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첫 번째 프라임 레터

안녕하세요. 북저널리즘 CCO 신기주입니다. 

“세상에서 잊히기를. 별거 아닌 사람으로 남기를 바란다.” 사울 레이터가 남긴 말입니다. 사울 레이터는 포토그래퍼입니다. 평생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 보이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살았죠. 일평생 거의 무명이었습니다. 그의 바람대로 세상이 잊은 별거 아닌 사람처럼 보였죠. 사울 레이터는 조용히 창가에 앉아 바삐 스쳐지나가는 세상 풍경을 느리게 카메라 필름폭에 옮겨 담으며 살았습니다. 무려 60년 동안이나 그렇게 있었습니다. 

사울 레이터가 본인의 뜻과는 다르게 유명해지기 시작한 건 80대에 접어든 2000년대 중반부터였습니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들에선 상업적 목적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진이 팔리려면 유명한 인물을 찍거나 비싼 물건을 담거나 놀라운 사건을 포착해야만 합니다. 사울 레이터가 뉴욕 로어 이스트사이드 빌리지에 은둔했던 60년 동안 바깥 세계의 포토그래퍼들은 모두가 인물과 물건과 사건에 스스로를 최적화해버렸습니다. 대신 사울 레이터처럼 카페 캐노피에 가려진 눈 내리는 뉴욕의 거리나 빨간 우산을 쓴 채 걸어가는 뉴요커의 모습이나 빗방울이 맺힌 젖은 창문으로 훔쳐본 행인의 어렴풋한 모습처럼 소소한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눈을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돈과 영혼을 등가교환한 겁니다.  

사울 레이터는 2013년 11월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독신이었던 그가 살던 아파트에선 미공개 사진들이 산더미처럼 발견됐습니다. 사울 레이터는 1년에 한 차례씩 친구들에게 자신이 찍은 거리 사진들을 선보이곤 했습니다. 크고 비싼 인화 대신 작고 값싼 슬라이드로 만들어서 영사기를 통해 하나하나 보여주곤 했죠. 아마도 당대인들한텐 흔한 주변 거리 풍경 사진처럼 보였을 겁니다. 당시엔 그것이 아름답다는 걸 느끼지 못할 만큼 일상적이었을테니까요. 반세기 넘는 세월이 흐른 뒤 후대인들에겐 사울 레이터의 사진들은 전혀 다르게 다가옵니다. 지금 사람들한텐 지나가버린 시간 속 사라져버린 아름다움으로 보입니다. 오직 사울 레이터의 사진 속에만 남아 있는 시간들입니다. 
그런데 사울 레이터는 왜 세상에서 잊혀지고 싶어했을까요. 별거 아닌 사람이고 싶어했을까요. 전시공간 피크닉에서 열리고 있는 사울 레이터 사진전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를 보러 갔던 것도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서였습니다. 온 세상이 나를 부르짖는 시대에 나 없이도 한없이 행복했던 사람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나는 시대 정신입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나를 자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나를 연민하고 나를 애처로워합니다. 나를 위해 선물하고 나를 위해 투자하고 나를 위해 휴가가고 나를 위해 노력합니다. 나아가 이젠 투표도 나를 위해 합니다. 요즘 대선의 화두는 정책효능감입니다. 유권자가 나를 위한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공약을 제시해야만 겨우 표를 얻을 수 있는 시대니까요. 이재명 후보의 소확행 공약들과 윤석열 후보의 심쿵 공약들이 그렇게 조제된 처방전들입니다. 이재명 후보는 아예 나를 위해를 대선 슬로건으로 삼았죠. 포퓰리즘입니다. 표를 얻기 위한 전형적인 인기영합정책들이니까요. 

