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쇼크
7화

에필로그; 평등한 다문화 세계를 향하여

전환기의 한국 사회


2021년, 한국 인구의 5퍼센트는 전통적 의미의 한국인이 아닌 이민 배경을 가진 이질적 에스닉 그룹이다. 이 중 한국 정부의 주목을 받는 그룹은 결혼 이주자와 단순기능 인력 이주 노동자다. 전자는 농어촌과 도시 빈민의 경제적 생산을 뒷받침할 사회적 재생산 수단으로, 후자는 저생산성 분야에서 저임금으로 고용 가능한 경제적 생산 주체로 각각 한국 사회에 등장했다. 국가 프로젝트로 유입된 두 그룹이지만 이들에 대한 한국 정부의 정책은 다르다. 결혼 이주자 그룹은 항구적 사회적 재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만큼 정주를 위한 이민자 정책이 적용된다. 이주 노동자 그룹은 일시적인 경제적 재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만큼 정주를 막기 위한 이민 정책이 적용된다. 이런 한국 정부의 이민자 정책과 이민 정책은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다문화주의를 표방하며 결혼 이주자를 대상으로 시행하는 한국 정부의 이민자 정책은 다문화 사회 정책이 아니라 다문화 가족 정책이다. 결혼 이주자는 독립적 주체로서 한국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 사회적 재생산 수단이란 종속적 주체로서 한국 가족에 참여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이들에게 한국 사회 동화를 주문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타자화 형식으로 이들을 밀어내게 만든다. 단순기능 인력 이주 노동자는 체류의 한시성이 강조되면서 아예 한국 사회 구성원에서 배제된다. 그러나 이들을 구조적으로 또 항구적으로 필요로 하는 한국 자본주의 특성상 이들 체류의 한시성은 무너진 지 오래다. 이들은 이미 한국 사회의 실질적 구성원이다. 한국 정부가 40만 명에 육박하는 불법 체류자를 제거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것도 이들에게 저임금 노동력을 구조적으로 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저생산 분야 고용주들의 압력 때문이다. 이 경제적 필요성을 바탕으로 이주 노동자의 수입과 그에 따른 한국 사회 다에스닉화는 불가피하고 비가역적이라는 주류 담론이 한국 사회에 형성된다.

이 주류 담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시민 그룹이 있다. 소위 다문화 반대 그룹이다. 이들은 결혼 이주자와 이주 노동자의 도입 배경과 부정적 여파에 대해 다각적으로 지적한다. 도입 결정에 대한 국민적 동의 부재, 원주민 노동자의 일자리 위협, 이주자의 높은 범죄율, 본국 송금으로 인해 저조한 국내 경제 기여도, 양산된 국제 중매결혼의 폐해와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 등이다. 이들 주장은 많은 경우 타당성이 입증된다. 이들은 또 정부와 주류 학계가 이주 노동자 수입의 명분으로 꼽는 원주민의 3D 업종 기피, 저출산율 그리고 고령화에 대해서도 근본적 검토를 요구한다. 다시 말해 원주민 노동자의 3D 업종 기피 현상의 본질은 저임금에 대한 기피라는 점, 저출산의 근본적 원인은 한국 자본주의의 직·업종 간 극심한 임금 격차라는 점, 고령 인구는 여전히 생산 가능 인구로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한편으론 다문화 반대 목소리를 내는 이 시민 그룹은 인종주의자라고 비난받기도 한다.

사실상 인종 차별은 자본주의 노동력 착취의 역사적 방식에 따라 동원된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반대 이데올로기인 반인종 차별도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는 필요할 때마다 인종 카드를 꺼내어 계급 간 문제를 인종 간 문제로 변질 및 왜곡시켜 왔다. 허울 좋은 수평적 문화 차이는 대개 수직적 인종 차별을 포장하려는 자본가의 정체성 정치로 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민에 반대하는 두 민족주의 운동에서도 이 혼동은 발견된다. 진짜 문제는 글로벌 자본주의에 있다. 인종, 문화, 계급을 적절하게 조율하는 자본주의의 궁극적 목적이 저임금 노동력의 안정적 착취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글로벌 자본주의는 노동 시장 세계화를 통해 이주 노동자를 수용 국가의 노동 계급 최하부에서 고정하려 한다. 이러한 시도로 이주 노동자는 인종화된 새로운 노동 계급으로 원주민 노동 계급 아래에 놓인다.

