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투하는 의사
8화

북저널리즘 인사이드; 내일 당장 타투가 합법화된다면

지난여름 홍대 부근 어느 타투 숍에서였다. 젊은 타투이스트 여럿이 함께 사용하던 공동 작업실로, 시설도 인테리어도 깔끔했다. 그런데 시술 직전 타투이스트와 작은 마찰이 있었다. 원래 생각했던 부위에서 타투 위치를 약간 옮기고 싶다고 하자, 그는 “예민한 손님은 받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그의 날카로운 모습이 한편으론 이해가 됐다. 처음 위치도 나쁘지 않은 터라 그대로 시술했다.

타투이스트들과의 소통이 간단치 않았던 건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방어적이거나 퉁명스러운 타투이스트를 만날 때면 나는 이들을 멋진 작품을 만들어 내는 예술가로 생각해야 할지 혹은 일정 금액을 받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로 생각해야 할지 고민됐다. 그들의 작품을 존중하고 싶은 마음과 내 안전과 만족을 챙기고 싶은 마음이 충돌했다. 여러 번 고민 끝에 깨달은 것은, 지금 타투를 바라보는 사회적 분위기와 현행법으로는 타투이스트와 시술자 모두 을(乙)이 되는 기형적인 구조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럼 누가 갑(甲)인가? 타투 합법화 논쟁의 가장 큰 수수께끼다. 비의료인 타투 시술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고 해서 혜택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타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 몸에 그림을 새긴다는 상상을 해본 적 없는 사람들, 말하자면 실제 이 산업과 가장 멀리 떨어진 이들만이 오랜 관습이 관성적으로 유지되는 걸 반길 뿐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소확행’ 45번 공약으로 타투 합법화를 내세웠다. 대선이 코앞인 현시점 급히 내거는 수십 개의 공약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타투에 대한 사회적인 공감대는 여전히 낮은 편이다. 부동산과 취업 등에 관한 거대한 공약들에 쉽게 묻히며, 여전히 소수가 자유를 외치는 부담스러운 이야기로 들린다.

공감대가 낮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관심이 없다. 관심만 없다면 다행인데 걱정은 또 많다. 타투가 위험할 거라는 이유로, 아직은 많은 국민이 싫어할 거라는 이유로, 우리는 오랜 시간 ‘사회적 합의’를 핑계 삼아 사회적 합의를 미루어 왔다. 이 책은 타투업 양성화 추진을 위한 적극적인 움직임을 도모하는 행동 강령이 아니다. 다만 타투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에 질문을 던진다.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해 온 이야기에 우리는 언제까지 무심할 수 있을까. 나와 다른 것들에 대한 불만과 차별을 걱정이란 미명으로 어디까지 합리화할 수 있을까. 타투 합법화 갈등은 우리 사회가 암묵적으로 용인해 온 차별을 보여 주는 하나의 단면일 뿐이다.

내일 당장 타투가 합법화된다 해도 많은 것이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타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몸에 타투가 있는 이들을 전과 같이 따가운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다. 미운 말은 삼키더라도 탐탁지 않은 속내는 여전할 것이다. 즉 비의료인의 타투 시술 합법화는 논의의 끝이 아닌 시작이다. 타투 합법화 갈등은 마치 의사들과 타투이스트들의 세력 다툼인 것처럼, 진보와 보수의 충돌인 것처럼 이분화되어 왔다. 90년대식이다. 지금 타투는 누군가에게 기억을 지우거나 새기는 도구다. 누군가에겐 상처를 치료하는 기술이고 누군가는 자부심을 갖는 일이다. 찬반이 아닌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목소리에 주목할 때 우리는 2020년대식에 가까워질 수 있다.

걱정은 충분했다. 이젠 낡은 관습과 불필요한 걱정들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비단 타투만이 아닌, 모든 다름에 관한 이야기다.

이다혜 에디터
추천 콘텐츠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