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투하는 의사
2화

나는 타투이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

기술자에서 예술가로


1999년 여름, 한 중년 남성이 우리 병원을 찾았다. 팔에 새긴 장미 타투를 제거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타투는 붉은색 잉크가 들어간 컬러 타투로, 이전까지 칙칙한 검은색 타투만 봐온 내 눈엔 경이로울 정도의 문화 충격이었다. 당시에도 나는 수많은 타투를 제거해 온 성형외과 의사였다. 제거를 하며 한 번도 후회하거나 아쉬웠던 적은 없었다. 심장을 관통하는 화살, ‘차카게 살자’, ‘사랑한다. 경숙아!(당시 고객은 경숙 씨와 헤어진 상태였다)’ 등 내가 지웠던 타투들은 모두 몸에 그린 낙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장미 그림을 본 순간부터 타투는 내게 제거해야 할 낙서가 아닌, 새겨 넣고 싶은 예술 작품이 됐다.

타투를 제거하는 것은 여러 차례 피부를 오려 내는 과정임에도 그 장미 타투 고객은 일관되게 통증과 시간을 견뎌냈다. 그가 문신을 제거하려던 이유는 단순했다. 단지 아들과 목욕탕을 가고 싶기 때문이었다. 아들이 성장함에 따라 본인의 과거, 특히 힘든 시간의 흔적인 타투를 떳떳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말했다. 팔에 새긴 장미를 없애는 그 시간이 환자에게는 과거의 흔적을 지우는 과정이었지만, 나에겐 타투이스트라는 새로운 옷을 꿈꾸게 한 계기였다.

본격적으로 타투에 입문하려면 우선 선생님부터 찾아야 했다. 어떻게 하면 더 예쁜 눈, 매끄러운 피부를 만들 수 있을지만 연구해 왔을 뿐 타투 관련 기술에 대해선 일자무식이었으니 말이다. 20년 전엔 국내에서 타투를 전문적으로 시술하는 의사는 물론 일반 타투이스트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의 유일한 정보통, 장미 타투를 제거하러 온 손님에게 물어 자신을 시술해 줬다는 타투이스트 ‘키미’를 찾아갔다. 송탄의 미군 부대 앞 어느 골목이었다. 당시에는 동두천 미군 부대 타투이스트 키미와 송탄 미군 부대 타투이스트 키미가 타투계의 양대 산맥처럼 유명했다. 김씨 성을 가진 타투이스트들을 미군들이 발음하기 쉽게 ‘키미’라고 부르다 보니 우연찮게 국내 최고의 타투이스트 두 명이 동명이인이 된 것이다.

송탄 키미를 찾아 두꺼운 철문을 열고 들어간 타투 숍의 외관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하다. 그때는 마치 어느 범죄 현장으로 들어가는 듯한 스산한 느낌을 받았다. 불법이라는 그늘이 깊게 드리워진 공간이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외부 사람은 모를 것 같아 두렵기도 했다. 그런데 키미도 나를 두려워했다. 당시에도 타투는 의사가 아닌 일반인이 시술할 경우 불법이었다. 현재보다 처벌도 더욱 엄격했다. 타투를 배우고 싶은 학생으로서 방문한 자리였음에도 타투이스트 키미는 한동안 나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혹시 내가 그를 단속하러 나온 형사가 아닌지 의심했던 것 같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키미는 정기적으로 단속 형사에게 협박을 받고 있었고 수차례 금전적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소장하고 있던 타투 시술 용품들은 물론, 그때까지 그려 놓은 타투 도안을 모두 압수당한 상황이라고 했다. 갑자기 찾아온 나를 경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듯했다. 그러나 젊은 날의 열정과 패기를 타투에 불태우고 싶다며 조르는 내 모습에 감동받았는지, 혹은 빨리 가르쳐 주고 끝내자는 심산이었는지, 그는 마음의 문을 열었다. 키미는 자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가르쳐 주었다. 덕분에 나는 타투 머신의 사용법, 타투 도안을 인체에 본뜨는 방법 등 타투 시술의 가장 기본적인 과정들을 빠르게 배울 수 있었고, 그 무렵 미군 부대를 통해 암암리에 구입한 타투 머신은 추억의 애장품이 됐다.