신자유주의, 글로벌 자본주의의 노동 시장 세계화 프로젝트로 현재 한국은 다문화 국가로 그리고 다에스닉 사회로 변모하는 과정에 있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국가에 떠넘긴다. 신자유주의 한국 정부는 다시 이 비용과 고통을 원주민에게 떠넘길 것이다. 이익의 사유화와 고통의 사회화는 신자유주의의 트레이드마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이 다문화 국가로 그리고 다에스닉 사회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원주민의 고통은 불가피하다. 독일 원주민의 터키 이주자에 대한 부정적 태도에서 볼 수 있듯, 이 고통에 대해 한국 원주민들은 이주 노동자를 향한 반감 표출로 저항할 것이다. 브렉시트 찬성으로 이민자 유입에 저항한 잉글랜드와 웨일스 노동 계급처럼, 이주자와 제한된 자원을 놓고 경쟁해야 하는 한국 저임금 노동 계급의 반발은 특히 심할 것이다.

이처럼 이민과 다에스닉화를 둘러싸고 사회적 긴장과 갈등이 예상되는 가운데, 한국 원주민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나 한 걸까?

 

축복받을 다문화 세계를 향하여


이민을 둘러싼 수용국의 사회적 긴장과 갈등의 발단은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이다. 노동자의 국제적 이동이 발생하는 것은 국가 간 임금의 현격한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를 없애거나 유의미하게 줄이는 것이 이동을 막는 궁극적 방법이다. 국가 간 임금 격차를 어떻게 하면 해소할 수 있을까? 임금 수위의 보이지 않는 벽으로 작용하는 것은 민족 국가라는 둑이다. 이 둑 갑문을 허물면 세계 각국은 똑같은 임금 수위를 기록하지 않을까? 글로벌 자본주의의 노동 시장 세계화를 통해 이 갑문은 부분적으로 열려 있다. 이들 갑문의 문고리는 국가가 쥐고 있다.

이것이 완전히 열리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국가가 유권자인 사회 구성원도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갑문을 완전히 개방하면 저임금 원주민 노동자가 전멸하는 아수라장이 될 것을 국가는 알고 있다. 또 다른 이유는 글로벌 자본주의도 저임금 노동력의 지속적 착취를 위해 모든 민족 국가가 일시에 갑문을 완전 개방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시간을 가지며 저개발국 노동자를 시간차 공격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와 같이 글로벌 자본주의와 민족 국가가 병립하는 한, 국가 간 임금 격차가 가까운 시일 내 해소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수용국 내 이주자와 원주민 사이 사회적 긴장과 갈등은 본질적으로 계급 문제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주 노동자는 수용 국가의 새로운 사회 구성원이 되지만, 이들과 원주민 사이 긴장과 갈등은 존속한다. 이들이 계급 사다리의 맨 아래에 위치한 인종화된 새로운 노동 계급에서 더 올라오지 않기를 바라는 수용국 정부, 자본가 그리고 원주민은 공동 전선을 형성한다. 그간 원주민 전용이었던 자원이나 고급 직장을 넘보지 말라는 원주민 사회의 전방위적 경고에 대해 보편적 리버럴리즘을 전면에 내세운 이주자들은 저항한다.

이 긴장과 갈등의 궁극적 해결 방안은 이주자들이 이 계급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 아니다. 상향 이동성(upward mobility)이란 이름으로 미화되기도 하지만, 계급 사다리를 통한 사회 경제적 지위 상승 시도는 결국 주변 누군가를 딛고 올라서거나 사다리 위 누군가를 끌어내 갑이 되려는 을의 시도다. 따라서 궁극적 대책은 계급 간 임금 격차의 해소, 더 나아가 계급 자체의 소멸이다. 상위 계급과 하위 계급 간 빈부 격차가 사라지면 더 높은 사다리에 올라가기 위한 사회 구성원 간 경쟁도 사라진다. 경쟁할 필요가 없으면 이주자도 원주민의 경계 대상 목록에서 빠지며 인종 차별도 없어진다. 어느 직종 어느 업종에 있더라도 생존 경쟁의 구도를 탈피하면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너그러워진다.

