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의 정의

1월 4일 - FORECAST

EU가 원자력과 LNG를 친환경으로 분류했다. 무엇이 녹색인가.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EU 집행위원회가 논란 끝에 원자력과 천연가스를 친환경으로 분류한 녹색 분류체계(Taxonomy) 개정안을 지난 12월 31일 회원국들에 보냈다. 집행위 최종안은 추가 논의를 거쳐 1월 중순경 확정된다. 원전과 천연가스에 대한 안전 기준이 포함됐지만 반발이 거세다. 그린의 정의는 무엇인가.
WHY_ 지금 EU 택소노미를 읽어야 하는 이유

녹색 분류체계 수립은 전 세계적으로 현재 진행형이다. 친환경 어젠다에 가장 선진적인 EU의 택소노미는 탄소 경제의 새로운 기준이 된다. 자체 기준을 만들고 있는 주요국의 결정에도 강한 영향을 미친다. 최종안에 원자력 발전의 명운이 걸렸다. 탈원전을 목표하는 한국은 최종안에 주목해야 한다.
DEFINITION_ 그린택소노미

녹색 분류체계 이른바 그린 택소노미는 친환경 마크다. 지속 가능한 경제 활동의 범위를 정한 것으로 녹색 금융의 투자 기준이자 지침서다. 이 체계에서 친환경으로 분류되면 금융 조달이 쉬워진다. 택소노미 논의는 EU가 세계 최초다. 한국형 녹색 분류체계인 K택소노미는 2021년 12월 30일에 최종안이 공개됐다. 액화 천연가스(LNG)는 부분적으로 포함됐지만 원전은 빠졌다.
MONEY_ 1348조 원

유럽 그린딜 예산은 1조 유로다. 한화로 1348조 원이다. 유럽 그린딜은 2019년 12월 11일에 발표된 일련의 정책이다. 산업 및 사회 전 분야에 걸친 녹색 전환을 통해 2050년까지 탄소중립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립됐다. 2020년 초 기후법과 함께 유럽 그린딜 투자 계획이 발표됐다. 택소노미가 이대로 확정될 경우 원전은 그린딜 예산을 운용할 수 있고 녹색 채권 발행도 가능하다.
RECIPE_ 브릿지

탈탄소로 가는 길은 다양하다. 원전은 탄소 배출량이 매우 적지만 폐기물 처리의 위험이 있다. LNG는 석탄의 5분의 1 수준이지만 탄소를 배출한다. EU 택소노미 논의 초기엔 가스와 원자력이 포함되지 않았다. LNG를 주로 사용하는 동유럽 국가들과 전력의 70퍼센트를 원자력 발전에 의존하는 프랑스는 브릿지 연료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반면 독일은 전력 발전 비중 중 신재생 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율이 42.1퍼센트다. 신재생 에너지 발전율 역시 석탄이나 LNG에 근접하고 있다. 전환의 강 앞에 다리를 놓느냐 뛰어넘느냐의 논쟁이다.
NUMBER_ 26.2

시야를 넓혀보자. 2019년 기준 유럽 전체 발전원의 26.2퍼센트가 원자력 발전이다. EU 내 저탄소 에너지 단일 공급원 중 가장 큰 규모다. 탄소 배출의 주범인 석탄 발전은 동년 기준 23퍼센트다. 원전의 영향력은 여전히 크고 석탄은 아직도 주요 산업에서 필수적으로 쓰이고 있다. 탈원전을 주장하는 독일조차 전력 생산 중 원자력 발전 비율이 11퍼센트에 달하고 프랑스 원전의 전력을 일부 수입해오기도 한다. 택소노미가 신재생 에너지 확대보다 탈석탄에 초점을 맞춘 것이 일견 이해될 법하다. 그러나 환경 논리만 작용한 것은 아니다.
KEYMAN_ JRC

EU 집행위의 과학 자문 담당인 공동연구센터(JRC)는 2021년 2월의 보고서에서 원전을 녹색 산업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다른 환경 목표에 중대한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DNSH(Do no significant harm) 기준에 부합한다고 봤다. 이 특별 보고서엔 국내 원전 비율이 높고 기술 기반을 갖춘 국가들의 입김이 작용했다. 같은 해 6월 보건환경과학 그룹의 보고서는 기존 보고서에서 추가 검토 필요성을 제기했고 반대 측 여론이 힘을 얻었다. 석탄과 천연가스 수급 불안정으로 전력 가격이 급등하자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결국 원전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됐다. 에너지 주도권 싸움의 중심엔 각종 보고서가 있었다.
CONFLICT_ 탈원전5개국

