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 이후 노무현 대통령처럼 불행해지는 것만큼은 막아야만 하는 겁니다. 시대 정신이 또 다시 그렇게 외롭게 쓰러져가는 걸 지켜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문재인 대통령의 직무 수행 평가는 긍정평가 40퍼센트대를 줄곳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지지율 40퍼센트대로 퇴임하는 대통령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대통령 지지율 방어는 이철희 청와대 정무수석의 최우선 과제입니다. 이철희 수석은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지지율이 40퍼센트가 나온다면 여한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으로선 달성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철희 정부 수석이 지지율 40퍼센트에 집착하는 건 기록 달성 때문이 아닙니다. 이번 대선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어서도 아닙니다. 퇴임 이후 문재인이라는 상징을 지키려면 지지율이라는 해자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인기 없는 대통령으로 낙인 찍혀서 퇴임 이후 검찰과 언론의 마녀사냥까지 당한 노무현 대통령한테 없었던 게 임기 말 지지율이었으니까요. 지금 문재인 청와대의 최대 관심사는 정권 재창출이 아닙니다. 지지율을 지켜서 대통령을 지키는 겁니다. 엄밀히는 국민적 지지가 전 대통령을 지키는 것이죠.
그래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지난 2월 7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던진 발언은 지난 20년 동안의 한국정치사의 비극을 깊이 이해한다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습니다. 심지어 윤석열 후보 본인도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한다고 알려졌으면서 말입니다. 두 번의 대선토론에서 윤석열 후보는 짧은 정치 경력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사실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도 정치인이라기보단 검찰총장 같은 대답을 해버렸습니다. “집권하면 전 정권 적폐청산 수사는 할 것이냐”라는 질문에 “문재인 정권에서 불법과 비리를 저지른 사람들도 법에 따라 시스템에 따라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원칙론을 강조한거죠. 물론 잘못 했으면 벌을 받아야 합니다. 문재인 정부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정치는 법과는 달라야만 합니다. 법은 원칙대로 하면 그만이지만 정치는 원칙 그 너머의 가치를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법은 적용하면 그만이지만 정치는 이끌어야 하니까요.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간 건 이른바 검찰주의자들이었습니다. 법을 원칙에 따라 적용하기만 하면 완전무결하고 그래서 검찰은 무오류라고 믿는 게 검찰주의자들의 특징입니다.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윤석열 후보는 다시 한번 검찰주의자라는 걸 커밍아웃했죠. 노무현 대통령을 수사하면서도 검찰주의자들은 법과 원칙을 내세웠습니다. 전직 대통령까지 법정에 세우는 것이야 말로 검찰의 공명정대함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것이라고 착각했죠. 결과적으로 당시 검찰의 선택은 한국 정치를 소용돌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검찰 자신은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했죠. 당대의 시대정신을 검찰의 손에 잃어버린 국민은 트라우마를 겪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까지 같은 일을 겪게 될까 우려하고 있죠. 문재인이라는 시대 정신마저 잃게 될까 두려워하고 있죠. 국민이 대통령 후보에게 원하는 건 법과 원칙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겁니다.
사실 윤석열 후보의 인터뷰는 정치공학적으로도 부족합니다. 양당의 당파싸움에 질린 사람들이 중도층입니다. 문재인 정부를 적폐로 몰아서 수사하면 수구보수는 환호할지 모릅니다. 윤석열 후보 입장에선 원래 있던 집토끼죠. 확장성이 없는 메시지입니다. 윤석열 캠프도 뒤늦게 그걸 알고 확전을 피하는 분위기죠. 반면에 이재명 후보는 지난 2월 12일 조치원 유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그 험한 길을 가셨다. 우리가 지켜주지 못했다고 후회했다. 다시 지켜주지 못했다고 똑같은 후회를 두 번씩 반복할 것이냐.” 한 마디로 문재인을 지키려면 이재명을 찍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재명 후보는 친문적통이 아닙니다. 친노와 친문은 이재명 후보가 집권하면 결국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등을 돌릴 수 있다고 의심해왔죠. 이젠 이재명 후보가 노골적으로 문재인 지키기에 나선 모양새입니다. 노무현의 트라우마 때문이죠. 노무현은 여전히 한국 정치의 상수입니다. 아직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시대 정신이 성취되지 못해서일 겁니다.
눈물은 울음이 됐습니다. 울음은 통곡이 됐습니다. 길바닥에서 기진할 정도로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덕수궁 대한문 앞이었습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시민 분양소 앞이었습니다. 2009년 5월 28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나가던 아주머니 한 분이 등을 다독여주면서 휴지를 건내줄 정도였죠. 울면서도 왜 이렇게 눈물이 멈추질 않는지 스스로로 납득이 안 갔던 기억도 납니다. 눈물의 이유를 몰랐죠. 그날 집에 돌아가서 당시 기고하던 〈프레시안〉에 노무현 대통령의 부고 기사를 썼습니다. 제목은 ‘근조, 노무현’이었습니다. 정작 해당 기사를 민주당 관련 단체에서 책에 싣고자 했을 땐 단호박 거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노무현을 사랑했던 것이지 민주당을 지지하는 건 아니었던 겁니다. 아마 노무현 정부를 실패하게 만든 건 리더를 따를 줄 모르는 당시 열린우리당한테도 책임이 있다고 여겨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났습니다. 이제서야 당시의 눈물을 스스로 설명할 수 있게 됐습니다. 노무현 트라우마를 소환해준 윤석열 후보 덕분입니다. 노무현은 우리 시대의 이루지 못한 꿈입니다. 노무현 시대는 부족하고 불안하고 불완전했습니다. 대신 역사는 반드시 진보한다고 믿었습니다. 내일이 더 나아질 거라고 믿었죠. 대통령부터가 그런 낭만적인 생각을 하는 시대였죠. 대통령이 상록수를 부르며 꿈을 이야기하는 낭만의 시대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낭만의 시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노무현 2기인 문재인 정부조차 지지율에 혈안이 된 마당이니까요. 눈물은 한 시대가 이렇게 좌절되고 그 시대를 영원히 그리워할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노무현 세대가 잊혀져 죽어갔던 선장에게 보냈던 송가였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하루 아침에 한 시대가 눈물로 끝나버리는 비극이 반복돼선 안됩니다. 그것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최우선 원칙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