여당의 이재명 후보나 야당의 이준석 대표 같은 영악한 포퓰리즘적 정치인들 탓일까요. 정치가 포퓰리즘화된 건 시대가 포퓰리스트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시대 정신이니까요. 정치가 먼저가 아니라 세상이 먼저 그렇게 변해버린 겁니다. 포퓰리스트들은 그저 우리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봉건정치 시대엔 포퓰리스트를 간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왕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해서 권력을 얻고 나라를 망쳤죠. 이순신을 탄핵한 건 원균이었지만 이순신을 귀향 보내서 정유재란을 유발한 건 선조였습니다. 사실 선조는 이순신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성공한 배신의 아이콘 이성계의 자손이었으니까요. 원균은 그저 선조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속닥여줬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선조는 조선이라는 나라 대신 이씨왕조라는 나를 위한 선택을 했습니다. 그게 정책효능감이 더 컸으니까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1조2항입니다. 민주주의에선 내가 왕입니다. 단지 권력이 5200만 명한테 엔빵으로 나뉘어 있을 뿐이죠. 민주주의에선 나라는 왕들의 집단적 선택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1명의 왕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겼을 때도 간신이 가장 큰 위험이었듯이 5200만 명의 왕들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겼을 때도 포퓰리스트가 가장 큰 위협입니다. 나라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나를 위한 선택을 하도록 유혹하니까요. 솔직히 나도 나라보단 나를 위한 선택을 하고 싶었거든요. 누군가 나와서 그래도 괜찮다고 대놓고 말해줬으면 싶었거든요. 나 하나쯤이야 괜찮다고, 나라가 나를 위해 해준 게 뭐가 있냐고, 나를 위해 살라고, 나를 위해 나라가 다 해주겠다고, 그렇게 심쿵하게 해주는 자가 바로 민주주의의 간신입니다.
그래서 사울 레이터를 보고 싶었습니다. 나를 지우고도 백년 가까이 행복하게 살았던 사람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뒤늦게 재발견된 사울 레이터는 컬러 사진의 선구자라거나 거리 사진의 대가로 칭송 받고 있습니다. 모두가 사울 레이터가 세상을 떠난 뒤 붙여진 별호들입니다. 사울 레이터를 무언가 특별한 존재로 표현해야 사진도 팔리고 전시회도 열릴 테니까요. 정작 사울 레이터 본인은 선구자가 되려고도 대가를 꿈꾸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무언가 특별한 목표를 이루려고도 누군가 특별한 존재가 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레이터에게 나는 하나도 특별하지 않았으니까요. 

사울 레이터를 다룬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인 노 그레이트 허리〉입니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제목이죠. 요즘 같은 FOMO의 시대엔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입니다. 다큐멘터리에서도 사울 레이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 대부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지냈어요. 그래도 늘 만족했죠. 드러나지 않는 것은 커다란 특권입니다.” 온 세상이 앞만 보며 질주할 때 사울 레이터는 창가에 잠자코 앉아 흘러가는 시간을 매일 매일 포착했습니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들엔 나를 지우고 세상을 관조해온 사람만의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이 특별한 건 50년 전 컬러 사진을 처음 썼다거나 거리 사진을 주로 찍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본 세상이 아니라 내가 없는 세상을 카메라에 담았기 때문입니다. 

인스타그램의 수억장 사진들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속 사진들은 대부분 나의 거울 이미지들입니다. 거의가 내가 무엇을 누구와 먹고 마시고 즐겼고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들입니다. 급기야 어떤 인플루언서는 인스타그램 속 디지털 자아를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안 간 여행 사진을 올리거나 안 산 신상 사진을 올리죠. 

나로 도배된 세상과 달리 사울 레이터는 철저하게 내가 배제된 세상 풍경을 찍었습니다. 사울 레이터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그저 누군가의 창문을 찍는다. 그게 뭐 대단한 업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절대 나를 위하지 않는 사울 레이터의 사진은 모두가 나를 위해 사는 세상 속에서 재발견됐습니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다 결국 본모습마저 잃어버렸을 때 사울 레이터가 발견됐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사울 레이터와 만난 것이었죠.
나 인플레이션 시대는 민주주의와 만나서 포퓰리즘을 소환합니다. 포퓰리즘의 원인은 나인 것이죠. 그렇다고 시대 정신을 거스를 수도 없습니다. 거스를 수 있다면 그건 시대 정신이 아닌 것이니까요. “국민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지 묻기보단 국가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줄지 물어주시라”고 정치인들이 앞장서 외치는 시대입니다. 지난 세기에 암살당한 케네디는 그렇게 이번 세기에 의문의 1패를 당했죠. 

사실 이번 대선의 후보들은 국민에게 희생을 말할 자격이 없는 입장들입니다. 그들부터가 일평생 나를 위해서만 살아온 분들이니까요. 비루하게 태어났을지언정 성공을 위해 무엇이든 다 하며 살아남아온 대선 후보도 공무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봉직하다보니 우연히 굴어들어온 기회를 잡아버린 대권 주자가 된 대선 후보도 둘 다 나를 위해 최선을 다 해 살다보니 청와대 문 앞까지 온 경우입니다. 국민을 위해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하지만 나를 위해 대통령이 되고 싶은 게 아마 진심일 겁니다. 