독일, 오스트리아, 룩셈부르크, 포르투갈, 덴마크는 이번 개정안에 거세게 반발했다. 이들은 모두 탈원전을 실행 중인 국가들이다. 소형모듈원자로(SMR) 개발에 적극적인 프랑스와 탈원전 국가인 독일은 EU 내 주요국인 만큼 그들의 라이벌 구도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특히 오스트리아는 개정안이 최종안이 될 경우 유럽 사법재판소에 EU집행위를 고소한다는 입장이다. 이들 국가뿐 아니라 ESG 투자 그룹인 넷 제로 자산 소유자 동맹(Net-Zero Asset Owner Alliance)이나 각종 환경 단체 역시 원전의 택소노미 포함에 부정적이다.
REFERENCE_ 글로벌택소노미

다른 주요국은 좀 더 솔직하다. 먼저 택소노미 개념으로 원전을 포함한 국가는 러시아가 유일하다. 미국은 엇비슷한 청정에너지기준(CES)에 원전을 포함할 것으로 예상된다. 바이든 대통령 역시 긍정적이다. 중국은 인권 관련 규탄을 상쇄하고 소프트파워를 강화하기 위해 EU와 에너지 거버넌스를 상당 부분 공유하는데 에너지전략백서에 현재 원전이 청정 에너지로 구분돼있다. 일본이나 캐나다 역시 원전에 긍정적이다. 탈원전 행보가 시류를 거스른 행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한국은 원전을 일단 분류체계에서 제외했지만 환경부 관계자는 추후 국내외 동향에 따라 일정 주기로 택소노미가 조정될 가능성을 시사했다.
RISK_ 자원안보

2021년 10월 글로벌 전력난의 여파는 그린 플레이션을 유발했다. 풍력은 2020년 기준 유럽 전체 발전량의 13퍼센트를 차지했지만 막상 바람이 불지 않자 LNG 가격이 급등했고 뒤이어 석탄 가격까지 올랐다. 세계 에너지 통계에 따르면 석탄 최대 생산국은 중국이고 천연 가스 최대 생산국은 러시아다. 러시아는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노르트스트림2 송유관을 이용하기도 했다. 신재생 에너지로의 빠른 전환이나 원전을 갖추지 못하면 주요 자원 생산국에 정치적으로 휘둘릴 수 있다. 신냉전 구도가 가시화되며 중국과 러시아는 협력을 강화하고 있고, 희토류든 석탄이든 천연 가스든 언제든 협상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 
INSIGHT_ 에너지정치

원전은 그린인가. 제로에 가까운 탄소 배출과 수급 안정성은 원자력이 세계적으로 전환의 필수 요소로 인식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폐기물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결코 그린이 아니다. 수급 안정성을 이유로 재생 에너지로의 전환 동기를 저해할 소지도 크다. 게다가 경제성이 신재생 에너지보다 떨어진다는 평가도 많다. 생산 단가 자체는 저렴하지만 건설·개발비가 높고 유지를 위한 사회적 비용이 크기 때문이다. 글로벌 공급망 위기로 SMR 개발을 늘리던 프랑스에게 원전은 그린인가라는 질문은 유효하지 않았다. 원전을 위한 안정적 자금 조달이 필요했고 LNG를 택소노미에 포함시키려는 동유럽 국가들과 손을 잡았다. 탄소 중립을 위한 그린딜과 택소노미는 에너지 외환 속 내부 알력 다툼의 양상을 보였고 프랑스는 승리했다.
FORESIGHT_ 원자력시대

원자력 시대가 펼쳐질까. 미국, 중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 주요국이 이미 SMR 개발에 앞장서고 있고 EU 택소노미의 최종안에 따라 한국의 K택소노미 역시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차기 대선에서 승리할 후보는 탈원전 정책 철회 요구에 직면할 것이다. 이미 원전 밀집도가 높은데 높은 투자비와 엄격한 기준을 거쳐 부지 확보까지 필요한 원전이 국내에 마구잡이로 신설될지는 미지수다. 원자력은 전환의 과도기를 버틸 안정성을 가지고 있지만 앞으로 국제 관계에 따라 에너지 안보로 기능할 가능성이 크다. 에너지 전환의 시대가 아닌 에너지 안보의 시대가 열렸다.


원자력 발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동일본 대지진 10년의 교훈》를 추천합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통해 원전의 빛과 어둠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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