는 글로벌 자본주의인 데 반해, 우리는 대부분 민족 국가라는 경계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세계 시스템 구축에서 핵심으로 여기는 기능은 노동 시장의 세계화다. 이 노동 시장의 세계화로 자본가의 착취 대상 중심이 원주민 노동자로부터 이주 노동자로 옮겨가고 있다. 이주 노동자를 수입한 국가는 자본가를 위한 안정적 노동력 제공과 원주민 불안감 완화를 위해 이들을 인종화해서 고립시킨다는 점을 앞에서 짚었다. 이주 노동자는 인종화된 노동 계급이 되어 원주민 노동자 계급의 하위에 자리매김하며, 노동 시간 외 사회적 재생산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총체적 인간 상품화 경험을 하게 된다. 국가는 자본가의 압력, 보편적 리버럴리즘, 그리고 유권자 원주민의 목소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가까스로 이민·이민자 정책을 펼치게 된다.

정부가 아무리 줄타기를 잘해도 한국은 과거 서독의 사례처럼 결국 다문화 국가가 될 것이다. 결국 근본적 이유는 자본주의, 즉 이들 이주 노동자에게 구조적으로 의존하는 저생산성 분야 고용주들 때문이다. 게다가 사회 필수 직종의 이주 노동자에게는 영주권을 부여하자는 움직임이 세계적으로 감지되며 이들의 정주화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들을 대상으로 제2의 인종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려면 원주민의 인식 변화는 필수다. 이를 위해 문제의 근원인 계급 간 빈부 격차를 줄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노력은 한국에만 국한되어서는 의미 있는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1]
하켄크로이츠는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사용했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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