수천 건의 성형 수술을 한 의사로서 타투는 기계적 행위에 머물러 있던 삶으로부터의 일탈이었다. 무언가를 창작해 내는 예술가의 체취를 풍길 수 있다는 생각은 나를 더욱 들뜨게 했다. 자로 재듯 정형화되어 있는 성형 수술과 달리 같은 디자인이라도 누구에게, 어떻게 시술하느냐에 따라 다른 작품이 되는 타투의 세계는 순간마다 경이로웠다. 나는 살면서 쌍꺼풀 수술을 1만 건 이상 해왔지만, ‘나의 작품’이라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데 타투는 달랐다. 바늘 한 땀 한 땀에 내 마음이 깃들었다. 또 성형 수술과 쓰는 기구도 다르고, 고객의 요구도 다르다. 그래서 늘 적당한 긴장감이 있다. 만약 나의 표현 능력을 넘는 작품을 요청하면 정중히 사양하지만 그렇다고 장르를 구별하지도 않는다. 선호하는 작품의 세계가 있지만 그것만 고집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타투를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자유’라고 말하고 싶다. 그 자유는 고객의 것이기도 하지만 시술자에게도 공평하게 적용된다. 고객과 시술자 모두 모양, 크기, 색깔을 제안할 수 있지만 늘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타투는 결국 자유와 소통의 결과물이다. 누군가의 몸에 있지만 온전히 그 사람만의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나는 타투에 그렇게나 매력을 느꼈나 보다.

하지만 타투의 무엇보다 큰 매력은 그 안에 담긴 다양한 사연들이다. 그 이야기들은 따로 책으로 남기고 싶을 정도로 깊고 넓다. 특히 10년 전 함께 병원에 찾아온 한 아버지와 아들을 떠올릴 때면 내 마음은 다시금 따뜻해진다. 60대 남자분과 이제 막 성인이 된 청년이었다. 20대의 아들이 타투를 하겠다고 하는데 60대의 아버지는 위험하다는 이유를 들어 결사반대했다. 아들은 병원에서 시술받는 조건으로 아버지로부터 승낙을 받았다. 아버지는 조폭들에게나 하는 타투를 설마 병원에서 시술하는지 의심이 들어 동행했던 것이다. 상담을 받는 내내 아버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여기가 병원이 맞는지, 상담하는 저 사람이 의사가 맞는지 의심하는 눈치였다. 상담이 진행되면서 그는 내가 입은 흰 가운과 벽에 걸린 의사 면허증을 보고 확신을 얻는 듯했다. 그러다 상담이 끝날 즈음에는 불현듯 본인도 등에 호랑이를 그려 넣고 싶다고 했다. 그 또한 아들 나이 때에 타투를 하고 싶었는데 조폭으로 오해를 받을까 봐 끝내 못했다고 했다. 호랑이를 비롯해 그분의 좌우명까지 등에 새겼는데 작업 기간은 한 달 정도 걸렸다. 시술 마지막 날 아버지는 그동안 시술하는 과정이 행복했다고 얘기했다. 40대 늦은 나이에 아들을 낳아 세대 차이가 크다 보니 공감대가 거의 없어 집에서도 대화 없이 서먹서먹했는데, 이번 시술을 통해 아들과 가까워진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날 밤, 아버지 등에 알로에를 발라 주며 “오늘은 얼마나 아팠어요?”라고 물어보는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 또한 시술자로서 행복했다.
 

아무도 없다면 나라도


처음 타투 시술을 할 당시 주변에서 타투 혹은 비슷한 시술이라도 하는 의사를 찾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당연히 배울 곳도 마땅치 않았다. 송탄 키미를 어렵게 찾아갔으나 배움이 오래 지속되진 못했다. 내 병원이 위치한 안양과 키미가 사는 송탄 사이 거리상의 제약이 컸다. 원래 운영하던 성형외과 진료와 타투를 겸업하기 벅찬 탓도 있었다.

이후 나와 같은 안양 지역에서 활동하는 타투이스트 ‘비기’를 알게 됐다. 그를 찾아가 기본적인 데생법과 타투 잉크 주입 원리를 자세히 교육받았으나 이 또한 한계가 있었다. 그 타투이스트의 문제가 아니었다. 타투가 불법인 국내에서 일대일 도제식 교육으로 이 기술을 숙련한다는 게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향한 곳이 미국 미시간주에 위치한 디트로이트 타투 스쿨이었다. 지금이야 해외 각지에 타투 교육 기관이 많이 생겨났지만, 당시 미국과 유럽을 통틀어 찾을 수 있던 공식적인 타투 교육 기관으로는 이곳이 유일했다. 약 한 달 동안 나는 국내에선 보기 힘들던 타투 머신을 조작하는 방법, 도안을 디자인해 인체에 적용하는 방법 등을 익혔다.