이민을 둘러싼 현재의 사회적 갈등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세계성(globality)과 민족 국가의 토착성(locality) 간 모순으로 야기됐다. 쉽지 않겠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글로벌 탈자본주의와 탈민족 국가’로 극복해야 한다. 자본 축적과 저임금 노동력 착취를 목적으로 하는 현 세계화는 더 싼 노동력을 착취할 여지를 만들기 위해 민족 국가의 존속을 바란다. 국가 간 임금 격차를 공고히 하는 민족 국가가 사라지고 전 세계 노동자의 임금 평준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글로벌 자본가들에게 재앙이기 때문이다. 이 모순은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세계화를 대신할 탈자본 국제주의(internationalism) 그리고 이후 민족 국가를 대신할 새로운 체제, 대표적으로 세계 공화국의 등장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진 탈자본 국제주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제시되는 대안적 세계화 개념 중 하나다. 각국 노동 환경에 초점을 맞추는 국가 단위의 사회 개혁이 아닌 전 세계적인 노동자의 연대와 시민 사회 운동을 강조한다. 함께 언급한 세계 공화국에서는 착취가 아닌 부의 재분배를 위한 세계화가 이루어지며, 세계 시민 노동자의 임금은 좋은 의미에서 평준화될 것이다. 당연히 이 세계 공화국은 탈자본주의(non-capitalism) 경제 시스템을 도입할 것이다. 사회 구성원 간 경제적 평등 그리고 경제 민주주의가 실현되면 지금과 같은 에스닉 그룹 간 긴장과 갈등은 자연스럽게 소멸한다. 인종과 계급이 빠진 사회 구성원의 다문화는 이제 진정으로 축복해야 할 인류의 다양성이 될 것이다.

숱한 문제를 야기하는 민족 국가나 글로벌 자본주의는 당장 사라지거나 스스로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대안으로 제시한 글로벌 탈자본주의와 탈민족 국가는 글로벌 자본주의를 대체할 충분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글로벌 탈자본주의와 탈민족 국가 시도는 이미 한 세기 전부터 있었다. 노동 운동의 국제적 연맹체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1916년 제2인터내셔널의 와해와 함께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다. 국제주의 기치 아래 전 세계 노동자의 연대를 추구했던 유럽 사회주의 계열 정당들이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자국 이익을 위해 참전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동지였던 수백만 노동자들은 자국 자본가를 위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참호에서 무의미하게 죽어 나갔다. 노동 계급의 보편성이 민족 국가의 특수성에 무릎 꿇은 사건이다.

이민을 둘러싼 문제의 해결은 세계의 모든 사람, 특히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방식이어야 한다. 현재와 같은 자국 원주민 노동자와 사회 구성원만을 위한 처방을 뛰어넘어야 한다. 하수도가 없어 오물 범벅인 판자촌에서 생활하는 저개발국 노동자도 같이 배려해야 한다. 국제주의 정신은 민족 국가의 배타성 아래 불거지는 이민 관련 이슈를 풀어갈 열쇠가 될 수 있다. 자유 무역을 대신해 공정 무역이 주목받듯, 수용국과 송출국 사회 구성원 모두를 염두에 둔 ‘공정 이민(fair immigration)’은 어떤 형식이 될 수 있을까?

우리 모두는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추구해야 한다.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에게 “너는 금수저와 똑같다”라고 주문을 외우듯 반복해도 똑같아지지 않는다. 이민을 둘러싼 사회적 파열음 역시 원주민에 대한 다문화 교육과 같은 것이 아닌 구조적 접근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현대 소설 《배따라기》의 작가 김동인은 1945년 8월 15일, 일왕이 항복 선언을 하기 두 시간 전에 조선 총독부를 찾아가 시국에 공헌할 새로운 작가단을 꾸리자고 제안했다. 해방을 예상하지 못하고 권력에 천착한 것이다. 한국 원주민이 지금 경험하는 한국 자본주의는 지난 40여 년간 글로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함께했다. 김동인에게 일제 치하 35년이 그랬던 것처럼, 많은 한국 사회 구성원에게 한국 사회의 지금 모습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디폴트(default mode)로 다가갈지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늘 그렇지 않음을 보여 준다. 한국 사회는 변할 수 있고, 지금까지 변해왔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근본적 해결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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