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 대한 의무 Ⅱ
5화

60년에 걸친 경고

1962년 뉴욕주에 불어닥친 태풍으로 주택들이 파괴된 모습 ©Bettmann/Getty/Guardian

이미 알고 있었다


1974년 8월, 미국 중앙정보부(CIA)는 ‘기밀 문제와 관련한 기후학적 조사’라는 이름의 연구를 수행했다. 분석 결과는 극적이었다. 기상 이변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이로 인해 정치적 불안정과 대량의 이주 사태가 이어지며, 이주 사태는 결국 더 큰 불안정성을 야기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보기관이 상상한 새로운 시대는 단지 지구 기온이 오른 세상만은 아니었다. CIA는 지구 온난화만큼이나 지구 한랭화를 경고하는 과학자들의 의견도 경청했다. 하지만 온도계가 어느 쪽으로 움직이고 있느냐는 CIA 차원에서 당장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정치적 파장이었다. 그들은 이른바 ‘소빙하기’, 즉 대략 1350년부터 185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일어난 일련의 한파가 가뭄과 기근뿐 아니라 전쟁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새로운 기후 변화가 일으킬 사태까지도 말이다.

CIA의 연구 보고서는 첫 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기후 변화는 1960년에 시작되었다. 하지만 기후학자를 포함해 그 누구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1960년대 초 소련과 인도의 흉작은 언제나 그랬듯 기상 운이 나빴던 탓으로 여겨졌다. 미국은 선박으로 인도에 곡식을 보냈고, 소련은 가축을 잡아먹었다. 그리고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은 조용히 축출되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세상은 이 경고를 무시했다. 세계 인구는 증가세였고, 각국은 에너지, 기술, 의약품에 대량 투자를 감행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기상 이변은 계속 진행되었고, 사하라 사막 바로 아래쪽 서아프리카 국가들로 옮겨 갔다. 모리타니, 세네갈, 말리,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차드의 국민들은 “기후 변화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보고서는 이렇게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이 겪은 고통은 다른 분쟁에 가려졌고, 부자 나라들은 관심을 주지 않았다.

기후 변화의 영향이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도 퍼지기 시작하면서, 1970년대 초반이 되자 버마, 파키스탄, 북한,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일본, 마닐라, 에콰도르, 소련, 중국, 인도, 미국에서 가뭄과 흉작, 홍수가 연이어 보고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패턴을 발견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했다. “전 세계 뉴스의 헤드라인은 우리가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직면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라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1970년경, 인도 바나레스주에서 일어난 홍수 ©Paolo KOCH/Gamma-Rapho/Getty Images
아무도 기후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는 주장이 전적으로 타당한 것은 아니다. 몇몇 과학자들은 한동안 이 문제를 이야기했다. 그들의 말은 신문에도 실렸고, 텔레비전에도 나왔으며,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의 1965년 연설에서도 언급되었다. CIA의 보고서가 화제가 되기 몇 달 전,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UN에서 “과학으로 인해 생겨난 문제들”을 과학을 적용해 해결하자는 취지의 연설을 했다. 그 연설에는 현재 최빈국들이 “계절풍대에서, 어쩌면 전 세계에서 일어날지 모르는 기후 변화의 가능성”에 위협을 받고 있다는 우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보고서의 작성자들은 핵심을 짚어 냈다. 기후 변화는 마땅히 받아야 할 관심을 얻지 못하고 있었으며, 긴급히 토론해야 할 상황도 아니었다. 대규모의 대중적 항의도 없었고, 그런 걸 시도하려는 사람도 없는 듯 보였다.