2000년 5월 미국 디트로이트 타투 스쿨 앞에서
그때 나를 가장 감동시킨 건 최첨단 타투 머신이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타투이스트의 도안이 아니었다. 타투를 바라보던 미국인들의 거리낌 없고 투명한 시선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타투 시술을 시작하며, 나는 몇 년만 지나면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타투에 개방적이고, 타투이스트들끼리 편하게 정보와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나부터라도 하다 보면 조만간 의사들 사이에 보편적인 시술이 되겠지’ 생각하며 시작한 것이 벌써 20년 전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타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선구자가 되겠다는 거창한 의지나 계획 없이 시작한 일이, 결국 오랜 시간을 거쳐 독점적이라는 얘기를 듣는 상황에 이른 것은 내 의도가 아니라 순전히 우연이다.

반면 타투를 시술받길 원하는 사람들의 수는 놀라울 정도로 늘어났다.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자유 시장 경제의 기본 원리를 “수요가 늘면 공급이 늘고 공급이 과도해지면 다시 새로운 소비가 창출되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타투 시장은 이 원리와는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 합법의 영역은 작동하지 않고 비합법적인 시장만이 팽창하는 기형적 현상이 20년간 깊게 뿌리를 내렸다. 한국타투협회의 2019년 국회 발표에 따르면 타투 시술을 받는 소비자는 연간 200만 명에 이른다. 2018년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개최한 문신용 염료 안전 관리 방안 포럼[1]에서 염료 제조사 ‘더 스탠다드’가 발표한 국내 타투 피술자 수는 누적 300만 명이다. 눈썹, 입술 등 반영구 화장 경험자는 누적 1000만 명이다. 그런데 이들을 합법적으로 시술하고 있는 타투이스트, 즉 의사는 열 명 미만이다. 이 숫자마저 내가 15년 전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아마 열 명 정도 될 거예요”라고 했던 게 현재까지 재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알 수 있을 정도로, 타투 시장에 있어서 법과 현실의 간격은 지나치게 넓다. 법의 기능과 권위를 의심하게 된다. 불법인 행위가 음성화되는 과정 또한 필연적이다. 1920년대 미국이 실시한 금주법을 떠올려 보자. 누구나 어렵지 않게 술을 구입할 수 있는 현실에서 술을 먹지 말라는 법은 국민들을 고단하게 만들 뿐이었다. 타투에 있어서는 현재 우리의 현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의료인만이 타투 및 반영구 화장 시술을 할 수 있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난 1992년은 군사 정권의 분위기가 여전히 남아 있던 시기다. 사회적으로, 특히 의료계는 보수적 사고가 지배적이었다. 1990년대의 논리가 현재까지 유령처럼 사회를 지배한 결과 타투 업계 전체의 수요와 공급은 불행하게도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영구적인 화장이 필요한 사람들

타투 잉크를 이용해 백반증 부위의 피부색을 균일하게 재현했다.
타투는 다양한 모습과 용도로 우리 곁에 있다. 타투를 소비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이제는 어떤 타투를 했는지가 주목받는 시대이지, 타투를 했냐 안 했냐는 관심조차 끌기 어려운 분위기다. 본원에서 가장 많이 하는 타투는 그림을 주제로 하는 서화 문신, 패션 타투 혹은 장식용 타투가 아니다. 메디컬 타투(medical tattoo) 혹은 재건 문신(reconstructive tattoo)이라고 불리는 전혀 낯선 분야이다. 가령 피부에 색소가 비정상적으로 소실되는 백반증의 경우, 피부색과 유사한 톤의 잉크를 사용해 정상 피
부의 색을 재현해 내고 있다. 교통사고, 화상, 외과적 수술 등을 통해 생긴 상처 부위를 피부색으로 복원해 주는 과정도 모두 타투의 영역이다. 모발 이식으로 커버하기 어려운 두피에 모발과 비슷한 색의 잉크를 주입해 주는 타투 또한 이제 두피 문신이라는 이름으로 보편화됐다. 이러한 재건 치료의 영역에서 타투의 역할은 앞으로 계속 커질 것이다. 현대 의학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색소 질환 영역에서 타투는 새로운 해결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의학은 인류 역사상 질병을 치료하는 데에 상당한 진전을 보여 왔다. 특히 인류의 기대 수명을 1950년대 40세에서 2020년 80세로 높여 줄 정도로 치료 의학이 발전했다. 그러나 치사율이 낮은, 혹은 내면의 질병을 치료하는 분야의 의학 발전은 이에 비해 매우 미미하다. 앞서 언급한 백반증을 다시 예로 들면, 피부에 색소가 사라지는 이 질환에 대한 관심은 다른 질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원인에 대한 분석은 물론이고 임상 치료 또한 아직 연구 초기 단계다. 백반증은 유색 인종의 질환일 뿐, 현대 의학 발달의 중심이었던 백인들에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던 질환이기 때문이다.