지난밤 1월 16일 저녁 MBC 탐사보도프로그램 〈스트레이트〉가 방송한 윤석열 후보 부인 김건희 씨의 전화 녹취에서도 그런 속내가 일부 드러났죠. 김건희 씨는 자신과 자신의 친오빠가 캠프의 비선실세 노릇을 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 의식이 없습니다. 이대로 대통령 권력을 쥐어준다면 권력을 사유화할 우려가 큽니다. 이렇게 나만을 위하는 권력자는 국민한테도 나를 위해 투표하라고 유혹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권력이 정당화되기 때문입니다. 
여야 할 것 없이 착실하게 이기적인 정치 현장을 취재하다가 마주한 사울 레이터 전시회는 선명한 영감을 줬습니다. 그렇게까지 나를 위해 애써 살지 않아도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걸 일평생 보여줬으니까요. 사울 레이터한텐 누군가 쥐어주는 소확행도 심쿵도 필요 없었습니다. 이미 온전한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요.

사실 나는 과대평가된 개념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소중하지만 특별한 존재는 아닐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엔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배웁니다. 어른 시절엔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을 사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걸 깨닫죠. 나 다움이야말로 최상의 가치입니다. 정작 나만을 위해 사는 삶은 공허합니다. 《셀피》의 저자 윌 스토는 나로 넘쳐나는 현대 사회의 병폐를 날카롭게 분석했습니다. 윌 스토는 《뉴요커》와 《가디언》의 필자입니다. 《셀피》에서 윌 스토는 자아라는 개념부터가 세상이 개개인에게 심어준 환상이라고 지적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더 나은 내가 되거나 더 못한 내가 되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결코 완벽한 나라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허상이니까요. 윌 스토는 자살과 자아도취가 나 인플레이션 시대의 부작용이라고 지적합니다. 내가 원하는 내가 되지 못해서 좌절하거나 내가 꿈꾸는 나라는 나르시시즘에 빠져 세상을 자기 중심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이죠. 

지난해 2021년 최고의 책으로 《시사인》에 《셀피》를 추천하면서 서평에 이렇게 썼던 기억이 납니다. “나르시즘은 배타적 인간을 양산한다. 가짜 뉴스도 자아 도취의 부작용이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완벽한 자아를 위협하는 모든 것을 배제한 세상을 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덧붙이자면, 나 인플레이션 시대는 나보다 더 큰 나를 생각하기를 거부하게 만듭니다. 나라의 미래를 결정하는 대선에서 나의 이해득실에 따라 투표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모두가 나로만 살아가는 세상은 각자도생 사회입니다. 여기서 때론 나한테 불리한 선택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잔소리에 불과하죠. 모두가 하기 싫은 걸 옳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나라보다 나를 위하는 자들에게 권력을 쥐어주게 됩니다. 민주주의의 실패죠. 
우리는 대부분 세상에서 잊혀지고 별 것 아닌 사람으로 남게 될 겁니다. 그렇다고 우리 각자가 소중하지 않은 것도 최선을 다해 행복을 추구할 자격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이 세상엔 나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할 뿐입니다. 아마 지구가 좋은 사례일 겁니다. 청년 세대가 기후위기에 진심인 이유가 기성 세대보다 온난화를 더 오래 평생 겪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기후위기가 내 문제란 설명이죠. 결국 나를 위해 투표하듯 나를 위해 지구를 지키란 말입니다. 지금 시대 정신과는 맞아떨어지지 모르지만 솔직히 모순입니다. 나 이후의 지구도 나 이전의 지구만큼 지켜져야 하니까요. 

그래서 정말 중요한 건 나 다움이 아니라 나 다음입니다. 결국 세상에서 잊혀지고 별 것 아닌 사람으로 남게 될 나 다움이 아니라 잠재력과 가능성을 지닌 나 다음의 지구를 살아갈 사람들 말입니다. 나 다음을 위해 나 다움을 포기하고 희생하며 지구를 지켜야 하는 것이죠. 인류가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우리가 결국 나 다움보단 나 다음을 위한 선택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자를 집단의 지도자로 선택해왔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역사상 집단적 선택 기준이 나 다움이냐 나 다음이냐에 따라 흥망성쇄를 거듭해왔습니다. 예외는 없었습니다. 

사울 레이터 당대에 나 다움을 추구했던 특별했던 잘 나갔던 포토그래퍼들은 거의 대부분 세상에서 잊혀지고 별 것 아닌 사람으로 남았습니다. 뉴욕 이스트빌리지의 한 아파트에서 나 대신 나 다음을 위해 카메라를 들었던 사울 레이터는 끊임없이 기억되고 특별한 존재로 후대인들에게 남았습니다. 유리창에 맺힌 빗방울을 걷어내고 창문 너머의 존재가 누구인지 내가 꼭 확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걸 상상하는 건 나 다음의 몫일지도 모르니까요. 나 다움보다 나 다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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