이 보고서는 애초에 기밀문서로 준비된 것이었지만 결국 몇 년 뒤 《뉴욕타임스》에 공개되었다. 보고서가 공개된 시점인 1977년 2월에는 화석 연료를 태운다는 문제가 해외의 기근보다는 국내의 석유 위기라는 관점에서 더 심각하게 파악되었다. 《뉴욕타임스》의 말처럼 기후 위기는 여전히 멀게 느껴졌으나, 미국인들은 평소와는 다른 날씨로 인해 생겨나는 어려움에 석유 부족 사태를 연결해 생각했다. 어쩌면 이 일로 약간이나마 변화를 열어젖힐 수 있지 않았을까? 《뉴욕타임스》의 기사는 에너지와 기후 전문가 모두 “현재의 위기는 눈앞에 닥친 심각한 것이므로, 문제가 더 악화하기 전에 이 이슈를 장기적으로 다루려는 관심과 계획이 향후 촉진될 것”이라는 희망을 공유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20세기 마지막 3분의 1 동안 진행된 논쟁은 기후 변화에 대한 우려만큼이나 그러한 논의를 지연시키려는 시도로 특징지어진다. 그렇게 된 것은 CIA의 정치 분석가들이 놓치고 있는 요인 때문이었다. 화석 연료 산업의 반격이다.

 

파멸의 예언자


정치인과 각 기관의 언론 담당자들은 이 논의를 지연시킬 수 있는 재료를 과학 공동체 내부에서 찾아냈다. 1976년 스티븐 슈나이더라는 젊은 기후 모델 제작자는 기후 과학 공동체에서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사람이 나올 때라고 생각했다.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생이었던 슈나이더는 자신이 돋보일 만한 연구 조사 프로젝트를 찾고 있었다. 나사(NASA)의 고다르 우주 연구소를 들락거리는 동안 그는 우연히 기후 모델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는 ‘바로 이거야’ 싶었다. 훗날 슈나이더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지구를 모형으로 만들어 본 다음에 그걸 오염시켜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해하는 거죠. 정책에도 긍정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고요. 얼마나 짜릿했겠습니까?”

가뭄과 기근에 대한 뉴스가 헤드라인으로 나온 지 몇 년 지난 상황이었던 터라, 슈나이더는 지금이야말로 기후 변화가 일으킬 수 있는 위험을 알리는 대중 과학 서적이 나올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1976년 《창세기 전략 (The Genesis Strategy)》이 출간됐다. 그는 ‘파멸의 예언자’라고 부르는 쪽이건 ‘지나친 낙관주의자’라고 부르는 쪽이건 어느 쪽에도 위치하고 싶지 않았다.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제대로 전달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중요했다.

책은 나오자마자 주목을 받았다. 재킷을 입은 물리학자 칼 세이건이 홍보를 했고,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에 서평이 실렸으며, 자니 카슨의 <투나잇 쇼>에서도 출연 섭외가 들어왔다. 책의 성공은 보수적 구세대들의 심기를 건드렸는데, 그들은 이런 방식이 과학을 하는 옳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슈나이더의 책을 특히나 맹렬하게 혹평한 사람은 기후학자 헬무트 란츠베르크였다. 그는 미 기상국 기후학 부서장을 역임하고, 당시 메릴랜드대학교에 재직하면서 널리 존경받는 교수였다.