백반증은 아프지 않다. 가렵지도 않다. 그러나 남에게 드러날 때 사회적 제약이 따르는 질환이다. 전염성이 없음에도 사람들이 환자 가까이 가는 것조차 꺼린다. 그래서 환자들은 몸보다 마음의 상처가 크다. 감추고 가리려 해도 다 가리지 못하는 경우 사회로부터 스스로 격리한다. 격리는 코로나19 이후 우리가 매일 해야 하는 일상의 의무로 자리 잡았지만, 백반증 환자에겐 훨씬 옛날부터 익숙한 일이었다. 2주가 아닌 일생을 격리해야 하는 이들에게 치료제는 없다. 속 시원히 원인을 얘기해 줄 사람도 없다. 타투는 이런 환자들에게 치료가 아닌 영구적인 화장을 시도한다.

타투 제거를 위해 우리 병원에 오는 사람들 중 50퍼센트 이상은 몸에 있던 상처를 가리기 위해 타투를 하고 이를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다. 그림 자체가 좋아서 타투를 새기는 사람도 있지만, 누군가에게 타투는 타인에게 과시하거나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화려한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감추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화재로 남은 흉터 위에 소방관 자신의 모습을 새겼다.

2년 전 소방관을 위한 무료 시술 이벤트를 진행했다. 화재 진압 과정에서 전신 30퍼센트에 화상을 입은 신청자가 있었는데, 그는 주위로부터 자신의 화상에 대해 영광의 상처이니 훈장이니 하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본인에겐 자신의 몸에 남은 상처가 그냥 보기 싫은 자국일 뿐이었다. 그 상처를 가리기 위해 타투를 결심해 우리 병원에 내원했다. 본인의 상처를 가급적 완전히 가리기를 바라서 여러 차례에 걸쳐 시술을 진행했다. 어깨에 있던 손바닥 정도의 흉터 위에 소방관 자신의 모습을, 허벅지에 있던 흉터 위엔 또 다른 소방관의 모습을 새겨 드렸다. 그림과 함께 그가 꼭 새기길 원했던 문구도 있다. “First In, Last Out!” 화재 현장에 가장 먼저 들어가고 마지막에 나온다는 내용은 타투를 새기는 과정 내내 나 자신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를 비롯해 지금까지 나는 수많은 소방관에게 타투 시술을 해왔지만, 그들이 단지 남에게 멋져 보이기 위해서 타투를 새긴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내가 그들에게 느꼈던 것은 지난 상처를 극복하려는 의지와 소방관이라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긍지였다.

상처나 흉터를 가진 사람들을 대하며 그들의 상흔이 주변 사람들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배웠다.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거나 혹은 매우 미미해 보이는 상처가 정작 당사자들에게는 지구만큼 크고 심해만큼 깊게 느껴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상처를 얘기하며 지워 달라고 할 때, 이해 못할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시술할 의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상처를 어떻게 치료해 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렴풋하게나마 그들의 감정을 볼 수 있게 됐다. 아마도 상처에 얽힌 사연과 기억들이 내게도 그들을 보는 또 다른 눈을 갖게 해준 것 같다.
[1]

2018년 11월 21일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주최한 제8회 식품·의약품 안전 열린 포럼. 문신용 염료 제품 안전 관리 현황을 소비자들에게 공유하고, 향후 관리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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