란츠베르크는 미국 지구물리학회 ‘아메리칸 지오피지컬 유니언’ 학회지에 쓴 서평에서 슈나이더의 책을 “과학, 자연, 정치라는 넓은 범위의 주제를 잡다하게 섞은 책”이며 “본인의 말대로 여러 분야에 걸치고는 있지만 정말 마구잡이로 그러고 있다.”라고 했다. 란츠베르크가 싫어했던 건 슈나이더에게서 파악한 활동가다운 기질이었다. 그는 기후 과학자들이 대중의 주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믿었다. 특히나 기후 모델링의 불확실성이라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더욱 그래야 했다. 란츠베르크는 슈나이더가 기상학자에 대한 신뢰를 떨어 뜨릴 거라고 우려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기상학자란 꾸준히 데이터를 모아 최대한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꼭 필요한 때만 정치인들에게 비밀리에 신중히 브리핑하는 사람이었다. 이 글에서 란츠베르크는 슈나이더가 과학자들이 공직에 출마하는 걸 옹호하고 있다며, 그럴 거면 본인이 직접 하는 게 나을 거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진지한 과학자가 되길 원한다면 “여러 회의나 워크숍에 가서 얼굴 비추는 시간을 줄이고 과학 도서관 회원 가입부터 하라”고 꼬집으며 서평을 마무리했다.
1974년 사하라 사막 남부 사헬 지역의 기근 당시, 유목민들이 프랑스 공군이 투하한 밀기울을 줍고 있다. ©Alain Nogues/Sygma/Getty Images
이 갈등은 부분적으로 보면 세대 간 충돌이었다. 슈나이더는 상대적으로 젊고 반항적인 세대로, 과학을 기꺼이 길거리로 들고 갔다. 반면 란츠베르크는 정부나 군대와 신중하게, 보통은 비밀리에 협력하며 경력을 쌓은 사람이었다. 그는 과학에 대한 대중의 관여가 이 관계의 예민한 균형을 훼손할까 두려워했다. 또한 과학자의 처신에 대한 문화적 규범이라는 문제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훌륭한 과학자는 외압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고, 극적인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는 것은 모두 회피해야 한다고 보는 규범이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심지어 다른 오래된 문화적 규범과 마찬가지로 이런 규범이 과학을 왜곡시킬 때조차도 그랬다. 기후 변화에 쏟아지는 새로운 관심이 달갑지 않은 완고한 기상학자가 란츠베르크 한 명은 아니었다. 몇몇 이들은 이 극적인 상황이 불편했고, 또 다른 이들은 새로이 활용되고 있는 기술과 분야, 접근법을 신뢰하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기상청장 존 메이슨이 기후 변화에 대한 우려를 ‘시류 영합’이라 폄하하며 “미국의 불필요한 우려가 사실이 아님”을 밝히기 위한 행동에 착수했다. 1977년 그는 영국 왕립예술협회에서 공개 강연을 하며 기후는 늘 변동하기 마련이고, 최근의 가뭄이 전례 없는 일이 전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현재 속도로 향후 50년에서 100년 동안 화석 연료를 계속 태운다면 지구의 기온이 섭씨 1도 상승할 것이며, 이는 ‘중대한’ 문제이긴 하지만 지구 대기는 우리가 무엇을 던져 넣건 모두 감당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그는 모두가 결국에는 원자력으로 옮겨 갈 것으로 판단했다. 《네이처》에 이 강연에 관한 기사를 작성한 존 그리빈은 강연의 전반적인 메시지가 “겁먹을 것 없다”였다고 썼다. 그리빈은 파멸의 예언자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다며 독자들을 안심시켰다.

 

오류 없는 암울한 예측


그러나 변화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시작점은 기성 과학자와 활동가의 결합이 될 것이었다. 너새니얼 리치가 자신의 책 《잃어버린 지구(Losing Earth)》에 쓴 바에 따르면, 1978년 미 환경보건국이 석탄에 대해 작성한 모호한 내용의 보고서가 환경 단체 ‘지구의 벗’ 워싱턴 지부에서 활동하는 로비스트 라페포메런스의 책상에 놓였다. 보고서는 온실 효과를 이야기하면서 화석 연료가 향후 수십 년에 걸쳐 대기에 심각하고 해로운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가 사무실 사람들에게 이 문제를 문의하고 다닐 때, 누군가 그에게 지리학자 고든 맥도널드가 쓴 최근 신문 기사를 건넸다. 맥도널드는 1960년대에 린든 존슨 대통령의 자문으로 활동하며 기상 조절을 연구했던 미국의 고위급 과학자였다. 맥도널드는 1968년에 〈환경을 망치는 법〉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썼는데, 그는 글에서 핵전쟁의 위협 대신 기후를 무기화한 미래를 상상했다. 리치는 자신의 책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 에세이가 나온 뒤 10년 동안, 맥도널드는 인류가 이 특수한 대량 생산 무기를 악의가 아니라 부지불식중에 개발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경각심을 키워 왔다.”

더욱 중요한 건, 맥도널드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정기적으로 모여 정부에게 조언하는 엘리트 과학자들의 비밀 모임인 ‘이아손’의 일원이었다는 점이었다. 이아손 그룹은 1977년과 1978년 여름에 이산화탄소와 기후 변화 간 상관관계를 논의하려 모임을 열었고, 맥도널드는 미국 텔레비전에 출연해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스탠퍼드대학교에서 강연하는 스티븐 슈나이더 교수 ©ZUMA Press, Inc./Alamy
‘지구의 벗’ 로비스트인 포메런스와 비밀 군사 과학자인 맥도널드 사이에 문화적 알력이 있었겠거니 상상할 수 있지만, 그들은 강력한 팀으로 뭉쳤다. 《잃어버린 지구》에 서술된 일화에 따르면 두 사람은 대통령의 과학 자문인 프랭크 프레스와도 회의를 열었는데, 프레스는 그 자리에 미국 과학기술정책실의 고위급 직원을 전부 대동하고 나왔다. 맥도널드가 본인 주장의 요지를 설명하자 프레스는 MIT의 전 기상학과장인 줄 차니에게 조사를 요청해 보겠다고 말했다. 만약 차니가 기후 위기로 인한 종말이 오고 있다고 말한다면 대통령도 움직일 것이라 했다.

“줄 차니가 소환한 과학자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부인, 자녀, 그리고 작은 여행 가방과 함께 케이프 코드 남서쪽 지선에 위치한 우즈 홀에 있는 3층짜리 맨션으로 갔다.” 이는 리치의 책에 기록된 내용이다. 차니의 업무는 이아손의 보고서를 검증할 수 있는 대기 과학자들을 소집하는 것이었고, 그는 더 상세하고 풍부한 모델을 얻기 위해 두 명의 기후 모델 제작자를 초빙했다. 뉴욕 컬럼비아대학교 고다르 우주 연구소 소속 제임스 핸슨과 프린스턴대학교 지구 물리 유체역학 연구소의 마나베 슈쿠로였다.

과학자들은 대기 과학의 원리를 검토하고 한센과 마나베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교환했다. 그렇게 나온 두 개의 모델은 각각 조금씩 다른 형태로 미래를 경고했고, 차니 팀은 결국 그 차이를 그대로 놓아두기로 했다. 그들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느꼈던 것은 지구가 다음 세기에는 약 3도를 기준으로 50퍼센트 안팎까지 기온이 오를 거라는 사실이었다. 즉 1.5도에서 4도 사이의 기온 상승을 겪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1979년 11월에 보고서가 공개되자 과학 잡지들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 암울한 예측에는 어떤 오류도 없다.”

1970년대 중반, 세계 최대의 석유 기업 엑손(Exxon)은 기후 변화가 정치적 의제가 되어 그들의 사업에 훼방을 놓게 될지 궁금했다. 그들이 궁금증을 품게 된 것은 키신저의 언급 때문일 수도, 혹은 슈나이더의 <투나잇 쇼> 출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과학자들이 기후 변화가 우리에게 해를 입히기 시작하게 될 시기라고 지목한 2000년이 그리 멀지 않아 보여서일 수도 있었다.

1977년 여름, 엑손의 최고 과학 자문 중 한 명인 제임스 블랙이 회사의 고위직 임원들에게 온실 효과를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는 기후 변화가 큰 문제라는 걸 의미했다. 그정도 수준의 임원들은 손익 계산에 영향을 끼칠 문제에 대해서만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같은 해, 엑손은 에드워드 데이비드 주니어를 사내 연구소의 수장으로 고용했다. 데이비드 주니어는 닉슨 대통령의 고문으로 일하는 동안 기후 변화에 대해 알게 되었다. 데이비드의 지휘하에 엑손은 이산화탄소에 대한 소규모 연구 조사에 착수했다. 여기서 ‘소규모’라는 건 엑손의 기준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1년 연구비 100만 달러, 12억 원은 꽤 큰 액수였지만, 이 회사가 연구비로 1년에 대략 3억 달러, 우리 돈 3600억 원을 지출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다.

1978년 12월, 엑손의 이산화탄소 연구를 주도하던 과학자 헨리 쇼는 데이비드에게 편지를 보내 “신뢰할 만한 과학 연구팀을 조직해야 한다”면서, 이 팀은 주제와 관련된 과학적 사항을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하고 “만약 안 좋은 소식이 있다면 그 소식을 회사에 전할 수 있는” 팀이어야 한다고 썼다.
1978년, 굶주린 소가 모리타니의 갈라진 땅에서 물을 찾아 헤매고 있다. ©Alain Nogues/Sygma/Getty Images
엑손은 해양 탐사를 위해 맞춤 제작한 기구를 회사에서 가장 큰 유조선에 장착했다. 회사는 이번 조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길 원했고, 그래서 주요 과학자들이 승선하길 바랐으며, 학자들의 과학적 자유를 기꺼이 보장했다. 이 과학자들이 해양학자 다카하시 타로와 같이 수행한 연구 결과 중 일부는 먼 훗날인 2009년에 발표된, 인간 활동에서 생겨나는 이산화탄소 중 20퍼센트만이 바다로 흡수된다는 결론의 논문에 활용될 것이었다. 이 연구로 다카하시는 UN에서 수여하는 지구환경대상을 받았다.

1982년 10월, 데이비드는 엑손이 자금을 댄 지구 온난화 콘퍼런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계가 화석 연료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이산화탄소 누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재생 가능한 자원을 혼합하는 방향의 에너지 전환에 돌입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유일한 문제는 이 전환이 얼마나 빨리 일어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마도 엑손이 탄소 제로 연료를 향한 혁신을 이끌 것이고, 그 중심에는 자신이 수장인 R&D 연구소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어쩌면 이러한 도전의 상당 부분이 실제로는 충분히 이해되지 못한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건 간에, 1980년대 중반에 이르는 동안 이산화탄소 연구는 크게 줄어들었다.

 

진화한 기후 변화 회의론


1980년 11월, 로널드 레이건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변호사 제임스 G. 와트를 내무부 장관에 지명했다. 와트는 공공 토지를 시추와 채굴에 개방해야 한다며 싸웠던 법률 사무소를 이끌던 인물이었다. 그는 자연 보존을 정책으로도 신념으로도 싫어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그는 또한 환경 보호주의를 “내가 믿는 형태의 정부를 전복시키고자 열과 성을 다하는 좌익 컬트 종교”라 말한 일화로도 유명했다. 전미 석탄협회 회장은 이 인사 지명을 두고 “정신이 나가도록 기쁘다.”고 밝혔고, 기업 로비스트들은 이런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 “100만 명의 환경 보호주의자를 멈추려면 전력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아? 1와트야.”

와트는 사람들이 처음 우려했던 것처럼 환경보호국을 폐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규제 반대자로 알려진 앤 고르서치를 국장으로 임명했고, 그녀는 보호국 예산의 4분의 1을 삭감했다. 환경 운동 진영의 포메런스와 동료들은 할 일이 많아졌다. 그들에게는 기후 변화라는 장기간에 걸친, 여전히 추상적인 문제를 계속해서 다룰 수 있는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대중들이 기후 행동에 나서는 모습을 포메런스가 보기까지는 여전히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다.

1980년 11월 대선 직전,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NAS)는 차니 보고서의 후속 조치를 위해 이산화탄소 평가 위원회를 막 출범시킨 참이었다. 위원회 의장은 빌 니렌버그로, 그는 헬무트 란츠베르크와 마찬가지로 전쟁과 전후 과학 투자 붐을 모두 겪은 과학자였다. 그는 조용히 정부 및 군대와 함께 일했다. 심지어 이아손 멤버이기도 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을 격렬하게 옹호했으며, 그로 인해 몇몇 동료와 사이가 멀어지기도 했다. 그는 1960년대 말, 대학 캠퍼스 내에서 벌어진 좌익 저항 운동과 그 저항 운동에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군대의 지원을 받는 과학에 반발하는 것에도 가차 없는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환경 운동도 혐오했는데, 그가 보기에 환경 운동은 19세기 영국 산업혁명 당시 기계를 파괴하는 운동이었던 ‘러다이트’를 실천하는 무리와 다를 바 없었으며, 특히 원자력 관련 이슈에서는 더욱 그랬다. 여러 면에서 볼 때, 그는 새로운 대통령인 레이건에게 보고할 재검토 작업을 이끄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사람으로 보였다.
2012년, 칠레 토레스 델 피아네 국립 공원에서 화재 진압 중인 소방관들 ©STR/AP
니렌버그는 경제와 과학을 혼합해 보고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이론적으로 이 작업은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출간된 보고서에서 이 두 분야는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보고서의 필자들은 같이 일하지 않았다. 그들은 과학 분야와 경제 분야를 각자 따로 쓰도록 배정받았다. 그러다 보니 보고서는 전혀 다른 두 가지 관점으로 서술되었다. 과학자들이 쓴 다섯 장(章)은 지구 온난화가 무척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경제학자들이 쓴 두 장에서는 지구 온난화가 끼칠 물리적 영향에는 여전히 불확실성이 존재하고, 특히 2000년 이후 지구 온난화가 경제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는 더 큰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는 논조에 초점을 맞췄다. 더군다나 보고서의 틀을 잡은 것은 경제학자들이 쓴 첫 번째 장과 마지막 장에 제시된 관점이었는데, 그들의 분석이 보고서의 전체 메시지를 지배했다. 니렌버그는 일단 두고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는 보고서의 도입부에서 이 문제에 대한 특별한 해결책은 전혀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이 문제를 회피할 수도 없다고 주장하며 이처럼 말했다. “우리는 그저 기후 변화로 인해 펼쳐질 우여곡절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후 변화 회의론에 관한 책 《의혹을 팝니다(Merchants of Doubt)》에서, 나오미 오레스케스와 에릭 콘웨이는 NAS의 기록 보관소에서 니렌버그의 보고서에 대한 동료 학자들의 평가를 샅샅이 뒤져 찾아냈다. 리뷰를 썼던 앨빈 와인버그는 1970년대 이후로 점점 더 기후 변화를 크게 걱정해 온 물리학자였는데, 그는 이 보고서에 큰 인상을 받지 못했다. 사실 니렌버그가 취한 입장에 소름 끼쳐 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보고서에는 사람들이 이동하면서 상황에 적응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는 대목이 나온다. 과거에도 사람들은 기후 변화 때문에 이주를 했으니 또 그렇게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람들이 그토록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굉장한 일이다.”

와인버그는 이에 대해 가차 없이 말했다. “이 위원회 사람들은 정말로 미국이나 서유럽, 캐나다가 강우 패턴이 엄청나게 바뀌어 고통받게 된 가난한 나라로부터 이민자가 밀려 쏟아져 들어오면 받아 줄 거라고 믿는 걸까?” 오레스케스와 콘웨이는 다른 리뷰들을 더 살펴보고는 다른 필자들이 좀 더 예의 바르기는 했어도 와인버그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건 아니라고 말했다. 그들은 어째서 이런 비판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는지 혼란스러웠는데, 나중에 한 원로 과학자가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그 당시는 학문적 검토가 지금보다 훨씬 느슨했죠.”

너새니얼 리치가 책에도 썼듯, 보고서는 1983년 10월 NAS에 있는 성당 모양의 대강당에서 열린 정례 행사 때 처음 공개되었다. 피바디 석탄, 제너럴 모터스와 엑손 모두 초대 목록에 올라 있었다. 포메런스는 어찌어찌 기자 회견장에 끼어 들어갈 수 있었다. 백악관은 아카데미 측에 브리핑하면서, 자기들은 추측성이나 불필요한 우려를 자아내거나 ‘늑대가 온다며 소리치는’ 양치기 소년 같은 시나리오는 승인하지 않는다고 애초에 분명히 못을 박아 두었다. 백악관은 기술이 답을 찾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연구 기금을 모으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는 것 이상의 행동은 기대하지 않는다고 아카데미 측에 밝혔다.

NAS는 이 사람들이 앞으로 몇 년 동안 책임자의 자리에 있게 되리라는 걸 알았고, 그래서 백악관이 원하는 것 중 자신들이 찾아낼 수 있는 가장 과학적인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 최선의 아이디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혹은 그저 니렌버그가 그렇게 믿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건 간에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크나큰 실수였다.

보고서는 솔직하게 서두를 뗀다. “우리의 입장은 보수적입니다. 우리는 조심할 이유는 있지만 겁먹을 이유는 없다고 믿습니다.” 1957년 최초로 의회에서 기후 위기를 브리핑했던 과학자 로저 레벨이 기자 회견에서 발언했다. 리치의 회상에 따르면 그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노란불은 켜져 있지만, 빨간불 상태는 아닙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어떻게 봐도 전적인 재앙은 아닙니다. 그냥 변화인 거죠.” 《월스트리트저널》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최고의 과학자들로 구성된 패널이 지구 기온 상승이라는 널리 알려진 문제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하고 있다.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고.”

이 모든 과정에서 활동가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포메런스와 같은 활동가들이 간절히 바랐던,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거대한 대중적 운동은 어디 있었을까? 주류 비정부 기구뿐 아니라, 한층 급진적인 단체에서도 환경 운동은 붐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환경 이슈, 이를테면 고래나 열대 우림을 구하고 도로 건설을 막는 투쟁 등에 더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2000년대가 되어서야 우리는 기후 변화에 특화한 그룹이 부상하고 또 기후 문제가 대형 비정부 기구의 포트폴리오를 장악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진정한 최초의 운동가, 활동적이고 명시적인 기후 변화 운동가는 오히려 회의론자들이었다. 기후 변화 회의론은 기후 과학만큼이나 오래된 것으로, 초기에는 정말로 합리적인 태도를 취했다. 뭔가 새로운 것이 제시될 때 과학자들이 미심쩍게 눈썹을 치켜올리는 건 정상적인 일이다. 석유 산업은 이 자연 과학적 회의론을 받아들이고 유리하게 써먹었다.
2011년, 콜롬비아 보고타 북쪽 외곽에 있는 아토 그란데 농장에 홍수가 났다. ©William Fernando Martinez/AP
하지만 1980년대에 접어들어 온실 효과에 대한 의견 일치가 확고해지면서 회의론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에 대한 의문을 부풀리고 확장하면서 기후 변화에 관한 경고를 묵살하고,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끄도록 회의론을 조장하는 조직적이고 치밀한 책동이 등장했다.

그건 과학이 아니었다. 설사 과학자를 이용한다 해도 과학은 아니었다. 그것은 ‘홍보’였다. 그게 꼭 가짜 과학을 창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통할 수는 있었겠지만, 어느 정도까지만 가능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진짜 과학자에게 자금을 대겠지만 바로 그런 방법으로 메시지를 혼란스럽고 흐릿하게 얼버무릴 수 있었다. 그들은 1940년대에도 대기 오염을 가지고 이런 방법을 써먹은 바 있고, 그들이 고용한 홍보 회사들은 담배와 암의 연관 관계에 대한 문제로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몇 가지 교묘한 수법을 발견해 냈다.

주요 석유 회사의 최고 경영자들은 회합을 열고 기후 정책에 대응할 수 있는 기금을 모으기로 합의했다. 우선은 10만 달러였지만, 이후 더 늘어날 것이었다. 상당히 합법적으로 들리는 ‘세계 기후 연합’이라는 이름의 단체도 설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종류의 단체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환경 정보 위원회’, ‘냉정한 이성 협회’, ‘세계 기후 정보 프로젝트’, 그리고 점차 과학 냄새를 풍기며 회의론을 설파하는 목소리들이 불어났다. 빌 니렌버그는 거기서 특히 많이 모셔 가는 사람이었다. 기후 변화 논의를 미루려는 사람들은 과학적 논쟁과 정치적 논쟁에 참여하는 것이 최고의 전략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불확실성을 밀어붙이고, 규제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바로 그런 논쟁의 장이었다. 석유 연료 회사와 그들을 옹호하는 자들은 가끔 ‘반(反)과학’의 탈을 쓰기도 했다. 사실 그들은 늘 과학에 대해 이야기한다. 언제나 그래 왔다. 다만 어떤 부분을 취하여 써먹을 것이냐에 대해 전략상 다를 뿐이다.

 

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


기후 위기의 역사에 대해 쓰는 동안 가장 힘든 부분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에 이미 나왔던 경고들과 마주하는 것이었다. 그 경고들은 만약 아무도 화석 연료에 대해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2000년 이후에는 상황이 정말로 나빠질지 모른다고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당시 그 경고를 보낸 이들은 희망을 품고 있었지만, 이제 와 그 희망을 다시 읽다 보면 마음이 아프다.

우리는 지금 조상들이 꿈꾸던 악몽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만약 우리가 이에 대한 비난의 몫을 나누려 한다면, 교묘하게 의심을 심은 자들이 맨 앞줄에 서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몇 세기에 걸쳐 형성된 과학 연구 문화도 충분히 들여다볼 가치가 있으며, 그중 일부는 업데이트가 되면 좋을 것이다. 의심을 퍼뜨리는 자들은 나름의 목적으로 과학에 긍정적인 힘을 보태기도 하나, 세대 갈등을 악화시키고 극적인 것을 회피하는 과학 공동체의 성향을 악용했으며, 누가 합법적인 정치적 파트너이고(이를테면 정부) 누가 그렇지 않은지(이를테면 활동가들)에 대한 관념을 조종하 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기후 변화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지금껏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왔다. 과학계에서 논쟁의 여지가 많은 학문 분야를 공공의 영역에 옮겨 놓았을 때 일어나게 될 여러 난관과 변화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충분한 예산이 전문가 즉, 과학자들에게 주어졌어야 했다. 정부로부터의 지원도 있었어야 했지만,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과학 공동체 내부의 게이트 키퍼도 필요했다. 하지만 외려 이 과학자 중 상당수는 동료들에게 비웃음을 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미디어에 출연하거나 감정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말이다.

21세기의 시민으로서 우리는 엄청난 규모의 혼란을 상속받았다. 하지만 또한 우리를 도울 수 있고 다른 이들을 살아남게 해줄 많은 도구도 물려받았다. 이 도구 중 가장 빛나는 별은 현대 기후 과학이다. 그 별을 따라 태양 전지, 열펌프, 정책 시스템과 활동가 단체가 반짝거린다. 우리 조상들이 공기를 보면서 그게 서로 다른 화학 물질들, 다시 말해 들이쉬거나 내쉬는, 불을 붙이거나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수 세기 동안 화학 연료를 태운 끝에 지구에 온난화 효과를 야기할 수 있는 화학 물질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그저 엷은 공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게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기후 변화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우리에게는 행동에 나설 기회를 주는 지식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자리에 앉은 채 태평하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테니 말이다. “오늘도 또 날씨가 좀 이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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